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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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레발 치는 게 조금 불만이다.  

 

  부정확한 정보도 간혹 보이고.  

 

  제국주의 성향은 가까운 동남아 근로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미 해외진출 기업은 원성이 자자하다 한다.  

 

  한중일 세 나라의 공조가 쉽지는 않다.  

 

  외환기금 조성만 봐도 그렇다.  

 

  실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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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얼마나
홍성욱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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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편집한 <과학고전선집>을 보면서도 한 생각이지만 서양 편향의 과학관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쉽다.  

 

  서양과학이 과학의 전부란 게 사실일까? 

 

  이러한 질문조차 저자는 하지 않는다.  

 

  '과학은 얼마나?'라며 숱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말이다.  

 

  한 줄 인용한 장회익의 책도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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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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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심과 주변

  소설은 웨이주앙(未莊)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규(淺閨)와 심규(深閨, 치엔씨와 짜오씨의 대저택)가 엇섞인 평범한 마을이다. 또 다른 공간이 등장한다. 바로 성내이다. 그런데 웨이주앙과 성내는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Q의 말이다. “하지만 웨이주앙 사람들은 정말로 세상 구경도 못한 가소로운 시골뜨기들이었으니, 그들은 성내의 생선지짐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69면)

  소설은 두 세계가 만나고 있다. 성내와 웨이주앙이 그것이다. 이를 앞으로 중심과 주변이라 이름 짓는다. 성내가 중심일 수 있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성내는 웨이주앙 사람들로서는 권위의 공간이다. 앞서 인용한 아Q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성안의 선진생활양식(언어 활동, 식생활)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또한 마을은 혁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혁명에 관한 부정확한 소문만이 무성하다. 혁명을 직접 목도하는 자들은 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선에 두 사람이 선다. 아Q와 가짜 양놈이다. 여기서 바흐친의 이론은 시사적이다. “이 세 인물-악한, 광대, 바보-은 이 세계 속에서 ‘타자’가 될 권리, 즉 현존하는 인생의 범주들 중 어느 하나와도 협력하지 않을 권리를 지닌다.” 이 말은 악한, 광대, 바보만이 중심과 주변의 경계선에 설 수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아Q와 가짜 양놈을 바흐찐이 말한 바 경계인으로 본다. 아Q와 가짜 양놈은 경계선에 서 있다. 경계선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2 축제의 공간

  아Q와 가짜 양놈,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모두 외양이 특이하다. 아Q의 머리엔 나두창(癩頭瘡)의 부스럼 자국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가짜 양놈은 변발을 하지 않았다. 그의 단발머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파격이다.

  두 사람은 모두 성내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게다가 성내에도 몇 번 갔었기 때문에 아Q가 더욱 자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69면) 가짜 양놈은 일찍이 성내에 있는 학교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자이다.

  별 하릴없던 이들이 갑자기 바빠진다. 무엇 때문인가? 혁명이 일어났다. 졸졸거리던 중심과 주변의 소통이 급격히 많아진다. 경계선에 유일하게 설 수 있는 두 사람이 바빠짐은 물론이다. 혁명이란 두 사람에겐 축제의 공간이다. 소설 속에서 혁명을 가장 반기는 이들은 당연 아Q와 가짜 양놈이다. 왜인가? 경계에서의 삶을 이제는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중심부에 진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어찌 기쁜 축제가 아니겠는가? 두 사람의 발길이 바빠진다. 바흐친은 카니발(축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카니발의 공간 안에서는 개인들간의 친밀한 접촉들이 일어나면서, 인간본성의 은폐된 부분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구체적인 감각의 형태로 표현된다.” 우리의 아Q는 이 때 무엇을 표현하고 있나? 다음 내용을 살피자.


반역이라? 재미있구나,‥‥‥하얀 투구에 하얀 갑옷의 혁명당이 온다, 청룡도에

쇠채찍, 폭탄, 총,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 구겸창(鉤鎌槍)을 들고서 사당 앞을 지

나가며 부른다.‥‥‥짜오쓰천의 누이동생은 너무 못생겼어. 쪼우치댁의 딸은 몇

년 더 있어야 되고. 가짜 양놈의 마누라는 변발도 없는 남자랑 잤으니, 흥, 좋은

물건이 아냐! 수재의 마누라는 눈까풀에 흉터가 있지‥‥‥우마는 못 본 지 오래

됐는데, 어디 있나 몰라, 아깝게도 발이 너무 크지.(106, 7면)


  인용이 길어졌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아Q 육체의 무한한 과장을 본다. 그의 외양은 명대(明代) 장수들의 갑옷으로 과장되고, 성적 욕망은 나이와 혼인 관계를 상관치 않고 끝간데 없이 펼쳐진다. 바흐친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 받아들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물질적인 육체적 원칙’을 들고 있다. 위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곳에서 인간의 육체는 극도로 과장된 형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3 비극의 공간

  두 사람은 경계인이나 또한 크게 다르다. 축제(혁명)가 끝날 때쯤 우린 이를 확인한다. 아Q는 양선생(洋先生)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서둘러 도망한다. 바흐찐은 주변적 인물을 셋으로 나누었는데-악한, 바보, 광대-아Q는 바보에, 가짜 양놈은 악한에 가까우리라. 또한 두 사람이 경계선까지 밀리기 이전 어느 곳에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아Q는 주변부, 그것도 맨끝자락에서 성큼성큼 경계로 진입했다. 반면 가짜 양놈은 그의 교육 이력이 말하듯이 중심에서 경계인으로 밀려난 것이다. 혁명 후 두 사람의 반목은 이 때문인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혁명 이전에도 대립했다. 그것은 두 사람이 경계인에 대한 공유의식이 없었고, 무엇보다 같은 경계 안에서도 앞서 말한 바처럼 한 사람은 바보, 다른 한 사람은 악한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성(城)은 강한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하기에 구(球)로 표현할 수 있겠다. 구심력은 주변부를 지배하는 권위이다. 원심력은 아Q와 같은 경계인의 침범을 용납치 않는 강한 밀어냄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방향은 반대지만 크기는 같듯 성은 밀고 당김을 동시에 해내고 있다. 두 힘이 회전하는 입체의 구에서 일어나듯 성은 그 안에서도 입체적인 위계를 이루고 있다.

  반면 웨이주앙은 평면이다. 이 공간의 끄트머리를 점선으로 표시한 건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주변부 삶의 영락은 끝이 없다. 정리하자면 아Q는 화살표의 모양처럼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틈입하다 튕겨져 나온다. 가짜 양놈은 중심부에서 밀려난 후 다시 중심으로 진입한다. 화살표의 모양은 같지만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이처럼 다르다. 
 

  축제의 공간에서 둘이 부딪혔을 때 이기는 이는 당연 중심부 이념의 담지자이다. 왜인가? 중심과 주변은 이미 그 자체가 위계로 배치되어 있다. 주변은 어디까지나 중심에 종속되어 있다. 경계인이 경계선에서 하는 역할이란 기껏해야 중심부의 활성화일 뿐이다. 역할이 끝나면 그들의 삶도 다하는 것이다. 역할을 다 한 아Q는 죽음을 맞는다. 마치 중세 축제의 공간에서 왕의 의상을 걸치고 왕 노릇을 하던 노예, 포로들이 막이 내리면 왕관을 벗기우고 채찍에 맞아 왕 대신 살해되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이로써 과잉의 욕망들은 중심부의 질서로 수렴되고 만다.


그들 대부분은 총살은 참수만큼 구경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하며 불만스러워했다.

게다가 얼마나 웃기는 사형수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거리를 돌았으면서 끝내 노래

한마디를 못 부르다니 말이다. 그들은 한차례 헛걸음을 한 것이었다.(126면)


  여기까지 오면 아Q는 광대의 모습마저 보인다. 중심부에서 밀려난 가짜 양놈은 악한의 모습만을 보인다. 반면 아Q는 바보였으며 광대였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 무거웠음인가? 악한인 가짜 양놈은 살아남지만 아Q는 죽고 만다. 소설에서 갖게 된 비극적 느낌은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린 혁명이란 축제의 공간이 어느새 비극의 공간으로 바뀜을 보았다. 무엇 때문인가? 이 축제는 중심의 필요에 의해 마련된 일시적인 잔치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초입에 루쉰(魯迅)은 이 체계를 목도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나는 괴롭지만 더욱 견고해졌다 말할 수밖에 없다. 견고화의 주된 힘은 자본과 인종이 될 것이다. 이 구도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아Q는 다시 태어나도 죽을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난 큰 고민을 껴안는다. 루쉰의 바람은 어디까지 닿아 있는가? 제대로 된 근대인가? 근대 이후인가? 시원찮은 대답이라도 찾는 게 루쉰을 읽는 우리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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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전집 1 - 궁핍한 시대의 시인
김우창 지음 / 민음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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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구의 시인의 말대로 김우창의 글들은 정확하다.  

 

  그것은 그의 방대한 지적 체계와 문학적 비약을 허용치 않는 치밀함 덕분일 것이다.  

 

  이것들이 어디까지 내다보게 할 지는 김우창의 책임일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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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마음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5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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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창의 장점은 성실함이다.  

 

  성실하게 읽고, 생각하고, 쓴다.  

 

  양학이 전공이라는 사실이 어쩌면 그에겐 부담을 덜 수도 있었을테다.  

 

  성실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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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03-14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구매했어요~ 반액세일 하길래..... 이 양반 책이 원체 어려워서 읽을 엄두가

안나지만 말이죠. 고종석은 김우창을 평하길 '강철같은 사유인'이라고 하더군요.

한겨레신문사에서 이 분이 하는 강연을 대학시절에 접했는데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더군요.

고교시절 국어샘이 이 분에 관하여 언급하길 책은 좋은데 강의는 영 별로라고 했는데 말이죠

자타공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김우창의 글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제 수준이 영 멀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이조부 2010-03-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주인장이랑 저랑 책 읽는 취향이 겹치는 부분이 많네요~

어떤 책에 관하여 검색을 하면 파고님 단평을 자주 봅니다. 절대적인 독서량은

주인장이 훨씬 많겠지만 말이죠 ㅎㅎㅎㅎ

파고세운닥나무 2010-03-18 11:11   좋아요 0 | URL
황지우도 김우창이 달변은 아니라고 하죠. 머리도 잘 안 감는다고도 하고요^^
김우창과 문광훈의 대담집이 <세 개의 동그라미>인데, 근래 김우창이 갖는 생각을 살펴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대담집이라 아무래도 평이하구요. 근데, 이 사람이 워낙 어려운 사람이 이 책마저도 상당하죠.
대학 때 민음사에서 펴낸 김우창전집을 보려고 낑낑댄 적이 있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어댔는데,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나오구요.
절판된 전집이 다시 나왔던데 한 번 다시 보면 어떨까 요새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