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날씨가 추워지니 자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된다. 이불 속에 누워서 보기 좋을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1. <초기 희랍의 문화와 철학>, 헤르만 프랭켈 지음, 김남우/홍사현 옮김, 아카넷 

서양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고대 그리스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넘어서지 못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화와 문학과 철학이 뒤범벅되어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기도 하고, 또한 현대 서구의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그들에겐 당연하다는 듯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책은 참고용으로라도 소장하여 틈틈이 펼쳐볼만 하다. 

 

 

 

 

2. <토포필리아>, 이-푸 투안 지음, 이옥진 옮김, 에코리브르 

요즘 관심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시리즈물 중 하나가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내고 있는 '로컬리티 번역총서'이다. 기획의도를 보면 "그동안 국가 중심의 사고 속에 로컬을 주변부로 규정하며 소홀히 여긴 데 대한 반성적 성찰"의 일환으로 이 시리즈를 변역 출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인간 삶의 필수적 기반에 대한 새롭고 깊이 있는 사유를 제공해 줄 흥미로운 기획이다. 특히 이 책은 환경과 인간의 지각, 더 나아가 세계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간다. 

 

 

 

 

3. <인공낙원>, 정윤수 지음, 궁리 

앞서 소개한 '로컬리티 번역총서'의 한국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우리만의 도시 공간과 그 안에 닮긴 삶의 궤적을 담았다"는 소개글에서 그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토포필리아>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 싶다. 

 

 

 

 

4. <모든 것은 진화한다>, 앤드루 C. 페이비언 엮음, 김혜원 옮김, 에코리브르 

보일의 법칙, 세포, 총과 세균, 런던, 사회, 소설, 과학, 우주라는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진화는 이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 되고 있다. 이 말은 좋든 싫든, 혹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진화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분야의 현대적 논의를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진화론이라는 이론이 이 다양한 분야에 어떻게 확장되어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5.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지주형 지음, 책세상  

후대의 역사가가 한국의 21세기를 서술하게 된다면, 아마도 21세기 초반은 1997년 IMF 체제의 영향력이 모든 것을 지배한 시기라고 설명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급격히 변화하는 한국이지만, 대규모 구조조정에서 시작되어 국가지도자로 CEO를 뽑기까지, 그리하여 결국 한미 FTA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게 되기까지, 겨우 10여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속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번개같은 과정에 대한 차근차근한 설명을 기대하며 이 책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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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조 베넷 지음, 김수안 옮김 / 알마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우리에게 ‘Made in China’ 혹은 중국제라는 말은 싸구려, 저가품, 품질이 떨어지는, 쉽게 망가지는, 유해한, 믿을 수 없는, 짝퉁, 쓸모없는 등등의 온갖 부정적 형용사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당장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위를 살펴보자. 거의 24시간 나와 함께하는 아이폰4,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는 필립스 무선주전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내내 즐겁게 음악을 들려주는 JBL 소형 스피커, 그리고 이 글을 치고 있는 로지텍 키보드와 마우스. 이 모든 상품에 ‘Made in China’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들쳐보기 귀찮아서 찾아보진 않았지만 지금 내가 쳐다보고 있는 HP 모니터 어딘가에도 분명 똑같은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역설 혹은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그토록 하찮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삶. 이 책의 저자 조 베넷은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을 이해해보고 싶어 한다

궁금증은 대형할인매장에서 구입한 팬티에서 시작된다. 팬티가 담긴 쇼핑백을 조수석에 싣고 집으로 가다가 문득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제조된 팬티가 수많은 중간상인들을 거쳐 머나먼 뉴질랜드까지 와서 단돈 5.99뉴질랜드달러에 팔리는데도 이익이 남다니! 게다가 팬티 다섯 장들이 묶음이 겨우 8.59뉴질랜드달러에 팔리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쌔고 쌘 ‘Made in China’를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만한 생각, 그러나 아무도 그 궁금증을 해결해보려 시도하지 않았던 생각을 저자는 직접 실행에 옮긴다. 팬티가 만들어져 소비자의 품에 도달하는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팬티 찾아 삼만리라는 황당한 여행기가 시작된다.  

물론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판매처에서 무역업자를 거쳐 팬티 제조공장과 원자재 수급처까지, 다시 말해 중국산 팬티가 생산되어 소비되는 전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핑계거리일 뿐이다. 이 책은 팬티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 대한 단순한 르포르타주가 아니다. 우리가 베넷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되는 건 전 세계 5분의 1이라는 거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저가 노동력을 공급하며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다. 화려한 네온과 고층빌딩으로 무장된 도시와 그로부터 단 몇 분만 벗어나면 텃밭과 거름과 소떼가 어슬렁거리는 시골의 풍경, 끊임없이 도시와 산업단지로 빠져나가는 젊은 인력들과 농촌을 지키는 노인들 등, 마치 우리의 70년대가 그러했듯이 한참 성장 중인 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산업화의 이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경제 현실에 대한 단순한 보고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유인원에 대한 온갖 사소한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람의 얼굴과 몸짓과 자세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덕분에 언어 문명의 찰나적인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공통점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인간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서양인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편견 혹은 선입견에 갇히지 않기 위해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중국의 사상과 각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낯선 여행자가 겪을 수 있는 신기하고 때론 불쾌할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여행 작가로서의 저자의 매력이 물씬 풍기기도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유머러스하게 버무려 풀어내는 저자의 뛰어난 감각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진 매력은 한 서양 여행자의 중국 여행기이면서 이런 종류의 책이 으레 빠지기 쉬운 경멸 혹은 예찬과 같은 극단적인 평가로 일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위압적이고 통제적인 정책이나 위구르 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종차별과 같은 부당한 행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인의 맥락에서 그들이 이해하며 서양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과거 서양이 중국에 가한 역사적 잘못 등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신기한 나라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그곳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걸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 황당무계하고 유쾌한 여행기는 경제 성장이라는 신화 속에서 잊혀져가는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출판사의 요구로 우루무치의 목화 농장에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저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카메라만 갖다 대면 경련을 일으키는 버릇이 있다. () 지금은 죄책감 때문에 내 모습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누군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호화로운 자동차를 타고 10분 동안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떠난다. 거짓을 말하는 사진, 흥미를 유발하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사진 말이다. 나는 내가 피상적이고 기생충 같은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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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구태의연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인 에릭 호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책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 소개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일곱 살 때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후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는 설명이다. 한참 세상의 신기함을 맛볼 어린 나이에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암흑기를 겪고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이 독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 글자를 읽기 시작했을 때 시력을 잃게 되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글자에 대한 욕구가 커졌던 것일까. 어쨌건 수많은 새로운 이미지들을 뒤로하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가 타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목했을 사실인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저자의 이력이다. 에릭 호퍼는 열여덟 살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이후 “금 시굴자,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이 책 <맹신자들>을 발표하여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변변한 학력도 직업도 없는 49세의 중년 노동자가 자신의 글을 출판하고 싶다고 출판사를 찾아왔을 때, 그의 원고를 진지하게 검토할 편집자는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흥미 위주의 폭로물도 아닌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회철학서를 읽어 줄 독자는 또 얼마나 될까. 여기서 이 책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시작된다. 

“이 책은 종교운동이 되었건 사회혁명이 되었건 민족운동이 되었건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징을 다룬다.” 그는 아무리 구체적 형태가 다양할지라도 모든 대중운동에는 본질적으로 가족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모든 대중운동은 지지자들에게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와 단결된 행동 성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대중운동이 “좌절한 사람들”과 이들을 추동하는 “효과적인 전향 기술”, 즉 선동 기술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대상은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 등이다.  

이 목록이 한 가지 힌트가 될 수 있을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광신적’이란 형용사가 붙는 것은 모두 소위 ‘미국적 가치’라 불리는 것과 대립하는 사상들이다. 더구나 책이 출판된 해가 1951년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다시 말해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새로이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시기였음을 상기한다면, 호퍼가 다루고 있는 대중운동이란 것이 결국 당시의 미국과 적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될 수 있음을, 그럼으로써 미국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는 하나의 선전이 될 수 있음을 편집자가 눈치 챘던 것은 아닐까. 호퍼는 자신의 책이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으며 일절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있긴 하지만, 흑인민권운동과 같이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막 태동하고 있던 대중운동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치나 공산주의와 같은 적대자들을 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대중적 성공에 대한 음모론적 의심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찌됐건 이와 같은 자신의 집필 의도를 보여주는 서문 이후 4장 125항으로 이루어진 대중운동에 대한 호퍼의 단상이 펼쳐진다. 사회철학적 저서라고 하지만 대중운동에 대한 엄밀하고 꼼꼼한 자료조사나 치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러한 책이 출간되었다면 아마도 저자가 사용하는 ‘대중운동’이라는 개념의 애매모호함이라든지 자신의 주장에 맞는 역사적 사례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어 제시하고 있다든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듯싶다. 저자 스스로는 각 항 간의 유기적 연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도 하지만, 니체나 벤야민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선언적인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아포리즘 형식을 띤 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6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순간 빛나는 통찰을 보여주는 구절 또한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표적 대중운동인 반MB운동과 그 최전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는 꼼수다>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MB정부가 들어선 후 3년 동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긴다. 이전의 두 정부가 10년 동안 쌓아왔던 많은 물질적 정신적 가치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인 시기였으며 참여 정부가 비정규직 법안의 통과와 한미 FTA 체결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적극 도입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의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으며, 누군가는 여전히 정리해고의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드는가.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가 최근 3년 동안 그것을 읽어버린 이들이다. 여기서 ‘가난’을 단지 물질적 차원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꼼수다>의 4인방이 MB정부 이후 자신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또한 여기에 열광하는 이들이 대부분 아이폰이나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수다에 귀 기울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퍼가 지적하는 ‘신빈곤층’과 이들이 묘하게 중첩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게다가 이들로부터 촉발되어 이제 사회적 구호로 자리 잡고 있는 ‘쫄지마 씨바’라는 말에서 호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도한 유추일까.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반MB운동을 국민의 지상 명령이라 여기며 ‘닥치고 통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들이라도 하나로 결합시킨다.”는 구절이 등치되는 것도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처럼 호퍼의 글은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사회에서도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논증적 형태의 글이 아니라 아포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속담은 수천 년이 지나도 적용가능한 사례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퍼의 분석을 단순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고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떤 속담이 수천 년이 지나도 계속 언급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이 수천 년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퍼의 통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호퍼의 아포리즘 전면에 흐르는 주된 정서는 대중에 대한 ‘냉소’다.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대중운동이 광신과 같은 형태로 귀결되는 것은 결국 대중들이 가진 본질적 속성 때문이라는 비관적 인식이 그에게 깔려있다. 이러한 전제가 옳은지 그른지는 보다 깊이 있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과 같이 ‘집단 지성’이라는 혹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이 어떤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시기에 일종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원순 시장의 당선 후, 많은 지지자들이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감시보다는 적대자들에 대한 증오에만 집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호퍼의 말처럼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일게 마련”이기에, 대중이 만들어 내는 장관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맹신자들>이 2012년 정치의 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덧붙여 <맹신자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며칠 전 한미 FTA에 찬성표를 던진 151명의 국회의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이 현대 사회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호퍼가 말한 “좌절한 사람들”의 광신이 아닌 ‘가진 자들’ 혹은 ‘상위 1%’에 의해 추동되는 광신이라는 점에서, 또한 맑스가 말한 단순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 맹신적 추종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맹신자들>이 담아내고 있지 못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맹신자들의 증오와 적대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는 지금, 그 내용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맹신자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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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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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의 첫 리뷰 도서로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이 선정되었을 때 조금은 실망했다. 평소 흥미 없던 저자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일이 별로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무슨 책이든 읽는 것이 안 읽는 것보다는 좋을 것이고, 또 누군가의 권유로 관심 없던 책을 읽다가 선입견이 깨지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없이 널려 있는 관심 도서를 두고 다른 책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일은 아무래도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선뜻 즐겁지 않았던 듯싶다.

왜 강신주라는 저자에 관심이 없었을까. 강신주는 최근 2~3년 동안 예닐곱 권의 많은 책을 쏟아내고 있는 철학자다. 다작이 그 자체로 흠결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인 선입견으로 인해 철학자의 다작은 일단 의구심을 가지고 쳐다보게 된다. 철학적 사유의 깊이나 통찰력이란 것이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업데이트 될 수 있다고 믿지 않기에, 철학자의 다작이란 결국 자신이 깨달은 하나의 통찰을 이러저러 변형된 버전으로 반복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신주의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철학자들은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가리지 않고 온갖 철학자들이 망라되고 있는데, 이 경우 각 철학자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되기보다는 마치 ‘수능완전정복 100제’와 같이 철학사에 대한 요약정리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차라리 같은 가격의 철학사 책을 사서 차근차근 읽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기 전 이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책을 읽어야만 하기에 이 책의 쌍둥이 형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까지 구입해서 차분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두 권을 모두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나의 선입견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두 권을 합쳐 각각 서른다섯 명의 시인과 철학자가 소개되고 있다. 각 장은 모두 동일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한 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에선 시인에 대한 소개가, 두 번째 부분에선 철학자에 대한 소개가,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선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즉 시인의 시를 읽고 촉발된 사유가 어떤 철학자의 개념으로 이어지고, 그 철학자의 개념을 보다 면밀히 살펴 본 뒤, 이를 다시 시의 이해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철학이란 것이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 것이냐’라고 묻는 이들에게 그 구체적인 사용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가 되었건 TV프로그램이 되었건 아니면 일상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건이 되었건,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성찰의 과정으로서의 철학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차분하고 꼼꼼하게 풀어져나가기보다는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고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대중강연용 원고로 작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준비 시간 혹은 한 시간정도라는 한정된 강연 시간 내에 모든 것을 끝마쳐야 하기에 논리적 비약이나 어설픈 연관성을 눈치 채고도 어쩔 수 없이 마무리 지어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책으로 다시 펴낼 때에는 강연에서 못 했던 얘기들이나 빈약한 부분들을 충실하게 채워 넣는 수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강연이야 질문 시간을 통해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지만, 책은 그럴 수 없기에 보다 친절하고 차분한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매 장 당(혹은 매 강연 당) 한 명의 시인과 한 명의 철학자라는 구성을 지키려다보니 시나 철학 개념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논리적 연관성보다는 ‘얼핏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식의 인상 비평에 그치게 되거나 아니면 철학자의 사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시에 끼워 맞추는(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식이 되고 마는 경우도 생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채호기와 맥루한에 대한 내용을 보자. 채호기 시인의 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에 전전긍긍하는 인물을 다루고 있고, 저자는 여기서 매체가 우리의 사랑에, 즉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맥루한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그럴듯한 연상이다. 그러고는 곧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에 대한 맥루한의 구절을 인용한다. 맥루한이 말한 핫미디어란 주어지는 정보량이 고밀도여서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은 미디어를 말한다. 당연히 쿨미디어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이용자의 참여도를 단순한 ‘상상력’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당연히 사진을 본 사람이 사진에 자신의 상상력을 부여할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사진가가 찍은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요. 그러니 ‘뜨거운 미디어’인 겁니다. … 반면, 만화는 사진에 비해 정보량이 적은 ‘저밀도’의 미디어입니다. 정보량이 적으니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만화를 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개입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만화는 뜨겁지 않은 미디어, 즉 ‘차가운 미디어’라는 겁니다.”(137)

이처럼 참여도를 단순한 ‘상상력’으로 이해하다보니 전화가 쿨미디어인 이유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맥루한이 앞에서 말했듯이 “전화는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 미디어”입니다. 다시 말해 전화 통화만으로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느끼는 감정의 정확한 속내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정보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전화로 들려오는 애인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는 오만가지 상상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 경우 상상력은 청각적이기보다는 시각적일 겁니다.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목욕을 마친 섹시한 모습일까? 아니면 지금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서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수많은 상상이 가능한 것은 전화라는 미디어가 단지 소리만을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시각을 포함한 나머지 감각들은 상상력과 결합해 작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142)

다시 말해 전화가 쿨미디어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청각적 정보라는 빈약한 정보만을 전해주기 때문에 시각적 상상력이 작동할 수밖에 없고 이용자의 참여도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 이해한다면 저자가 인용한 구절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 모르겠지만, 인용구는 “당연히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는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덧붙인다. 저자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라디오도 청각적 정보만 주어지는 매체이고, 우리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오만가지 시각적 상상을 펼 수 있기 때문에 쿨미디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맥루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떤 것을 읽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쇄된 말에 소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라디오를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영상화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을 때에는 왜 시각화할 수 없는가? 독자는 곧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천만에, 나는 전화를 걸면서 보고 있다!> 그러나 신중하게 검증해 볼 기회가 있다면, 전화 통화를 하면서 시각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전화는, 글로 씌어지고 인쇄된 책자와는 달리 완전한 참여를 요한다. … 많은 사람들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낙서>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전화 미디어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전화는 우리는 모든 감각과 기능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냥 틀어놓고 다른 일을 볼 수 있는 라디오와 달리, 전화 통화를 하면서는 그럴 수 없다. 전화가 제공하는 청각 이미지는 아주 빈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그것을 메우고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미디어의 이해>, 민음사, 371~372)

즉, 전화가 쿨미디어인 이유는, 청각적 정보라는 한정된 정보를 메우기 위해 시각적 상상력을 키우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전화를 하면서 귀와 입, 그리고 손과 같은 여러 가지 감각과 신체 기능을 극대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시 목욕을 마친 섹시한 모습일까?’와 같은 전화를 통한 시각적 상상력에 주목한 이유는 아마도 채호기의 시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빠진 자의 애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맥루한을 설명하는 적절한 예가 되기 어렵다.

더 나아가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고 했을 때의 의미, 즉 각각의 미디어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서로 다른 영향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보았을 때도, 채호기의 시는 적절한 사례가 되기 어렵다. 채호기의 시에서 전화를 편지나 카톡, (컴퓨터) 메신저 등으로 바꾸어도 그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에서 단지 전화라는 매체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이를 맥루한과 연결시키는 것은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선 아는 게 적기에 꼼꼼히 따져볼 능력이 안 되지만, 읽다가 문득 의문이 드는 부문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미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소 시에 관심 있던 이들은 시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얻을 수 있을 테고, 평소 철학에 관심 있던 이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을 시나 소설 혹은 다른 무엇을 가지고든 쉽게 풀어나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평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나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단초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몇몇 흥미로운 철학자들의 목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을까. 단순한 소개와 흥미유발이 목적이었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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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역시 독서의 계절인가. 읽고 싶은, 소장하고 싶은 책들이 많이 나왔다. 올 초 집계한 대한민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6.6권이라고 한다. 즉 한 달에 한 권 반 정도 뿐임에도 불구하고 출판사들은 매달 열심히 책을 내고 있다. 출판사들의 노력에 경의를. 

 

 1. <성찰>, 김우창 지음, 한길사 

 한동안 인터넷 경향신문의 '김우창 칼럼'을 즐겨찾기에 등록해놓고 열심히 읽었던 적이 있었다. 많은 훌륭한 칼럼니스트들이 있지만, 김우창 교수만큼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칼럼니스트는 드물었다고 기억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그의 글들을 모니터 화면에서 스크롤을 내려가며 읽는 것이 불편했는데, 이렇게 책으로 묶여 나오니 반갑다. 

 

 

 

 

 

 2. <인문학의 미래>, 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동녘 

 단지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만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실용의 시대에, 그래서 대학에서조차 돈 안 되는 학과는 하나둘씩 폐과를 시키는 이런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책의 목적은 인문학 교육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를 진행하다보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다름 아닌 인류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라는 서문의 구절에 관심이 간다. 거창하게 '인류의 미래'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해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3. <디지털 시대와 미디어 공공성>, 그레이엄 머독 지음, 이진로 외 옮김, 나남출판  

 스마트폰 사용자가 천만을 넘어섰고,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보여졌듯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디지털 미디어에 기반한 SNS가 세상을 바꿀 매체로 주목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열광은 90년대 초반 인터넷이 막 등장했을 때의 분위기와 비슷하고, 그래서 일정 부분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양한 언로가 부재한 우리나라의 척박한 상황에서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실험과 관심이 계속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 듯 싶다. 최근 일고 있는 '나는꼼수다'의 열풍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되는 것은 아닐런지. 어쨌건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미디어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다. 

 

 

 

 

 4.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지음, 책세상 

 좋든 싫든, 2012년은 '복지'라는 화두가 한국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내년엔 총선과 대선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가 연달아 예정되어 있고, 진심이건 아니건 현재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에 알맞은 복지정책을 내놓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과연 어떤 복지여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무상급식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선별적 복지인가 보편적 복지인가, 혹은 자유주의적 복지인가 사민주의적 복지인가 등등 복지에 대한 다양한 입장차가 존재하고 있고, 이러한 입장차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정치적 선택을 좌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지가 주요한 화두가 된 것은, 먹고 살만해져서 이제 복지에도 신경 쓸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너무 팍팍해서 복지가 없으면 안 될 것이라는 인식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앞으로 다가오게 될 복지 사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5. <과학철학>, 강신익 외 18인 지음, 창비 

 책소개의 말처럼 "지금까지 과학철학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를 고찰하고 그 논의들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과학철학이라는 제목을 가진 대부분의 책들이 과학철학의 역사를 소개하는 데에 집중되었다면, 이 책은 목차에서 알 수 있듯 각 세부 분야의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기에 참고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 같다. 다만 몇몇 제목들을 봤을 때 다른 책에서나 논문으로 이미 발표한 글들을 재수록하거나 수정 보완해서 실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한 권으로 정리되어 있으니 편리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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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완료했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