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 2의 고향 광주

다섯살되던 해의 봄, 나는 광주에 왔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도시로 온 젊은이는 아니고, 그저 부모님을 따라서.
형과 누나는 다니던 학교를 옮기는 등 큰 변화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앞길에 개울이 없어졌고 집의 마당이 조금 좁아졌다는 정도의 변화였을 뿐이었다.

새로 살게될 집의 마당은 길다란 편이었으며 마당 구석에 연탄창고가 있고 창고위로 장독대가 있었다. 이 구조는 매우 긴요한 것으로 후일 눈싸움등을 할 때 좋은 요새가 되어 주곤 했다. 그리고 마당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꽃밭겸 화단이 있었는데, 아주 큰 향나무가 있었다. 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에 그 화단은 오래지 않아 갖가지 꽃들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여러 색깔의 철쭉, 수국, 앵두나무, 장미 등이 계절에 따라 우리집을 수놓았다. 꽃 피는 계절에는 마당에서 기념사진 한판 찍는것이 우리의 연중행사가 될 정도로. 이 화단은 굉장히 울창해져서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들어가면 거의 찾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고 후일에는 다람쥐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새 집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과 부엌방 사이, 재래식 부엌의 위에 위치한 다락은 어린 나의 놀이공간으로,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있는 보물창고로 부족함이 없었다.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나던 어둑어둑한 다락방에서 나는 책도 보고, 낮잠도 잤다.

나는 새로운 집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으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친구가 생겼다. 옆집에 살던 남자아이로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우리는 창틀에 올라 매달린 채 타잔 소리를 신호로 해서 담 너머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그 친구는 우리 동네 딱지치기계의 1인자였으며 아직 딱지에 입문하지 않았던 나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수업료는 비쌌다. 나는 강자인 그에게 번번히 패했으며 그때마다 뒷마당에서 혼자 맹렬한 연습을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승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나는 어렸을때 성격이 꽤나 포악했다. 반면 나보다 다섯살이나 위인 형은 무척 관대하여 나는 늘상 형을 이겨보려고 덤비기 일쑤였다.
그날도 그랬다. 무엇때문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화가난 나는 형을 쫓아다니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마당을 뱅글뱅글 돌며 추격전을 펼친끝에 장동대 계단에서 형을 몰아세운 나는 내 키만 한 삽을 들고 형을 위협했다. 장난치듯 방어하던 형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사고가 터졌다. 삽모서리에 내 머리가 찍힌 것이다. 크게 찢기진 않았지만 피가 얼굴로 줄줄 흘렀고 나는 자지러질듯이 울며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형도 무척 놀랐으리라.
요새 같으면 응당 병원으로 달려갔을테지만 때는 70년대 중반 아닌가.
나는 폼나는 환자가 되는 대신 된장을 바르고 쑥을 입히고 머플러로 머리를 감은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것도 성냥팔이 소녀 스타일로 말이다.

시간은 흘러 나는 학교에 입학한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나에게 학교는 처음으로 '제도'라는 것을 가르쳤다. 부모님 말씀만 잘 들으면(듣지 않을때가 훨씬 많지만) 세상을 살아 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감으로써 책임과 의무, 규칙에 대해 배운다. 사실 그것들 중 진정으로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들이 몇개나 있을까?
'아, 이곳이 그토록 내가 동경해오던 학교의 정체인가?'
오늘도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대한 환상을 깨고 지나간 자신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처지를 돌이킬수 없음에 괴로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초등학교 시절 잠시 외삼촌이 우리집에 지내게 되면서 새로운 심부름이 생겼다. 바로 그것은 '담배 심부름'.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담배라는 물건은 내게 꽤나 생소했다. 당시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피우던 담배는 500원짜리 '거북선'과 '태양'(일명 썬). 외삼촌은 50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눈썹이 휘날리게 가서 거북선 한갑 사오너라"
담배가게에 거북선도 떨어지고 태양도 떨어진 날이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거북선은 아니지만 거북선이 그려진 담배를 샀다. 그 담배는 바로 '한산도'. 가격은 330원.
'어라? 거북선이 한개도 아니고 여러개 그려져있는데 값은 더싸네? 크하하. 칭찬받을지도 몰라'
결과는?  '은하수'로 바꾸기 위해 나는 다시 열나게 뛰어가야만 했다.
돈이 마침 떨어진 외삼촌이 100원짜리 담배을 사오라고 시켰고, 100원짜리 담배가 어딨냐고 반항하다 두들겨 맞고 울면서 가게에 갔던 일도 있다.
"잉잉.. 아저씨, 100원짜리 담배 하나만 주세요"
"여기 있다"
'엉? 정말 100원짜리 담배가 있잖아? 으... 이럴줄 알았으면 매 맞기 전에 사오는건데..'
내심 억울했던 나는 지금도 주황색 포장의 100원짜리 담배 '환희'를 기억한다.
세월이 적지않게 흐른 지금, 50줄에 접어든 외삼촌은 오래전에 담배를 끊으셨고 10년 넘게 애연가였던 나도 금연을 위해 노력중이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광주는 서울보다 눈이 많이 온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순천 등지에서 자라던 나는 광주에서 처음 눈오는 광경을 보고 신기해했다. 기온이 높아 녹는 속도도 빠르지만 그것은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위에서 일뿐, 80년대 초반까지 동네 어귀의 골목은 비포장 흙길이었던 우리 동네는 눈이 한번 오면 응달은 봄이 올때까지 눈이 쌓여있곤 했다. 그리고 그 시절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눈이 내렸다. 당시 내 무릎이나 정강이까지 눈이 쌓이는 일이 빈번했으니 말이다.
눈 내리는 겨울날 누나와 밖에 나가 동네의 눈쌓인 비탈길에서 썰매를 타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던 기억이 난다. 너무 늦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릴 찾아 나서기도 하셨다. 겨울의 빙판타기는 부모님의 꾸중을 각오할 만큼 신나고 재밌는 놀이였다. 눈쌓인 비탈에서 비료부대를 타고 질주하는 그 재미란!


.....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총성에 대통령이 죽고 그 이후 이어지던 숨가쁘던 정치상황. 12.12 사태, 서울의 봄. 계엄령...
그리고 80년 5월에 나는 광주에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의 유년시절의 막바지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철없던 내가 당시의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을리는 없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혼동되던 그 시기는 나에게 합법의 탈을 쓴 국가권력이 절대적으로 선한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철없이 멋모르고 까불던 나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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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08-1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다음편에는 청소년기의 방황이 그려지겠군요. 기대 됩니다. 이것은 서사시입니다.^^

oldhand 2004-08-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이거.. 이게 마지막인데요.. 6년쯤 전에 썼던 글을 약간 손봐서 올린겁니다. 서사시씩이나요. 지금이라도 청소년기 이야기를 쓰자니 제가 너무 평범해놔서 별로 쓸 이야기도 없구요. 흑흑흑.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해요.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