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 - 폴란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 외 지음, 정병권.최성은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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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작이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이다. 소설 제목의 무서움에 이끌려 책을 집었는데 역시나 내용도 무섭고 슬프다. 작가인 타데우쉬 보로프스키는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아우슈비츠를 체험했는데 소설엔 그 경험이 녹아있다. 작가는 같은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을 사살하는 작업을 하는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어느새 그 작업을 그저 귀찮고 피곤한 일로 여기게 됨을 슬프게 고발한다. 작가는 폴란드 문학의 기대주로 주목받다, 수용소 귀향 6년 만에 돌연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0년 만에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다시 봤다. 이전에 미처 몰랐던 걸 몇 가지 발견했는데 레싱 박사의 상징성이 그 중 하나이다. 시종일관 수수께끼에 골몰하는 레싱 박사는 휴머니티가 말소된 기능적 지식인의 한 상징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의 안위에 애가 탄 주인공 귀도에게 수용소에서도 심각한 모습으로 수수께끼를 내는 레싱의 모습은 유대인 시체를 태우며 베토벤 교향악을 들었다는 독일 병사의 일화처럼 슬펐다. 베토벤 음악의 본질은 무얼까? 그 음악과 유대인들의 비명 사이엔 무엇이 놓여져 있을까? 유대인을 실은 숱한 열차를 아우슈비츠로 보낸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범 재판에서 가장 즐겨 읽는 책이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라 답했다는데(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칸트는 그 책에서 무엇을 말했나?  

  또 한 가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은 도라-귀도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갈지가 궁금했다. 10년 전 영화를 본 이후로 아우슈비츠 작가들이 대부분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걸 알게 되었다.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가 대표적일 듯 한데, 이젠 타데우쉬 보로프스키까지 포함해야겠다. 도라와 조슈아의 생환을 즐겁게만 받아들일 일이 아닌게 되었다.

    

         Tadeusz Borowski(1922-1951)

 

着語 : 책엔 표제작 말고도 좋은 소설이 많다. <파문은 되돌아온다>(볼레스와프 프루스)는 중편은 종교에 대한 비판과 긍정을 동시에 해내는 수작이다. <쿠오바디스>의 작가로 유명한 헨릭 시엔키에비츠의 단편 <등대지기>는 약소국 폴란드의 현대사를 비추며 등대의 빛처럼 아련한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보석 같은 소설이 이리 많은데 여태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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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7-1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다소 억지로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려는 데 비해 '등대지기'는 굉장히 자연스럽지요.모국어가 그리운 사나이의 심정도 이해되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5 17:30   좋아요 0 | URL
<마지막 수업>에 대해선 서경식 교수가 날선 비판을 하죠. 소설의 배경인 당대 알자스 지방에선 프랑스어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뚱딴지 같이 불어 수업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냐구요. 알자스 지방은 알자스어를 사용했고, 독일이 점령하자 할 수 없이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하죠. 일종의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황당한 민족주의입니다.

다이조부 2010-07-1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서경식 아저씨가 쓴 글 읽어보고 싶네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5 19:17   좋아요 0 | URL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 원고가 실려 있습니다. <별>의 작가가 이토록 기만적인 소설을 쓸 줄 몰랐습니다.

반딧불이 2010-07-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틀러가 바그너를 스토커처럼 좋아해서 행진할때나 모든 행사, 그리고 유태인을 가스실에 넣을 때도 바그너 음악을 틀었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병사들을 휴가보낼 때도 바그너 작품을 감상하고 귀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던데 베이토벤은 금시초문이에요.

미지 2010-07-16 03:37   좋아요 0 | URL
최고의 베토벤 해석가 푸르트벵글러(그는 당대 최고의 바그너 해석가이기도 했죠. 이른바 독일적 정신 구현에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지휘자)의 친나치(하이데거를 연상케 하는) 행적은 베토벤애호가들에게 언제나 주어지는 윤리적 딜레마입니다. (한국에선 특히 서정주,,,,가 그 몫을 하죠. 한때 많은 시인들이 처녀 시집의 자서에 서정주에 대한 애증을 토로했더랬습니다...) 어찌 보면 베토벤이 근대 음악의 효용을 자신의 고통-직관을 통해 선취했다 싶습니다. 나치가 써먹었다 해도 베토벤은 멋집니다.(사실 몸소 친일하고 전두환지지한 서정주의 '천재적 유연함'과는 구별해서 얘기해야 합니다) 특히 후기 현악곡들은...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6 13:21   좋아요 0 | URL
서경식 교수의 어느 글귀에 그 내용이 있는데 말이죠. 이젠 이 분의 책도 꽤 많아 찾는 게 일이 되었네요^^
근래 예스24에 연재하는 '나의 서양음악 순례기'를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동안 음악에 관한 책을 따로 내진 않았는데, 연재가 마무리 되면 서양음악에 대한 좋은 책이 될 듯 합니다.

미지 2010-07-1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나무님 문학전집 수집하시는 소식을 꾸준히 듣고 싶네요. 부탁드립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6 13:27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사 간 '오늘의 세계문학'은 전 30권인데, 이제 절반 모았어요. 요사이 문학동네와 민음사에서 펴내는 세계문학전집과 중복되는 작품도 있네요. 아주 생소한 작품도 눈에 띄구요. 독문학과 불문학 중심인데 출간된 당시에는 상당히 이채로웠을 듯 합니다. 제겐 지금도 이채롭지만요^^
전공이 중문학인데 중앙일보사에서 90년에 펴낸 '중국현대문학전집'을 구하려 합니다. 몇 권은 공부하며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했는데요. 인터넷까지 뒤지면 어렵지 않게 구할 듯도 하구요.
이리 보면 <중앙일보>가 참 좋은 신문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7-16 16:31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의 세계문학과 중국현대문학전집 다 있습니다.헌책방에서 구했지요(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선 조셉 콘라드<서구인의 눈으로>가 재미있었습니다.드릴러물로도 그만이더군요).토지개혁에 관심이 많아 주립파의 <폭풍취우>는 따로 구했습니다.소설 자체보다는 국공내전에 관심이 많아서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6 17:14   좋아요 0 | URL
후, 부럽네요^^ 콘라드의 <서구인의 눈으로>는 좋은 작품이죠. 콘라드의 정체성이 당대 정치 현실과 맞물려 잘 드러나지요. 그 극렬한 자기 부인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높게 사구요. 한길사에서 펴냈던 콘라드의 <노스트로모>는 제국 미합중국의 모습을 예견한 훌륭한 작품이기도 하구요. 번역이 다시 되었으면 합니다만......
중국현대문학 번역은 유명 작가 위주라, 전집에 실린 작품들이 시간이 지나니 아쉬운 게 많아요. 말씀하신 저우리보도 그렇구요. 왕멍의 <변신하는 인형>은 번역자인 전형준 교수가 다시 살렸습니다만. 번역자와 연구자들의 몫이겠죠.

다이조부 2010-07-16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프가 중앙일보에서 근무합니다. 만나면 한 번 그 책 물어봐야겠네요 ㅋ

파고세운닥나무 2010-07-17 11:52   좋아요 0 | URL
90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현대문학전집도 컬렉터들이 많이 찾는 책이죠. 동유럽 쪽은 이후에도 번역이 잘 안됐으니까요. 이 책도 물어봐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