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지 오웰에 대해선 다들 좋은 얘기를 하니 에드워드 사이드를 빌어 딴죽을 좀 걸고 싶다. 이 책의 174면이다. "나는 비슷한 광경을 버마에서 수없이 목격했다. 몽골 인종들 사이에는(내가 알기론 모든 아시아인들 사이에는) 선천적인 평등의식 같은 게 있다. 사람끼리 쉽게 친밀해지는 경향 같은 게 있는데, 서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오웰의 이 말이 귀에 거슬린다. 오웰이 말하는 평등의식은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런데 오웰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사회주의 사회로 가려면 선천적 평등의식은 외려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오웰의 아시아에 대한 애정은 알겠지만 정확한 이해는 아니라 하겠다. 평등의식을 조금 확대 해석하면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리 되면 오웰은 선배들의 우를 다시 범하게 된다. 영국인 러디야드 키플링과 에드워드 포스터가 이해한 동양은 그저 종교의 나라였다. 그들의 소설 <킴>과 <인도로 가는 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Culture and Resistance>(Consoritum Books Sales & Dist, 2003)에서 오웰을 이리 평가한다. "(Orwell) had no great love for Indians or Blacks or Jews,"(번역이 안 돼 원문을 인용한다) 사이드는 주저인 <오리엔탈리즘>에서도 오웰의 기행문을 인용하며 동양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비판한다.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제국 경찰로 일한 버마의 경험이 이후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살게 했다는데 나는 그의 제국 경찰로서의 반성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의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얼렁뚱땅 넘어가고 서둘러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모양이다. 인도를 '미개한 나라'(<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라 말하는 '위대한' 경제사상가 존 러스킨보다야 그가 낫지만 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조지 오웰의 열렬한 지지자인 박홍규 교수의 입장이 궁금해진다. 박홍규는 사이드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를 번역하고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조지 오웰>이란 평전도 냈고 말이다. 내가 읽어내기론 박홍규는 오웰의 동양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지 않는다. 일부러 보지 않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홍규가 번역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를 보며 사이드의 민중성을 과하게 옹호하는 게 눈에 거슬렸다. 박홍규가 자신이 좋아하는 지식인들을 자꾸 곡해하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이드와 오웰은 꽤 어긋나는데 말이다.  

 

 

         George Orwell(1903-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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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6-22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웰의 동양이해에는 피상적인 부분이 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아참,,닥나무님. 버마는 이제 미얀마로 나라이름이 바뀐거지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6-22 15:42   좋아요 0 | URL
1989년에 군부 쿠데타가 있었는데 나라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었다고 하지요. 군부에 반대하는 민중들은 여전히 버마라는 이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2007년 미얀마 사태 때 경향신문 같은 데선 미얀마 대신 버마란 이름을 사용했죠.
입각점이 다르긴 하지만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는 게 맞다는 생각도 해 보구요.
그래도 오웰은 아시아에 대한 일종의 죄의식을 갖고 살았다고 해요. 근데 죄의식이 똑바로 보게 하는 건 아닌 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