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영미 옮김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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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광부 33인의 구조 동영상을 보다 꺼내 든 소설이다.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Blake's Therapy)>은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장편소설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칠레 작가이다. '칠레 작가'라 일컬음은 작가 자신이 원하는 바다. 도르프만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칠레에 정착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아옌데의 좌파정권 성립에 일조하던 중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미국에 망명한다. 이후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도르프만은 디아스포라의 전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다. 디아스포라가 본래 유대인 난민만을 일컫는 말임을 기억해두자. 그의 조부는 사업을 이유로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그의 아버지는 정권의 탄압으로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미국으로 도망한다. 열여덟살이 될 때까지 자신을 미국인이라 영어로 대답하던 도르프만은 칠레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고민을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적 현실이 자신이 자라온 미국 때문임을 알게 된 것이다. 미국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한 아옌데의 사회주의 연합정부의 탄생을 도왔던 그에게 비극을 가져다 준 건 미국이었다. 미국의 지원으로 피노체트 군부세력은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고 17년 간 칠레를 '막장'으로 끌고간다. 디아스포라 도르프만의 회고록 제목이 의미깊다.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Heading South, Looking North)>. 남과 북이다. 직접적으론 남미와 북미겠다. 이 뿐일까? 빈곤과 부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자연과 인공도 대립 요소항이 되겠다. 남과 북에 흩어진 작가의 정체성이다.  

  내가 읽어내는 도르프만의 작품 경향은 두 가지 정도겠다. 우선 그는 칠레 군부 독재 정권의 야만성을 비판한다. 단편집 <우리 집에 불났어(My House is On Fire)>와 희곡집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는 칠레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군부 독재를 그들만이 겪은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기도 하다. 희곡 <죽음과 소녀>에는 독재 정권 치하에서 여대생을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들으며 성적으로 고문하는 의사가 나온다. 난 이 희곡을 소극장에서 연극으로도 보았는데, 베토벤을 들으며 유대인을 태웠던 아우슈비츠의 나치 병사를 떠올렸다. 아우슈비츠가 산티아고로, 산티아고가 독재 치하의 한국으로 오버랩되었다.  

  또 하나는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한 딴죽걸기이다. 일종의 문화비평서인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Donald Duck)>가 대표적이다. 미국 문화의 대표격인 디즈니 만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작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도 이 경향에 속하는 소설이라 하겠다. 미국 대기업의 최고경영자 블레이크는 인생의 난관을 맞는데,  자신의 기업에 닥친 경제적 위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생활과 기업의 실상이 모두 드러난다. 문제는 이 드러냄의 방식이다. 도르프만은 전통적 소설 양식을 거부하고,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함축적 상징을 통해 독자에게 실상을 보여준다. 이 같은 기법은 <체 게바라의 빙산(The Nanny and the Iceberg)> 이후로 작가가 실험을 거듭하는 모습인데, 전달의 수단으로는 썩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텍스트에 가히 뭇매질을 가해 다시 헤쳐모음은 장관이지만, 전달의 효과엔 의문을 갖는다.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도 그런 면에선 아쉬움을 남긴다.  

  최고경영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블레이크가 갖는 고뇌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지시 하나, 하나에 해외 공장 노동자와 미국의 이민 노동자의 삶이 격변을 겪음을 그는 알아간다. 독립적인 인간이라지만, 그 역시 자본주의를 돌리는 힘없는 나사 하나일 뿐이다. 블레이크에 대한 비판적 성찰 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Ariel Dorfman(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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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1-0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틀어놓고 여대생을 고문하는 이야기는 시고니 위버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이기도 한데요. 제목이 영 생각이 안나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1-03 18:06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엔 <진실>로 소개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죠. 그 영화의 원작이 위에서 말한 희곡이에요. 영화의 원제목도 <죽음과 소녀>이구요. 영화는 안 봤는데, 저 희곡집을 읽다 영화 관련 자료도 찾아보았어요. 연극은 연극대로 좋더군요^^

다이조부 2010-11-0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의 댓글을 보니까 나찌의 만행과, 우리의 지난 암흑같은 시절도 연상되네요.

영화 박하사탕도 생각나고요. 가정에서는 따뜻한 아버지가, 자신의 일터에서는 고문을

하는 것. 이런 기록을 볼때마다 인간에게 희망은 있는가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1-04 15:16   좋아요 0 | URL
희곡 <죽음과 소녀>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어요. 민주화가 되어 과거사를 정리하는 위치에 오른 여주인공의 남편에게 아내가 독재치하에서의 판사들을 비판해요. 여전히 요직에 올라 호위호식하는 그들을 비판하는데 우리도 다르지 않죠. 과거를 공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겠죠.
비극을 막는 게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