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별다른 일 없으면 '내 이름은 김삼순'을 재방송으로 보고 있다. 삼순인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꿋꿋하게 주제 파악 잘하며 자기 일도, 사랑도 열심이다. 오늘 방송에선 삼순이가 삼식이를 처음으로 좋아하는 장면이 나왔다.
 삼식이로 분한 현빈이 뽀뽀를 하려는 모양새로 몸을 삼순이에게 기대자 그녀는 눈을 감는다. 삼식인 흥미 잃은 표정으로 떡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퉁을 놓는다. 삼순이, 어이상실로 화르르 화를 내지만 이미 맘은 이성으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
 밤새 잠을 설치고 많이 굶어서 이러는거라며 머릴 쥐어박고 자기 할말만 하고 가는 현빈에게 '쟤는 왜 지 말만 하고가'라고 태연하게 중얼거리다 그럼 무슨 말을 더해 하며 한번 더 자신의 주책맞은 머리를 쥐어박는다.
 삼순인 서서히 자신의 사랑을 알아가고 용기있게 그에게 고백하고 여차여차해서 둘은 잘 지낸다더란 해피엔딩은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면 아련하게 기억할테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

 평탄하다면 좋으련만 평탄하지 않은 인생은 사랑도 지랄맞게 찾아온다. 당연하게도 우선은 자신을 설득시켜서 이건 유사 사랑이지 사랑이 아니라고. 외로워서 발악을 하는거라고 많이 굶은거라고 추스렸다가 포기했다가 우왕좌왕했다가 주저앉았다 화병으로 쓰러질 즈음 용기내서 고백이란걸 하겠지. 물론 예상대로 전혀 뜻밖이란 상대방의 반응이 있을테고.

 그럼 그냥 친구로 남을걸 왠 주책이냐 에이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근데 이게 정말 좋아하는거 사랑하는거 맞아란 고백하기 전보다 훨씬 찐득거리는 질문이 따라오고.

 어려서 짝사랑을 할땐 정말 행복했다. 피부 재생력이 뛰어난 나이답게 상처도 금방 나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누군가가 경계한 말대로 난 사랑중독자였는지도.

 지금은 나이 많이 먹었으니까 섣불리 누굴 좋아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왔다. 누군가의 호의가 오래 묵어서 정이 되긴 했어도 한눈에 뻑간다거나 은근하게 좋아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유사 사랑에 그토록 시달렸으면서도 정말 신중하게 내 맘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요즈음 내 맘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너를 향해 내 맘이 흔들리는 순간
사랑이 시작되길...

 이외수의 이 몇마디 말에 맘이 울려 움찍대고 있다. 생각난다. 보고싶다. 자신이 없다. 생각난다. 보고싶다. 자신이 없다. 왜 이러는거야. 왜 이러는지 좀 견디다 보면 좀 숨을 고르다보면 답이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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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잘 모르겠던 그분께 고백했다가 민망 바가지만 받아왔어요. 이거 쉽게 바뀌는게 아닌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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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친구녀석이 만나고 있던 여자 얘기를 해준적이 있다.
 성격도 괜찮고 얼굴도 이쁘장한 편이었지만 객관적인 미점 말곤 매력을 발견할 수 없었단 얘기와 함께.
 헌데 요 여자 아인 친구가 맘에 들었는지 결혼 운운하며 진지한 모드로 나가길 바라고 있었고 친구는 에둘러 그 애에게 설명이란걸 해줬다.
"오빠는 말이지.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야. 보헤미안이라고나 할까."
 쌍팔년도식의 느끼함은 제쳐두고, 그 뒤로부터 그 녀석의 별명은 미친 보헤미안이 돼버렸다.

 또 다른 녀석의 경우.
 녀석이 두달 정도 사귄 귀여운 여자 친구와 -요즘 애들치고 예쁘고 귀엽지 않은 애 없다지만.- dvd방에 갔더랬다. 사귄지 얼마 안 됐으니 얼마나 들끓어올랐겠어. 장소가 무슨 대수랴. 영화는 이미 사운드와 조명의 구실 밖에 못하고 둘은 일을 치르기 직전까지 다다르고 있었는데 여자 아이,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란다. 뭔가 했더니 베네통 콘돔이었고 녀석은 나어린 애인의 남다른 준비성에 감탄을 했단다.
 베네통에서 콘돔도 나오냐며 해야할 일도 망각한채 콘돔 구경에 빠진 녀석은 분명 10개라고 또렷히 적혀있는데 콘돔이 몇개 밖에 없다는걸 알아챘다. 보통 예민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그런걸 확인하다니.
"누구야, 콘돔에도 불량품 있나봐. 몇개가 없어."
사심없는 그의 질문에 사슴같은 눈을 말똥히 굴리며 그녀가 한다는 말은
" 오빤 다른 사람이랑 하고 싶은적 없어?"
와와와와~~~
 꼭 그일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녀석은 그 여자 아이와 헤어졌다고 한다. 무쓸모 개념을 지닌 녀석이었지만 도저히 그 뉘앙스까진 따라잡기 힘들었단 고충을 토로하며.

 20대 초반 두 아이의 정서가 사뭇 다른 것처럼 결국 사람의 스타일은 나이와는 별개의 문제같다. 속 다 보이는 20대의 열정이나 의뭉스런 30대의 사심이나 태반은 그릇만 다를 뿐 본질적인건 이미 그 사람 안에 다 있는거니까.
 20대 초반에 어리버리했던 내가 어느 날 지나가는 도사의 가르침을 받자와 개벽되지 않았던 이상 지금도 역시 면면히 그 코드를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내가 미친 보헤미안이라도 좋으니 겁없이 사랑하고 용기있게 고백하고 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감식안을 갖으려고 노력하고 몇개 비는 콘돔곽을 슬쩍 남자에게 건냈던 과거가 있었다면 지금의 나보다 삶을 살아가는데 더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본다. 글쎄 역사에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개벽이란 허상만큼이나 때 지난 푸념일뿐이겠지만.

 물질하는 처녀가 깊은 물 속까지 가라앉았다가 제 숨을 도저히 참지 못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흔하디 흔한 공기의 질감조차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숨이 다할때까지 꾹 참는게 아니라 쉴새없이 물 안과 밖을 들락거리는 정체성을 가진 난, 전복도 물 밖의 세상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나이만 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건 늙는단 것보다 더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끔씩 다가오는 씁쓸한 생각.

 20대 초반의 풋풋함으로 무모할순 없을지라도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시작해도 늦진 않다. 모순에 치여 살지만 내 가장 큰 강점은 바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말끔한 희망을 꿈꾼다는거니까.
 우선은 기다림과 인내가 시작이고 그 다음은 아주 아주 나중에 생각해보련다.

 <보그>의 편집장이었던 아나 원터는 천박한 스타일이 스타일이 아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 그러저러한 일상을 지탱하는 나를 새롭게 리메뉴얼할 수 있는 계기가 올거라고 믿고 그런 예감에 설레는건,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놓고 음반 화보를 찍은 제인 버킨에 준하는 자아 정체감을 찾아가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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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타일
    from 기우뚱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2012-05-27 10:51 
    어디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화장을 안 하기 시작했고 색조는 물론 기초 화장까지 안 해도 보기에 푸석한 것 말고는(화장을 하는데는 이런 이유가 크겠지) 그다지 피부가 당기지 않고 별 탈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화장품을 바르지 않기 시작했다. 물론 내게도 블링블링한 ‘온스타일의 get it beauty’ 시절이 있었다. 차홍이 나와서 깜찍한 얼굴로 오목조목 말해주면 나도 무슨무슨 웨이브쯤 단번에 할 것 같았고 실제로 해내기도 해서 한동안
 
 
라주미힌 2008-06-1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스타일 쥑이시는데요?

Arch 2008-06-18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다른 누구보다 님한테 그 소리 들으니까 그야말로 기분이 째~져요^^ ** 마노아님/ 아, 감사해요^^ 그야말로 쥐어짜기 문장법이라고 어느 책에 나와있더랬죠.

전호인 2008-06-1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을 뵙지 않았다면 글만으로 짐작을 했으련만 뵙고난 후 글을 통해 스타일을 유추하기가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습니다.ㅋㅋ

Arch 2008-06-19 09:53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그런가요? 굳이 스타일 유추하진 마세요. 무형의 스타일형 인간입니다.^^
 

 따로 작정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알게 모르게 개개의 사정을 드러내는 알고자하는 욕구로 질문을 한다.

 밥 먹었니. 뭐 좋아하니.
이건 일상적 질문의 유형. 이럴땐 응 아니오 내지는 아무거나라고 답해도 무방하다. 

 학교는 어딜 나왔니. 부모님은 무얼 하시니. 넌 뭐하고 있어?
이것 역시 흔히들 하는 질문이지만 나같은 경우엔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편견을 조장한다거나 너무 뻔하고 내 진면목을(그런게 있기는 한거야?) 알기도 전에 내 배경을 진단하는거 아냐라고 비분강개하며 말하고 싶지만 기실 어렴풋이 당신도 공감하고 있듯이 그닥 내세울게 없는데다 내세울게 없는 답변이다보니 행여 오바하거나 무심하게 말하기조차 상당히 꺼려진다는 것. 오바하면 저거 자격지심이라고 볼 수 있고 무심하게 말하면 단련됐다고 말할테니. 피해자 놀음의 다름 아니다.


 그 다음 질문으론 어떤 체위 좋아하니. 자위는 어떻게 하니란 식의 성적인 코드로 중무장한 질문들.
 솔직한걸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나이지만 이런 질문은 하품 먼저 나와서 그냥 아무렇게나 답하곤 한다. 침대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자와의 이런 덜떨어진 질문을 나눠받고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그걸 또 당당한 여자 운운의 꼬임에 넘어가 술술 얘기하는 나란 애의 정체성이란.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살짝 동할지도 모를 질문들을 받고 대답도 제대로 못한채 쩔쩔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누군가를 만나는거, 왜 하는거야? 외로워서나 심심해서인거 말고. 정말 니 안에 어떤 욕구가 있는거야.
-욕구라... 사람들 알고 싶고 내가 어떤식으로 반응하고 움직이는지 궁금해. 시뮬레이션 체험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나. (아 이 그지같은 말빨.)

 넌 꿈이 뭐니.
-내 꿈은 세상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책을 쓰는거야. 그 책이 말야. 내가 죽은 후에도 남는다면 끔찍하게 기분 좋을 것 같아. 약간의 허영심, 아니 다량의 허영심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꾸준히 생각한거거든. 그래서 지금 내가 붕 떠있고 친척 모임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썩소만 날리고 있어도 조급하진 않아. 사실 좀 조급하기도 하다. 아닌척 하는거지.

  외로울때 뭘하니.
-요즘은 주로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요리를 해. 비상시엔 무한도전으로 1시간 분량의 위안을 얻어. 지금 일을 안 하고 있으니 사람들도 곧잘 만나는 편이고. 


 그리하여 나의 허접한 답변은 그가 나란 인간을 느끼게하는 계기를 마련해줬고, 차마 난 그에게 같은 질문을 하진 못하게 만들었다. 이건 주로 내가 하는 질문의 유형이었으니 선빵을 맞고 질문의욕을 상실했다고 해야나. 그런게 왜 궁금하냐고 하면 뭐라고 똑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은데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자신있는 신체부위가 어디인지 아파트 시세는 어느정도인지를 물어선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욕심 때문이 아닐까 정도로 생각해본다.

 그동안 인터뷰어처럼 질문만 해대서 이실직고 좀 섭섭했다. 나의 모든 존재를 오감으로 받아들인다는 사람도 있었고 차차 알아가는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난 비유적인 표현이나 농담도 구분 못하는 메타포치에다 차차 알아갈 정도로 노력을 기울이는 인연이란게 복잡다단한 삶에서 가능한지 알 수 없어서 그들의 진의조차 의심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전에 본 귀여운 녀석이 대화 중에 꺼낸 얘기 중에 '아는 여자'의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그동안 늘 아는 여자라고만 일컬어진 이나영에게 정재영이 헤어지면서 이름이... 나이가... 라고 묻는 장면 말이다. 혹시 우린 그저 아는 사람 아는 여자로 지칭된 내가 아니라 어떤 색을 지니고 어떤 색을 발현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관심을 일찌감치 접고 있는건 아닐까. 나를 어필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만남의 수요를 재느라 정작 상대방을 알아주고 그 존재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그렇다고 내가 대단히 상대에게 집중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노력하는거고, 적어도 자위하듯 표현 욕구만 앞세워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하진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대화가 통한다는게 어떻게 말을 끊임없이 한다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그건 분명 공감의 힘이고 나를 알아주는 상대에게 자극받아 더 그를 알아가는 과정일진대.

 질문에 이력이 나면 다른 형태의 소통 방식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지난한 내 식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다만 그 방식이 무례하거나 집요한게 되지 않도록 세련된 포즈로 진의를 표현하는 것과 일방적인게 되지 않도록 좀 더 타이밍과 질문의 질에 대해 고민해야겠지. 과연 그게 잘될지 한참 의심스럽긴 하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사뽀로 덕에 아침부터 알딸딸하다. 이 나른한 감각이 일요일의 더없이 나른한 기분과 조응하면 어떤 색이 나올까. 난 매일매일 내가 궁금하다. 그리고 당신의 일요일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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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6-1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저로 하여금 이런 저런 얘기를 마구 꺼내놓고 싶게 하는 글이네요.
그래서 그냥 추천만 드리고 갈렵니다 ^^

Arch 2008-06-1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댓글 다셨으면서^^/ nabi님 반가워요. 크. 저도 좋은걸요.^^
 

 30여명이 사는 고시원에 밤 12 20분경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조금 시끄럽다 말겠지하곤 방에 버티고 있다가 우왕좌왕할 어린 중생들의 얼굴이 떠올라 -떠오르긴. 단지 너무 시끄럽고 온 밤내 그 소리가 계속될 듯해 오싹한 거겠지.- 잠에 취한 몸을 비틀대며 나가봤다. 역시나 몇몇 낯익은 얼굴들과 여기 살았어 싶은 얼굴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걱정만하고 있지 적극적인 제스처는 취하지 않았다.  나는 대번에 나서기 좋아하는 기질을 발휘해 화재경보기함을 열었다. 선이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음 뽑을 요량으로 이리저리 선의 행방을 쫓는데 도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총무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와선 거들었지만 맹한 나나 아직 연애 한번 못할 정도로 순진하기만한 그 애나 심오한 화재경보기를 파악할순 없었다. 대체 이 소릴 어떡해야할지, 고막을 잠시 드러내놓고 생각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최근 고시원에 입주한 열혈 여성이 나타나 가위를 달라고 했다. 그녀는 가위로 경보기에 연결된 선을 하나씩 잘라냈다. ? 그럼 그거 작동 안 되잖아요. 얼떨결에 내가 묻자, 그녀는 피복선 벗겨내고 다시 연결하면 된다고 정말이지 화재경보기 까짓것 별거 아니란 표정으로 계속 선을 잘라냈다. 6개쯤 잘라냈을까. 소린 그쳤고 모여있던 무리들은 안도하며 자거나 혹은 씻으려고 고시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들 얼굴엔 손바닥만한 그늘이 드리워졌고 그건 우리가 공통적으로 분명하게 느낀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거창한 설명이지만 짧게 얘기하자면 대충 이런 속마음 정도 되겠지.
 

 “ 아 씨발, 이러다 다 뒈지는거 아냐.”
 

 그날 이후로 난 고시원에 틀어박혀 부단히 냄새를 맡고 낌새를 살피고 있다. 구체적으로 가스밸브를 잠근다 화재경보기를 재설치해야한다, 소화기 작동법을 배워야한단 식의 자력갱생법을 말이다. 아울러 얼굴 익힌 몇몇에게 소방시설과 원장이 관계된 음모론-모종의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른단-을 퍼트리고 다녀 빈축을 사기도 했다. 불이 나면 정말 냅다 뛰더라도 통로가 좁고 출구가 하나라서 위험할지 모르니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는둥 아예 화재의 싹을 뽑아야하니 불과 밀접하지 않은 생활습관-생식하라던지, 전자렌지로 음식 조리에 박차를 가하란-을 들이란식의 허무맹랑한 소리만 왈왈대다 개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화재가 나면 순식간에 불이 번질 위험이 주거지보다 높을 뿐이지 고시원 자체는 생활하는데 별다른 불편함이 없다. 고시원에서 얼굴 익힌 친구들과 만든 억지 간을 한 설익은 재료를 요리랍시고 깔깔대며 먹는 재미도 있고, ‘고시원이란 고시스런 분위기 덕분에 조용히 좀 해달란 부탁을 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 모두 별거 아닌걸로 받아질 수 있는 야박하지 않은 소통이 있고, 생활터전이다보니 이러저러한 물건들이 창을 통해 옮겨다니기도 해서 물자절약도 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원이다.
 

 뭐 공동생활의 불편함이나 가끔 일어나는 경미한 도난사건 말곤 사는데 지장있을만한 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고. 내 방이 아니라 내 공간이 있고, 내 삶을 스스로 꾸린단 자부심도 있으니 이건 일석이조원. 고시원 산다고 했을 때 사람들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과 재깍 반응하는 말들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깡도 키웠으니 난 대단한 고시원 적응형 인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욕망할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되는 무기력한 20대의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해서 고민 안 한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나 내 안의 욕구 정도로 미루어 짐작해도 꼭 포도를 먹을 수 없어 시고 떫다고 말한 여우의 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치욕적인 극한의 결핍까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늘 내 곁엔 어떤식으로든 부족함이 존재해왔다. 허리에 탄탄한 고무줄을 묶어놓으면 아무리 멀리 뛰어도 다시 제자리이듯 이런저런 방식으로 날 독려해도 허린 너무 아팠고 고무줄은 질기기만 했다. 그래서 가끔씩은 불행하다고 느껴지고 지겹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진데도 위험은 늘 잔존해 있고, 계속 얽매이는거라면 고무줄의 탄성은 더 뛰어난 상태가 될테니 차라리 고무줄과 약한 허릴 인정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물론 함정은 있다. 친구말처럼 적당히 벌어서 절약하는데 쓸 에너지를 다른데로 좀 돌리고 싶기도 하고, 나누면서 살고 싶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암담함쯤은 흔히들 하는대로 보험이나 적금으로 담보 잡히고 싶을 때도 있으니 말이다. -이게 담보잡히는 성질의 것은 아닌데 그럴 듯 해보인다.- 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한게 아니고 안정적인건 더더군다나 기대할 수 없는거라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게 더 나을거란 생각이다.  밤중에 울린 화재경보기 덕에 난 짧은 글을 짓고, 나의 결핍감을 생각해본다. 결핍감은 간질 환자가 경험한다는 일초간의 공명상태처럼 때론 투명하기까지하다. 풍족한 가운데선 가당치도 않았을지 모를 일.


 아직은 괜찮다. 괜찮은 말미를습지생태보고서의 마지막 읊조림으로 대신한다.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걸까? (그렇겠지?)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일 수 없을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걸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 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 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기분좋은 외침은...... 단지 어리석은 때문만은 아니겠지?

이르든 늦든 청춘에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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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8-06-17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 씨발, 이러다 다 뒈지는거 아냐.”

ㅎㅎ, 헉스입니다.
너무 직설적이고, 사실적이네요.
오우~~~ 노우~~ 시니에님 답지 않아보여요.ㅋㅋ

Arch 2008-06-1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알라딘에서 다시보니 반갑네요.^^ 정말요? 나름 수위조절인데. 사실 입밖으론 저렇게 말 못해요. 상황이 조금 급박한 탓에. 앞으로 저다워보이는거 많이 깨질지 몰라요.

순오기 2008-06-18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시니에님이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는 거에요?
옥찌들이랑 사는거 아닌가요? 몰라~ 헷갈린다.^^

Arch 2008-06-18 09:0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그러니까요. 저는 홍탁처럼 좀 삭힌 다음에 사진, 올릴게요. 뒷북 전문 시니에잖아요.

hnine 2008-06-18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시원 풍경이 자주 등장했던, 얼마전에 읽은 김애란의 소설집이 생각나네요.
시니에님, 글 쓰시는 내공이 마구 보입니다. ^^

Arch 2008-06-19 09:51   좋아요 0 | URL
hnine님 마구 보일 정도래야는데. 저도 김애란씨 좋아해요.

마노아 2008-06-19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틀 전에 올라온 글인데 왜 저는 이제사 보게 되었을까요? 이상하다. 다 클릭했었는데...
시니에님 혹시 글쓰는 꿈 갖고 계세요? 보통 필력이 아니에요. 난 좀 많이 뭉클했고 콧날이 조금 시큰거리기도 했어요.
꼭 오즈마님 글을 볼 때 받는 느낌과 비슷했고, 예전에 계시던 작게작게님 글 느낌 비슷했어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글이에요. 마음이, 잔뜩 묻어있는 그런 글이요.

Arch 2008-06-19 16:52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감사해요.^^ 제가 한꺼번에 올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마노아님 울릴려고 한건 아니니까 뚝!!^^*
 



 윤도현의 러브레터 300회 특집 1회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웠다. 보기좋은 음식을 만들어놓아 시각적인 자극으로 식욕은 최고로 달리는데  정작 중요한 음식 맛은 별로여서 '식욕이 반찬' 을 몸소 시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보여줬다. 특집 전반엔 의욕만 앞서는 연출과 가수들의 기량을 깎아먹는 선곡이 돋보였다. 간만에 티비로 보는 라이브에 한껏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다. 마치 설날 대목용 짜집기 조잡 기획의 면모를 고루 갖춘 듯 했다. '뜻하지 않게' 공연은 대체 왜 결성된건지 의심이 들만큼 내지르기 위주고 초대된 가수들은 대체 왜 저 가수들이 저런 노래를 부르나 싶은 답답함에 불만은 극에 달했다. 저들에게 맞는, 그들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무대와 노래가 아니라 그저 양으로 시간 때우는건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게했다. 대충의 이름있는 가수들이 나오면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의 목소리는 정말 멋졌다. 코러스로 짧은 분량 나오는데도 한참이나 여운이 남았으니까.

 여하튼, 조금 보다가 그만 시큰둥해선 스킵해서 프로그램을 보고있는데 노랑색 조명이 켜지면서 마술처럼 그녀가 나왔다.

 들판에서 뛰어다니다 잠시 노래를 하기 위해 방송국에 들른 것처럼 하늘거리는 옷에 귀여운 화환의 그녀. 그녀가 몸을 살짝살짝 흔들며 노래를 시작했다. 평소에 윤도현을 좋아했지만, 이건 딸려도 너무 딸렸다. 음악에 빠져서 미소짓고, 춤추는 그녀에 비해 웬지 촌스러운 반바지 보이.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주제곡 ‘Way back into love’는 김윤아가 5.5 앨범에서 부른 Girl, You'll be a woman soon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혀짧은 가수들의 딸각거리는 느낌이나 앤디의 하트춤과는 비교도 안 된다. 노래가 좋고말고를 떠나 그건 온전히 '김윤아'라는 존재가 발하는 힘이었다.

 어떤 사람은 김윤아만큼 영혼에 가까이 다가가는 자의식을 가진 가수는 드물다고 했다. (알라디너 중 한분이 그런것 같은데, 기억이) 나 역시 그녀가 노래처럼 흔들리는 모습에 눈이 부셨다. 매혹당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그녀는 수줍게 보여줬다. 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무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감동은 기대나, 공간, 대상과는 상관없이 존재한다. 김윤아는 일상의 살을 째고 틈입한 강하고 선명한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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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6-1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윤아가 나온 건 지난 주 금요일인가요? 성시경과 알렉스가 듀엣곡 부르는 것 보다가 잠들었어요. 김윤아를 못 본 것은 못내 아쉽네요. 마지막 줄 감상이 인상적이에요. 시니에님은 문학소녀인가봐요!

조선인 2008-06-1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윤아를 코앞에서 만나놓고도 떠난 뒤에야 알았다지요. 얼굴치인 제가 원망스러워요. 엉엉

라주미힌 2008-06-1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김윤아~~~ 새 앨범 나왔나요?

다락방 2008-06-1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제게 '일상의 살을 째고 틈입한 강하고 선명한 감동'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오후예요. 이 글 좋은데요!

Arch 2008-06-1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아니요, 지지난주요. 문학소녀라.. 생긴건 문학이모잖아요.^^//조선인님 전 자꾸 조선인님의 풍선만 생각나서.^^ 저도 얼굴치인걸요. 대신 잘생긴 얼굴은 크흡 유독 기억 잘하는 선택적인 얼굴치.//라주미힌님 네. 7집 나왔어요.//다락방님 반가워요. 언제쯤 들르시나 호시탐탐^^ 감사해요. 다락방님이 저도 좋은데요!

웽스북스 2008-06-1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저도 김윤아 좋아해요 사람들은 노래방 가면 일탈이나 매직 카펫라이드를 부르는데, 저는 사랑, 지나고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나 야상곡 같은 걸 불러서 눈치를 받곤 하지만 말이죠 ㅎㅎ

순오기 2008-06-1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시니에님, 광주 후기가 아니잖아요.흐흐흑~~~~ 기다리고 있어요. 님이 찍은 그 사진들도... ^^

Arch 2008-06-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저도 그 노래 좋아하는걸요.// 순오기님 아...제가 어찌 후기를 올린답니까. 쟁쟁한 후기들 사이에 명함도 못내밀텐데. 으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