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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마일은 너무 멀다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96
해리 케멜먼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여보게, 열 마디 또는 열 두 마디로 된 하나의 문장을 지어보게. 그러면 내가 자네가 그 문장을 짓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련의 논리적인 추론을 이끌어내 보이지."
해리 케멜먼의 단편집 <9마일은 너무 멀다>는 가장 멋들어지고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추리 소설 중 하나다. 원제인 'The Nine Mile Walk'도 나쁘지 않지만, 내게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유려하고 기품있어 보인다.
이렇게 제목만으로도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표제작인 <9마일은 너무 멀다>는 워낙 추리 소설사에 독특하고 수준 높은 작품으로 손꼽혀 왔기 때문에, 오래전에 읽을 기회가 있었지만, 닉 웰트 교수의 활약상을 다룬 나머지의 단편들은 이번에야 읽게 되었다. 내심 아껴 두었던 귀한 음식을 꺼내 먹은 기분이랄까? 단감 빼먹는 듯한 심정으로 8편의 보석같은 단편들을 읽을 수 있었다.
단편집 <9마일은 너무 멀다>에 실린 8편의 단편(다른 작가의 두 작품을 제외하면)들은 모두 니콜라스(닉) 웰트라는 어느 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탐정으로 등장한다. 닉 웰트 교수는 완벽한 안락의자형 탐정으로 9-10마디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장, 혹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 등의 단편적인 현상이나 사실만으로 추론을 전개하기 시작해서 사건을 해결해 버리는 인물이다. 닉 웰트가 전해 듣거나 보고 들은 사실들은 빠짐 없이 독자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훌륭한 페어 플레이 미스터리가 된다. 또한 셜록 홈즈의 충실한 후계자인 안락의자형 탐정과 조력자로 등장하는 1인칭의 서술자 등 정통 퍼즐 미스터리의 기본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40년대 후반에 처음 씌여진 표제작을 위시해서 8편의 단편들이 모두 완성될 때 까지 20여년이 걸렸으니, 황금기와는 다소 시간 차이가 있는 후대의 작품에 속하지만 이 작품들이 고전의 향취를 그윽하게 풍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떠한 현상에 대한 논리적 추론이 반드시 하나의 결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겠지만 탐정의 추론은 보편 타당성을 잃지 않으며, 지나친 비약을 피함으로써 충분히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있다. 물론 작가의 능숙함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논리가 너무 날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충실한 논리적 추론을 앞세운 순수 미스터리 소설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단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