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성찰 을유세계문학전집 90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신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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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주는 긴장감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나는 리얼리즘에 관한 한 플로베르는 일말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던 작가이며, 그 누구보다 적합한 증인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현대 소설이 자기의 희극적 장치를 밖으로 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소설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이상이 자신이 맞서고 있는 현실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은 매우 느슨하다. 즉 이상은 아주 낮은 높이에서 떨어진다. 따라서 19세기 소설은 얼마 가지 않아 읽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시적 역동성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알퐁스 도데나 모파상의 작품이 우리 손에 "굴러 들어올 때" 불과 15년 전에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주는 긴장감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188∼189쪽)

 

 

 

리얼리즘을 증오하기 때문

 

19세기의 이상은 리얼리즘이었다. "팩트, 오로지 팩트만이 중요해"라고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나오는 주인공은 외친다. 콩트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관념이 아니라 팩트를 주창한다. 보바리 부인은 M.오메와 같은 공기, 즉 콩트 철학의 분위기를 호흡한다. 플로베르는 소설을 쓰는 동안 『실증 철학 강좌』를 읽고 나서 이렇게 쓴다.

 

"이 작품은 매우 심오한 광대극이다. 이를 납득하려면 작품이 요약된 서문만 읽어 보면 된다. 여기에는 사회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적 취향을 통해 연극을 공격하는 사람을 웃게 만드는 샘물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워낙 난폭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설령 자기 자신이 이상화될지라도 이상적인 것을 참지 못한다. 또한 19세기는 영웅적인 방식으로 모든 영웅주의에 반기를 드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실증주의를 선포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이런 노력이 다시 한 번 현실의 가혹한 시련을 통과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플로베르는 굉장히 뼈대 있는 말을 흘린다."사람들은 내가 사실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내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리얼리즘을 증오하기 때문이다."(189∼190쪽)

 

 

 

핍진성 비판

 

19세기 초반 몇십 년 동안의 생물학 분야는 결정론에 기반을 둔 자연 과학에 의해 정복당했다. 다윈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줄이었던 '생기(lo vitl)'를 물리적 필연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생명은 이제 물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생리학은 기계 역학으로 축소된다.

 

스스로 활동하면서 독립적인 개체처럼 보였던 인체는 마치 태피스트리 그림 속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환경 속의 부속물로 편입된다. 이제 활동하는 것은 인체가 아니라 인체 내의 환경이다. 우리의 행위는 타율적인 반작용일 뿐이다. 자유도 없고, 고유성도 사라진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환경에 적응시킨다는 뜻이다. 적응한다는 말은 물질적 환경이 우리 내부를 꿰뚫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 것을 방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응은 순응이며 굴복이다. 다윈은 지구상에서 영웅들을 쫓아냈다.

 

이와 함께 '실험 소설'의 시간이 도래한다. 에밀 졸라는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클로드 베르나르에게서 시를 배웠다. 베르나르는 항상 사람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자기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자기가 사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설은 환경을 재현하는 길을 모색한다. 환경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예술은 이제 한 가지 규칙에만 복종한다. 그것은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이다. 그렇다면 비극에는 내부적으로 그 같은 독립적인 핍진성이 없다는 말인가? 비극에는 미적인 진리(vero)도 없고 아름다움과의 유사성(similitude)도 없는가? 실증주의에 따르면 그 대답은 "없다"이다. 아름다움이란 핍진성이 있다는 말이고, 진실한 것은 오로지 물리학에만 존재한다. 이제 소설은 생리학을 추구한다.

 

어느 날 밤 부바르와 페퀴셰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핍진성과 결정론에 모든 영광을 바치면서 시를 매장한다.(190∼191쪽)

 

 

 

불충분하면서도 명료한 것

 

훌리안 마리아스는 지금까지 전개된 철학적 논의가 이제부터 논의될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돈키호테』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것이 다루고 있는 철학적 문제를 깨우치려 한다. "풍자적인 어투의 이 변변찮은 소설"은 동시에 심층적 의미가 있는 책이다. 따라서 전형적인 심층성이 있는 예술 작품으로서 『돈키호테』는 실재의 '깨침'이고 섬광과도 같이 삶을 명료하게 해준다. 그 내용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삶에 대해 무엇을 '암시'하는가? "우리에게 말없이 진리를 가르쳐 주려는 사람은 그냥 간단한 몸짓으로 그것을 암시한다." 예술 작품에서는 특히 이 원칙이 중요하다. 그 때문에 주석이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민족주의적 감성을 통해 이 작품에 쏟아졌던 모든 찬사들"이나 "세르반테스의 생애에 대한 모든 현학적인 연구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셸링, 하이네, 투르게네프 등 외국의 문호들에 의한 "순간적이고 불충분한" 생각이 '깨달음'을 준다. 뛰어난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들이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읽고 촌철살인의 글을 남긴 예는 많다. 예를 들면 1837년의 『돈키호테』독일어 번역본에 실린 하이네의 서문이 있고, 셸링이 『예술 철학』(1859)에 남긴 명철한 고찰이 있다. 1802년에 셸링이 쓴 글에 의하면 지금까지 두 개의 소설만 있는데, 세르밭네스의 『돈키호테』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가 그것이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신화적 인물'이 되었고 풍차의 모험 이야기는 '진정한 신화'이자 신화적 전설이 되었다. 『돈키호테』를 '풍자'로 해석한 뛰어난 비평과, 이 작품을 두 부부능로 날카롭게 구별한 작업을 보자. 이들에게 『돈키호테』는 "신성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처럼 운명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글들은 불충분하면서도 명료한 것이다.(268∼269쪽)

 

 

 

돈키호테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힌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책에서 『돈키호테』가 아니라 돈키호테 주의를 다룬다고 말한다. 즉 이 책은 『돈키호테』의 해설이나 분석이 아닌 돈키호테주의를 보여 주려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돈키호테를 창조한 세르반테스주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테가에게 돈키호테는 근대적 고뇌에 사로잡힌 고독한 그리스도의 슬픈 패러디다. 그리고 "과거의 사상적 빈곤, 현재의 천박함 그리고 미래의 신랄한 적대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마다 그들 사이로 돈키호테가 강림한다"고 말한다. 훌리안 마리아스의 해설대로, 이 문장은 작가가 스페인의 환경이라는 시점에서 이 책의 주제를 정당화하는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공유하는 연결 고리이자 스페인이 맞을 운명의 열쇠인 돈키호테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환경을 이해하는 동시에 새로운 스페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오르테가는 스페인이라는 '상황'에서 세르반테스가 어떻게 사물에 접근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으로서 문체를 창조했는지 연구한다. 이는 『돈키호테』가 피상적이라는 편견을 깨고 '소설로서의 심층'을 보여 줌으로써 스페인에 고질적으로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받아 온 개념을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돈키호테 성찰』에서 『돈키호테』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 시대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명료하게 보기 위한 것이다.(349∼350쪽)

 

 - 「해설」, <돈키호테에게 스페인의 길을 묻다> 중에서

 

 

 

오르테가는 돈키호테에 스페인의 운명을 투사한다.

 

오르테가는 예술의 본질적인 주제는 인간이며, 궁극적인 미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장르는 인간성의 흐름을 포착하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시대는 인간에 대한 특정 해석을 낳으며 특정 장르를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오르테가에 의하면, 문학 장르는 그 시대의 감수성을 표현하며 그 시대의 운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은 서사시라는 장르와 상반된다. 서사시의 주제는 연대기적 시간, 즉 현재와 연결되는 시간이 아니라 관념화된 '절대 시간'이다. 그러므로 서사시적 영웅 역시 시간을 초월한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과거에 속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점차 합리적인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기반이 되었던 세계관이 무너지자 서사시는 신화를 버리고 새롭게 방향 설정을 하는데, 여기서 탄생한 것이 모험을 찾아 나서는 중세의 기사도 이야기이다. 오르테가가 "서사시라는 고목 줄기에서 마지막으로 피어난 위대한 싹"이라고 표현한 기사도 이야기 작가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흥미로운 모험담을 만들어 내는 것, 즉 스토리텔링이었다. 하지만 서사시나 기사도 이야기와 달리 소설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소설은 그것이 말해지는 방식에 더 비중을 둔다. 즉 소설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더 중시하고, 과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기술하는 근대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글쓰기 자체를 주제로 삼은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오르테가는 계속해서 서사시, 비극, 희극, 희비극 그리고 소설 장르를 통해 영웅의 의미를 고찰한다. 근대 이후의 영웅은 서사시의 초인적인 영웅이나 비극의 고결한 영웅과는 달리, 주어진 현실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다. 오르테가의 말대로 영웅은 "관습이나 전통, 한마디로 말해 생물학적 본능이 강요하는 행동 방식을 반복하는 것을 거부"한다.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환경을 이겨 내고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이 되려는 염원을 가진 자이다. 따라서 영웅은 환경과 싸우면서 세계를 의미화한다. 그러나 현실은 영웅을 속물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으로 축소하여 희극적 인물로 전락시키려 한다. 서사시적 세계와 달리 누구든 내면에 영웅의 잔재를 품고 있는 인간의 삶은 불투명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새롭게 탄생한 근대의 영웅이다. 그는 피상적이고 표층적인 근대적 인식론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인 풍차를 향해 돌격하고 마에세 페드로의 인형들가 싸운다. 비록 놀림의 대상이 되는 비극적 삶이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물질성과 속물성에 맞서 이상을 찾고, 근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심층의 세계를 살아간다. 그는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험에 뛰어들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진정한 '나'가 된다. 오르테가는 돈키호테에 스페인의 운명을 투사한다.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든 돈키호테처럼, 세이렌이 유혹하는 치명적인 과거의 노랫소리에 맞서, 그리고 지구상에서 영웅들을 멸종시키고 삶을 한낱 사물로 축소시켜 버린 다윈의 결정론에 맞서 스페인이 역사의 전설을 힘차게 부르길 소망하는 것이다. 근대성을 재흡수하는 이 지점에서 새로운 스페인의 설계는 시작될 것이다.(352∼354쪽)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작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훌륭한 철학자이지만 위대한 교사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 글을 이해하기 힘든 엘리트 철학자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아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정권 치하에 귀국하여 침묵을 지켰다는 이유로 그의 사상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폄하되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신체적으로 병환에 시달린 오르테가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더욱 불운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뛰어난 철학자이자 작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프랑코 사후에 제정된 1978년의 스페인 민주 헌법이 오르테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오르테가의 사상은 조국인 스페인에서보다 국제적으로 더 명성을 떨쳤으며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등의 위대한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카뮈는 오르테가에 매료되어 『돈키호테 성찰』과 『대중의 반역』을 필독서로 꼽았고, 그를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작가일 것이다"라고 극찬한다. 멕시코의 힐 비예가스(Gil Villegas)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오르테가와 루카치를 하이데거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한 오르테가와 평생 인간적·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쿠르티우스 역시 오르테가를 높이 평가하면서 독일 문화와 프랑스 문화를 조화시키고 보완하여 확장시킨 독창성에 그의 업적이 있다고 평가한다. 이 밖에 오르테가가 라틴아메리카의 지성계에 끼친 영향도 지대해서 옥타비오 파스, 엔리케스 우레냐(1884∼1946), 카르펜티에르(Alejo Carpentier, 1904∼1980) 등 대륙 최고의 지식인들은 오르테가의 글이 자신들에게 지적인 환경이 되어 왔다는 헌사를 바친다. 이는 오르테가가 20세기 전반기 스페인어권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는 점을 재확인시킨다.(354∼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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