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光州)에서 성장했다. 다섯살에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할 때 까지 나는 15년의 성장기를 줄곧 광주에서 보냈다. 3년전 부모님 마저 조상의 터전이었던 남도를 떠나 서울 근교에 자리 잡으시자 그나마 명절때라도 낙향하던 일마저 없어져 버리고 어언 서울에서의 삶의 길이가 광주에서의 그것보다 길어져 버렸을 지라도 여전히 나는 "속살은 광주사람" 이다.

빛고을로 칭해지기도 하고 예향(藝鄕)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굴곡많은 현대사를 끌어안은 도시 광주가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시내 어느곳에 있던지 고개를 들면 넉넉하게 도시를 보듬고 있는 '무등산'이 있어서다.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동렬 선수때문에 더욱 유명해 지기도 한 무등산은 해발 1187 미터의 만만치 않은 높이와 거칠지 않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유순한 산세를 가진 산이다. 백제 때는 무진악, 고려때는 서석산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광주에는 지금도 "무진"이나 "서석"을 이름으로 한 고유명사들(학교나 교회 등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이 많이 있다. 그만큼 이 곳 사람들의 일상과 무등산이 맞닿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서울에서 북한산 가기 보다도 도심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는지라 광주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소풍은 늘쌍 무등산행이 되기 일쑤이다. 정말 지겹게도 봄 가을로 무등산을 헤집고 다녔던 그 시절, 지척에 두고 살다 보니 그 산의 고마움을 미처 몰랐지만 서울로 올라온 이후 간혹 찾게 되는 광주에서 무등산은 고향이 주는 안락함의 또 다른 일면이 되었다.

그러나 정상에 미사일 기지가 있다는 이유로 현재까지도 무등산의 정상은 개방되지 않고 있다. 정상 가까이에 있는 우뚝 우뚝 하늘로 치솟은 바위들의 절경인 입석대(立石臺)와 서석대(瑞石臺)가 일반인들에게 다시 개방된 것도 불과 15년 남짓이다. 그때 까지 광주 시민들은 눈 앞에 보이는 산을 두고도 산 중턱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던 아쉬움을 삭여야만 했다. 분단과 냉전은 반도 남단 국민들의 생활에 까지도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십수번을 등반한 무등산 이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등반기 하나.

대학 4학년 추석때로 기억한다. 명절을 맞아 '놀고 대학생'의 신분을 이용해 하루쯤 먼저 귀향한 나는 고향 친구인 K와 P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의기투합, 거창하게 산악회를 발족 시킨다. 당시 어디선가 들었던 리영희 교수, 고은 시인등이 회원으로 활동한다는 산악회 '거시기'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우리들의 산악회 이름을 '있어'로 명명한다. '있어'산악회의 회 결성 기념 등반 이자 결국 마지막 등반이 되어 버린 무등산 등반은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추석 직전의 어느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1000원에 두 줄하는 김밥 3인분을 달랑 사들고 우리는 무등산에 올랐다. 서석대 정상(해발 1100 미터로 무등산 개방 구역 중 최정상이다)에서 구름을 품으며 김밥을 먹자던 우리의 포부는 전날의 피로와 술기운으로 인해 중턱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도 할겸 가을산에서 호연지기를 함양하리라'던 나의 야심찬 계획은 초가을 남도의 따사로운 햇살에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머릿속은 "목말라"와 "배고파"의 원초적 형이하학만이 온통 맴돌뿐이었다.  어찌 비스킷 하나라도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라는 회원들의 자책속에 결국 기아 선상에 허덕이던 우리는 서석대 정상을 100여 미터 목전에 두고 "도저히 배고파서 걸을 수가 없다!!"라는 단말마 외침과 함께 바위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굶주린 청년들은 3인분 김밥 중에 한 개를 아귀처럼 까먹고 나서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또렷하게 한 눈에 내려다 보이던 광주 시내를 품에 안은 채 20대 중반의 젊은 사내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로부터 딱 10년이 흐른 지금. 그 날의 기억을 아련하게 등에 업은채 다시 한 번 그 산에 오르고 싶다.

눈 내린 무등산, 입석대의 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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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9-0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의 성철 스님(?)이 무등산에 오르신단 말이죠?^^ 꼭 멋진 등반 끝내시고 후기 기다려보고 싶습니다.

oldhand 2004-09-0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철 스님이라니요... 저는 용렬한 소인배인걸요. 성철 스님이 눈을 번쩍 뜨시겠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산은 산이고 김밥은 김밥이더라구요. 무등산도 식후경.
그리고 무등산 등반 희망은 아직은 기약없는 희망일 뿐이랍니다. 이제 거의 연고도 없어서 광주에 가는것도 쉽지 않네요. 내려갈 일이 있으면 꼭 올라보고 싶기는 합니다만.

물만두 2004-09-0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은 만두... 한라산 오르다 죽을 뻔했다는...

oldhand 2004-09-08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여행 때 한라산 등반이 일정에 있었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못 갔었답니다. 아직도 백록담 구경 못 해 봤어요.

미완성 2004-09-08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있어' 산악회와 1000원에 두줄 준다는 김밥에 눈이 번쩍(!), 그후부턴
'oldhand님은 아, 1000원에 김밥 두줄을 사셨대- 아아, 맛있는 김밥이었을까?'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 차다가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바위 위에 드러눕고 마셨다는 얘기에 또 폭소를..ㅜ_ㅜ
아아, 동네 뒷산도 정상까지 올랐던 게 벌써 몇 년 전이었는지요. 그래두 대단하십니다-

oldhand 2004-09-0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사과님 오셨군요. 그동안 우리가 격조했지요? 흑흑. 댓글은 안남겨도 사과님 글 잘 읽고 있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미테이션이긴 하지만 산악회 이름은 괜찮게 지은것 같단 말이죠. 핫핫. 1000원에 두줄하는 김밥은 당시 광주에서 되게 유명한 "광주김밥"이라는 시내에 있는 김밥집에서 팔던 김밥인데요, 장사가 잘되서 분점도 있고 그랬었지요. 아직까지 그 가게가 남아있는지, 남아 있다면 가격은 얼마나 할까.. 참 궁금합니다. 광주가면 상추튀김도 먹으러 가야되는데..
 

언덕으로 올라오는 보안관의 차 소리에 우리는 둘 다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보안관의 차 뒤로 감식과의 차가 따라 왔다. 2,3분 내에 지문 검출계와 검시관 조수와 카메라맨들이 방을 점령했고 분위기는 싹 바뀌었다. 살인이 행해진 모든 방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도 개성 없고 생기 없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제복 차림의 경관들은 뭔가의 불가사의한 방법에 의해 이른바 두 번째 살인, 최종적인 살인을 함으로써 화려한 헬렌의 분위기를 없애고, 헬렌 자신을 감식용 육체 덩어리 또는 법정을 위한 증거품으로 바꾸어 버렸다. 시체 위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을 때 나의 신경은 깜짝 놀랐다.

로스 맥도널드 <소름 The Chill > 중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과 살인의 현장에 있었을 강철같은 하드보일드의 사립탐정 루 아처는 때로는 참 여린 모습을 보여준다.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내밀한 그의 마음속을 독자들에게 얼핏 들키는 척 하면서.

필립 말로의 탄생은 분명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고, 그의 그늘이 미치지 않는 후대의 캐릭터가 결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러한 이유로 말로에게 느껴지는 식상함이 루 아처에게는 없다. 시건방지고 건들건들한, 결코 1인칭 시점의 독백에서 마저도 자신의 "후까시"를 의식하는 필립 말로 보다 언제나 과묵하고 진지하며, 짐짓 무덤덤한듯 행동하지만 동정심 많은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적어도 독자에게는 숨기지 못하는 루 아처가 나는 더 좋다. 물론 말로의 감상적인 독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말이다.

서로 비슷한듯 하면서도, 다른면이 많은 필립 말로와 루 아처.
그 둘중 누가 더 좋다고 해서 다른 한 사람과의 만남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하드보일드의 두 영웅들. 

이들을 창조한 레이몬드 챈들러와 로스 맥도널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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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9-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사드려요. (저도 루 아처를 더 좋아합니다. 마이 네임 이즈 루 아처(영타 치기 싫다고 이걸 한글로 치다니..;;;)라는 단편집이 있다는데 꼭 보고 싶어요. )

oldhand 2004-09-0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명세에는 필립 말로에게 밀릴지라도 은근히 루 아처 팬들이 많다니깐요. 판다님도 아처클럽 이셨군요! ^o^

panda78 2004-09-0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처 클럽-! 좋군요! >ㅂ<

oldhand 2004-09-0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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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점의 집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5
엘러리 퀸 지음, 현재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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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베토벤을 통해 고전 음악을 듣기 시작한 사람이 수많은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찾아 듣고 심취하고를 반복하다가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베토벤으로 돌아온다."

작가를 보고 작품을 고르는 경향이 무척 강한 추리 소설 독자들에게도 위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유효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각각의 개인차이가 있을 것이고, 혹자에게는 그 작가가 도일이거나, 혹자에게는 체스터튼, 혹자에게는 크리스티일수도 있겠다. 내게는 그 작가가 바로 다름아닌 "엘러리 퀸" 이다. 도일이나 크리스티, 딕슨 카보다도 늦게 접했지만 내게 추리 소설의 고향은 어디까지나 "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크리스티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가장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 작가가 또한 퀸이다.

여름 휴가 기간동안 몸도 마음도 홀가분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추리 소설의 고향에 다녀왔다. 즐거움을 위한 편안한 독서야말로 행복한 책읽기의 필요 조건이다. 역시나 무리없고 흥미로운 책읽기였다.

<중간지점의 집>은 엘러리 퀸의 작품 목록중에서 논리의 극한을 보여주는 완벽한 퍼즐 미스테리를 추구했던 1기의 작품들과 라이츠 빌 시리즈를 필두로  내밀한 심리 묘사와 본연의 인간성 탐구에 천착했던 3기의 작품들을 사이에 둔 과도기적인 2기의 첫 작품에 해당한다. 국명시리즈의 서문을 장식했던 J.J. 맥이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독자에의 도전도 여전히 들어 있다. 그래서 작가의 후기에도 국명 시리즈의 한 작품이 아닌가하는 자문 자답(어째서 제목을 <스웨덴 성냥의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라는)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 자문 자답을 통해 퀸은 1기의 종료와 새로운 작풍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중간지점의 집>은 용의자의 재판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며 그의 무죄를 믿는 엘러리 퀸의 수사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라이츠 빌 시리즈의 개막작 <재앙의 거리>를 연상케 하는 면도 있지만, 범행 동기와 범행 심리보다는 전작인 국명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범행 기회와 가능성을 더욱 중요하게 판단하는 철저한 퍼즐형 미스터리의 면모도 동시에 띄고 있다.
두 아내를 가진 사내가 두 가정의 중간 지점에서 살해된다. 남겨진 아내들은 뒤늦게 알게된 남편의 이중생활에 충격에 휩싸이고 서로 갈등하지만, 그 중 한명은 도리어 범인의 혐의를 쓰게 된다. 진상의 해결 부분에서 연달아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능수 능란한 수법은 여전하고 진범을 솎아내는 엘러리 퀸의 소거법(솎아낸다는 표현이 그야말로 어울리는)은 역시 짜릿한 논리적 쾌감을 선사하지만, 범행에 대한 왜? 어째서? 라는 독자들의 의문에는 답변이 다소 미흡하다.
2기의 작품들이 1기의 걸작들이나 3기의 걸작들에 비해 다소 평가가 뒤지는 이유도 1기의 걸작들에 비하면 논리적 쾌감이 부족하고 3기의 걸작들에 비하면 등장 인물들에 대한 농밀한 심리 묘사나 범행의 근원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이러한 어중간함에 있지 않을까.

<중간지점의 집>은 소설의 내용에 비추어 볼때도 매우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만 엘러리 퀸의 작품세계를 논함에 있어서도 이 작품이 갖는 과도기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제목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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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다녀오느라 (사실은 다녀온데는 없고 집에서 딩가딩가 했습니다.) 서재를 팽개쳐 두었었습니다. 한번쯤 들어가야지.. 생각만 하고 그냥 계속 뒹굴뒹굴. 제가 원래 게을러서 집에서는 컴퓨터 켜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뭐 워낙에 찾아오는 이 많지 않은 널널한 서재라서 게으름 피워도 문제 없거든요. 핫핫.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늦잠자고, 책 보다가 낮잠자고, 올림픽 중계 방송 밤늦게 까지 보고 그랬습니다.  이제 휴가도 끝나고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T_T

그 동안 밀린 이웃분들의 글을 읽으려면 오늘 근무 틈틈이 땡땡이 깨나 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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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4-08-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란 것이 꼭 어딜 가야 하나요.. 저희 남편도 집에서 쉬는 걸 최고의 휴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읽은 책 소개나 많이 해주셔요~

oldhand 2004-08-20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집에서 쉬는게 최고지요. 더더군다나 비까지 내려줘서 금상첨화였답니다. 읽은 책은... 사실 올림픽 중계방송 보느라 한권 밖에 못 읽었습니다. T_T

파란여우 2004-08-2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끝났으니 근무중에 땡땡이 치는 알라딘 낙으로 살아야지요..^^

oldhand 2004-08-2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놀때는 안하는 서재질을 근무시간에 꼬박꼬박 하는거 보면, 이거 일하기 싫어서 하는것도 같습니다. 으하하.
 
9마일은 너무 멀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96
해리 케멜먼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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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열 마디 또는 열  두 마디로 된 하나의 문장을 지어보게. 그러면 내가 자네가 그 문장을 짓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련의 논리적인 추론을 이끌어내 보이지."

해리 케멜먼의 단편집 <9마일은 너무 멀다>는 가장 멋들어지고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추리 소설 중 하나다. 원제인 'The Nine Mile Walk'도 나쁘지 않지만, 내게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유려하고 기품있어 보인다.

이렇게 제목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표제작인 <9마일은 너무 멀다>는 워낙 추리 소설사에 독특하고 수준 높은 작품으로 손꼽혀 왔기 때문에, 오래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닉 웰트 교수의 활약상을 다룬 나머지의 단편들은 이번에야 읽게 되었다. 내심 아껴 두었던 귀한 음식을 꺼내 먹은 기분이랄까? 단감 빼먹는 듯한 심정으로 8편의 보석같은 단편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단편집 <9마일은 너무 멀다>에 실린 8편의 단편(다른 작가의 두 작품을 제외하면)들은 모두 니콜라스(닉) 웰트라는 어느 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탐정으로 등장한다. 닉 웰트 교수는 완벽한 안락의자형 탐정으로 9-10마디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장, 혹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 등의 단편적인 현상이나 사실만으로 추론을 전개하기 시작해서 사건을 해결해 버리는 인물이다. 닉 웰트가 전해 듣거나 보고 들은 사실들은 빠짐 없이 독자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훌륭한 페어 플레이 미스터리가 된다. 또한 셜록 홈즈의 충실한 후계자인 안락의자형 탐정과 조력자로 등장하는 1인칭의 서술자 등 정통 퍼즐 미스터리의 기본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40년대 후반에 처음 씌여진 표제작을 위시해서 8편의 단편들이 모두 완성될 때 까지 20여년이 걸렸으니, 황금기와는 다소 시간 차이가 있는 후대의 작품에 속하지만 이 작품들이 고전의 향취를 그윽하게 풍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떠한 현상에 대한 논리적 추론이 반드시 하나의 결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탐정의 추론은 보편 타당성을 잃지 않으며, 지나친 비약을 피함으로써 충분히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있다. 물론 작가의 능숙함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논리가 너무 날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충실한 논리적 추론을 앞세운 순수 미스터리 소설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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