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나, 사실 어렸을 때 좀 이상한 놈이었다. -_-;
가끔 별 시답잖은 것들에 과도한 집착과 투자를 했는데, 이를 테면 신약 성경 맨 앞에 나오는 마태복음 1장 '예수의 족보'를 외운다든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들의 순위를 정리해서 외운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왜 그런짓을? 이라고 묻는다면,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할 말이 없다. 별다른 이유없는 편집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때는 그게 재밌었다니깐. (좀 이상한 놈이었다고 했잖나. -_-;)
그 중 하나가 내가 산 책들의 페이지 수를 외우는 것이었다. 계림 출판사에서 나왔던 단편 셜록 홈즈 시리즈가 그 주 대상이었는데, 죽음의 상자(원제 : 빈사의 탐정)는 80페이지, 공포의 금고실(원제 : 퇴직한 물감장수)는 94페이지... 이런 식이다.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어렸을 때 외워둔 것들은 좀처럼 잊혀지지도 않는다. -_-;; (지금 생각해봐도 별로다.) 흔히 이런 양태를 띄는 아이들답게 친구도 없었냐하면 그건 아니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많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 음. -_-;
근데 그 시절에 체득한 별난 습관 중 아직도 남아 있는게 하나 있다.
책을 사면 한 페이지에 몇 줄이 인쇄되어 있는지 체크하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e.g. 해문 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는 원래 초창기엔 모든 시리즈가 페이지당 25줄이었으나, 지금은 분량에 따라 달라졌다. 동서 추리 문고는 페이지당 26줄이다.)
그리고, 이 습관은 내게 책을 사는데 중요한 판별 기준이 된다. 즉, 나는 한 페이지에 보기 불편하지 않는 한 많은 줄 수가 인쇄되어 있는 책을 좋아한다. 줄간격이 빽빽한 것은 보기 좋지 않으니 그런 경우 차라리 글자 크기가 작은 것이 좋다. 당연히 이런 책들은 내용의 분량에 비해 값도 저렴한 편이다. 큰 글씨로 듬성 듬성 인쇄되어 있는, 예쁘게만 만들려고 한 요즘의 팬시 상품 냄새 술술 풍기는 책들은 나에겐 '비토'의 대상인 것이다. 게다가 쓸데없는 하드커버 책들은 왜 그리 많아졌는지. (물론 하드커버가 더 책의 보존성이나 품위를 살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나라의 독서 풍토가 지나치게 실용성 위주인데다가(개인적으론 이것도 탐탁치 않다), 그렇지 않은 종류의 책들은 그저 팬시 상품류로 분류되기를 희망하는 듯 하다. 그래야 잘 팔리나 보다. 가격도 더 비싸게 받을수 있겠지. 표지는 온통 파스텔 톤 은은한 그림에 한 페이지에 20줄도 채 안되는 책들이 부지기수이다. 80년대만 해도 아동 문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책들이 페이지당 30줄을 훌쩍 넘었었는데...
눈이 좀 아프더라도 작고 빽빽한 글자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실(實)한' 책들이 나는 좋다. 표지는 촌스럽고, 재질도 볼품 없지만 빛 바랜 옛날 책들이 내게는 훨씬 사랑스럽다.
내가 유별나고 괴팍스러운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