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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출판사의 상술이겠지만 '답'을 말하는 게 눈에 걸린다. 독서가 답을 찾아가는 행위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실용적 독서야 그럴 개연성이 있겠지만 그런 책을 읽지 않는 내겐 그저 책읽기란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행위이다. 책이 삶과 만나고 그 모습이 제각각이니 자유로운 것이다. 그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책 읽는 행위의 의미는 내게 족하다.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빵 한 조각에 관한 단상이 있다. 건빵 한 조각에 수용소 사람들이 싸우고 자신 역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보며 식빵을 먹고 있었는데 식빵 봉지에 '이탈리아식의 부드러운 식빵'이라 적혀 있었다. 레비가 이탈리아 사람인데, 난 문득 식빵을 집고 먹는 내 손과 입이 부끄러워졌다. 건빵 한 조각에 싸우는 사람들과 그저 식빵이 아닌 이탈리아식의 부드러움까지 준다는 식빵을 먹는 나 사이엔 무엇이 놓여져 있었을까? 사람들의 몰이해가 레비를 자살로 이끌어갔다는 생각을 하는데 나는 얼마나 레비와 레비의 상황을 이해할까 생각해 보았다.
수용소에서 만난 프랑스계 유대인 청년에게 평소 암송하는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들려주던 레비에게 <신곡>은 무엇이고 책은 무엇이었을까? 곧 닥칠 죽음 앞에서 오고 간 <신곡>과 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학에 가려 집배원을 하며 책을 읽었던 가스똥 바슐라르를 생각해 본다. 아내의 죽음 후 딸아이를 키우며 시를 읽었던 바슐라르를 생각해 본다. 바슐라르는 무슨 생각으로 책을 읽었을까? 독서의 신(神)에게 바슐라르는 매일 아침 게걸스런 독자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몽상의 시학> 서문)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말이다. <공간의 시학>에서 책으로 된 성에 살러 가겠다는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선 거대한 도서관 모양의 천당을 말한다. 공간이 몽상을 거쳐 천당까지 올라간 것이다. <몽상의 시학>을 마친 지 꼭 3년 뒤 바슐라르는 도서관 모양의 천당에 간다. 바슐라르는 독서의 신과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