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에 영화를 보고 여태까지 <시>에 사로잡혀 산다. <오아시스> 이후로 이창동의 영화는 관념성이 강화된 듯 한데 자연스레 영화 안에 장치들이 많아졌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고 생각이 많아진 건 그 장치들을 어찌 해석하고 받아들일까라는 고민 때문이다. 조동일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오아시스>부터 이창동의 영화는 "헤어짐에서 만남으로, 상실에서 회복으로 진행"되었다.(영화 <오아시스>에 바치는 찬사) 내 생각에 이 같은 진행은 <밀양>까진 유효할테지만 <시>부터는 다시 "밝음에서 어둠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나아가는 듯 하다. 이 변화가 내겐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전작인 <밀양>이 피해자의 아픔을 다뤘다면 이번 영화는 가해자의 고통을 말한다. 이 말은 상당히 거칠고 성긴데 그 안의 구도는 꽤 복잡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미자는(윤정희 분) 여학생 자살에 있어 가해자가 아니지만 손자 욱이로 인해 가해자의 역을 떠안는다. 가해자가 아닌데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무덤덤한 가해자(욱이) 앞에서 몸서리 치며 괴로워하는 미자의 모습은 이후 여학생과 피해자로서의 동일화를 이루는 복선을 만든다. 미자는 가해자가 아니지만 가해자가 되었고 이내 피해자가 된다. 손자의 무덤덤한 표정처럼 무덤덤한 세상 속에서 미자 혼자 가해자로 아팠다 피해자로 괴로워한다. 피해자의 아픔을 다룬 <밀양>을 <시>가 넘어서는 모습이다.
시인이 남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미자야말로 시인이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고통을 그가 온통 껴안기 때문이다. 이 온갖 고통이 영화의 마지막에 울려나오는 미자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로 수렴되는 건 장관이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미자가 손자를 향해 씻으라며 몸을 깨끗이 해야 맑은 정신이 깃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정작 미자는 이 말을 지키지 못하는데 강노인(김희라 분)과의 정사를 통해 자신의 몸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눈물을 머금고 강노인을 감당하는 미자의 모습은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活着)>-<인생>(장이머우의 영화제목)이란 밋밋한 제목의 개정판으로 출간돼 불만이다. 원제목도 '살아간다는 것'에 가깝다-이 있다. 저 모습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 여러 편의 시가 나오는데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잠깐 귀에 들렸다. <게 눈 속의 연꽃>(1990)에 실린 시인데 사실 이 시집엔 오월 광주의 아픔을 말하는 시들이 많다. 그 아픔을 남은 오월에라도 두리번거려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