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으로 올라오는 보안관의 차 소리에 우리는 둘 다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보안관의 차 뒤로 감식과의 차가 따라 왔다. 2,3분 내에 지문 검출계와 검시관 조수와 카메라맨들이 방을 점령했고 분위기는 싹 바뀌었다. 살인이 행해진 모든 방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도 개성 없고 생기 없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제복 차림의 경관들은 뭔가의 불가사의한 방법에 의해 이른바 두 번째 살인, 최종적인 살인을 함으로써 화려한 헬렌의 분위기를 없애고, 헬렌 자신을 감식용 육체 덩어리 또는 법정을 위한 증거품으로 바꾸어 버렸다. 시체 위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을 때 나의 신경은 깜짝 놀랐다.

로스 맥도널드 <소름 The Chill > 중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과 살인의 현장에 있었을 강철같은 하드보일드의 사립탐정 루 아처는 때로는 참 여린 모습을 보여준다.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내밀한 그의 마음속을 독자들에게 얼핏 들키는 척 하면서.

필립 말로의 탄생은 분명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고, 그의 그늘이 미치지 않는 후대의 캐릭터가 결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그러한 이유로 말로에게 느껴지는 식상함이 루 아처에게는 없다. 시건방지고 건들건들한, 결코 1인칭 시점의 독백에서 마저도 자신의 "후까시"를 의식하는 필립 말로 보다 언제나 과묵하고 진지하며, 짐짓 무덤덤한듯 행동하지만 동정심 많은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적어도 독자에게는 숨기지 못하는 루 아처가 나는 더 좋다. 물론 말로의 감상적인 독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말이다.

서로 비슷한듯 하면서도, 다른면이 많은 필립 말로와 루 아처.
그 둘중 누가 더 좋다고 해서 다른 한 사람과의 만남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하드보일드의 두 영웅들. 

이들을 창조한 레이몬드 챈들러와 로스 맥도널드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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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9-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사드려요. (저도 루 아처를 더 좋아합니다. 마이 네임 이즈 루 아처(영타 치기 싫다고 이걸 한글로 치다니..;;;)라는 단편집이 있다는데 꼭 보고 싶어요. )

oldhand 2004-09-0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명세에는 필립 말로에게 밀릴지라도 은근히 루 아처 팬들이 많다니깐요. 판다님도 아처클럽 이셨군요! ^o^

panda78 2004-09-0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처 클럽-! 좋군요! >ㅂ<

oldhand 2004-09-0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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