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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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이 세상에는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단조로운 모양으로 시간과 공간의 구분이 섞이고 뒤범벅이 되어 어느 정도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어떤 생활 상태, 풍경적인 상황이 있다(우리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경우를 '풍경'이라고 말해도 된다면). 하여간 휴가 중이라면 그런 마력에 빨려 들어가도 그럭저럭 보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해변의 산책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데, 한스 카스토르프는 이를 떠올릴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착을 느끼곤 했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스 카스토르프는 길을 잃고 눈 속을 헤매 다닐 때 고향의 모래 언덕을 떠올리고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가 이러한 기묘한 망아(忘我)의 기분을 여기서 끌어들인다 해도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추억으로 이에 동감하고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여러분은 걸어가고 또 걸어간다. 여러분은 시간으로부터, 시간은 여러분으로부터 사라져 버려, 여러분은 산책을 하다가 결코 제 시각에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 바다여, 우리는 그대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대를 생각하며 그리워한다. 지금까지 남몰래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그대는 분명히 큰 소리로 불려 나온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 속에 등장해야 한다.' 파도 소리가 솨솨 하는 황량한 바다, 칙칙한 연회색 하늘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비릿한 습기가 사방을 가득 채우며, 짭짤한 소금 맛이 우리의 입술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화롭게, 아무런 심술 없이 이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 우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마비시켜 주는 이러한 위대하고 광활하며 온화한 바람에 귀를 감싸인 채, 해초와 조그만 조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폭신폭신한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어간다. 우리는 모래 위를 한없이 거닐며, 너울거리며 밀려왔다가는 다시 물러가는 흰 포말이 혀를 내밀고 우리의 발을 핥으려는 것을 본다. 파도는 부서져 흰 거품을 일으키면서 밝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는, 평평한 해변에 비단처럼 쫙 깔린다. 이렇듯 여기저기에, 저쪽 모래사장에서, 이렇듯 혼란스럽게 사방에서 들려오며 부드럽게 솨솨 하는 굉음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깊은 안도감에 빠지며, 알다시피 망각에 빠진다. 영원의 품에 안겨, 우리 그만 눈을 감도록 하자! 아니, 보라, 저기 거품이 이는 회색과 녹색의 광활한 바다, 아마득한 수평선까지의 거리가 엄청나게 줄어들어 소실되어 버린 것 같은 저 바다에 돛단배 한 척이 떠 있다. 저곳에? 저곳이란 무슨 말인가? 저곳은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까? 여러분은 알지 못하리라. 여러분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머리가 아찔해질 것이다. 이 배가 해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배 자체가 물체로서 크기가 얼마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작고 가까울까, 아니면 크고 멀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여러분의 눈빛은 흐려지고 만다. 여러분 속의 어떤 기관이나 감각도 그 공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걷고 또 걸어간다. 벌써 얼마나 오래 걸었을까? 얼마나 멀리 걸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걷고 또 걸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고, 저곳은 이곳과 마찬가지며, 아까는 지금과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단조로운 공간 속에서는 시간이 없어져 버리고, 가도 가도 똑같다면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의 움직임은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것이며, 움직임이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닌 곳에서는 시간도 없다. (389∼391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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