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명이 사는 고시원에 밤 12시 20분경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조금 시끄럽다 말겠지하곤 방에 버티고 있다가 우왕좌왕할 어린 중생들의 얼굴이 떠올라 -떠오르긴. 단지 너무 시끄럽고 온 밤내 그 소리가 계속될 듯해 오싹한 거겠지.- 잠에 취한 몸을 비틀대며 나가봤다. 역시나 몇몇 낯익은 얼굴들과 여기 살았어 싶은 얼굴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걱정만하고 있지 적극적인 제스처는 취하지 않았다. 나는 대번에 나서기 좋아하는 기질을 발휘해 화재경보기함을 열었다. 선이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음 뽑을 요량으로 이리저리 선의 행방을 쫓는데 도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총무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와선 거들었지만 맹한 나나 아직 연애 한번 못할 정도로 순진하기만한 그 애나 심오한 화재경보기를 파악할순 없었다. 대체 이 소릴 어떡해야할지, 고막을 잠시 드러내놓고 생각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최근 고시원에 입주한 열혈 여성이 나타나 가위를 달라고 했다. 그녀는 가위로 경보기에 연결된 선을 하나씩 잘라냈다. 어? 그럼 그거 작동 안 되잖아요. 얼떨결에 내가 묻자, 그녀는 피복선 벗겨내고 다시 연결하면 된다고 정말이지 화재경보기 까짓것 별거 아니란 표정으로 계속 선을 잘라냈다. 6개쯤 잘라냈을까. 소린 그쳤고 모여있던 무리들은 안도하며 자거나 혹은 씻으려고 고시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들 얼굴엔 손바닥만한 그늘이 드리워졌고 그건 우리가 공통적으로 분명하게 느낀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거창한 설명이지만 짧게 얘기하자면 대충 이런 속마음 정도 되겠지.
“ 아 씨발, 이러다 다 뒈지는거 아냐.”
그날 이후로 난 고시원에 틀어박혀 부단히 냄새를 맡고 낌새를 살피고 있다. 구체적으로 가스밸브를 잠근다 화재경보기를 재설치해야한다, 소화기 작동법을 배워야한단 식의 자력갱생법을 말이다. 아울러 얼굴 익힌 몇몇에게 소방시설과 원장이 관계된 음모론-모종의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른단-을 퍼트리고 다녀 빈축을 사기도 했다. 불이 나면 정말 냅다 뛰더라도 통로가 좁고 출구가 하나라서 위험할지 모르니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는둥 아예 화재의 싹을 뽑아야하니 불과 밀접하지 않은 생활습관-생식하라던지, 전자렌지로 음식 조리에 박차를 가하란-을 들이란식의 허무맹랑한 소리만 왈왈대다 개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화재가 나면 순식간에 불이 번질 위험이 주거지보다 높을 뿐이지 고시원 자체는 생활하는데 별다른 불편함이 없다. 고시원에서 얼굴 익힌 친구들과 만든 억지 간을 한 설익은 재료를 요리랍시고 깔깔대며 먹는 재미도 있고, ‘고시원’이란 고시스런 분위기 덕분에 조용히 좀 해달란 부탁을 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 모두 별거 아닌걸로 받아질 수 있는 야박하지 않은 소통이 있고, 생활터전이다보니 이러저러한 물건들이 창을 통해 옮겨다니기도 해서 물자절약도 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원이다.
뭐 공동생활의 불편함이나 가끔 일어나는 경미한 도난사건 말곤 사는데 지장있을만한 일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고. 내 방이 아니라 내 공간이 있고, 내 삶을 스스로 꾸린단 자부심도 있으니 이건 일석이조원. 고시원 산다고 했을 때 사람들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과 재깍 반응하는 말들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깡도 키웠으니 난 대단한 고시원 적응형 인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건 욕망할 수도 없고 욕망해서도 안 되는 무기력한 20대의 구차한 자기변명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해서 고민 안 한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나 내 안의 욕구 정도로 미루어 짐작해도 꼭 포도를 먹을 수 없어 시고 떫다고 말한 여우의 맘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치욕적인 극한의 결핍까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늘 내 곁엔 어떤식으로든 부족함이 존재해왔다. 허리에 탄탄한 고무줄을 묶어놓으면 아무리 멀리 뛰어도 다시 제자리이듯 이런저런 방식으로 날 독려해도 허린 너무 아팠고 고무줄은 질기기만 했다. 그래서 가끔씩은 불행하다고 느껴지고 지겹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진데도 위험은 늘 잔존해 있고, 계속 얽매이는거라면 고무줄의 탄성은 더 뛰어난 상태가 될테니 차라리 고무줄과 약한 허릴 인정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물론 함정은 있다. 친구말처럼 적당히 벌어서 절약하는데 쓸 에너지를 다른데로 좀 돌리고 싶기도 하고, 나누면서 살고 싶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암담함쯤은 흔히들 하는대로 보험이나 적금으로 담보 잡히고 싶을 때도 있으니 말이다. -이게 담보잡히는 성질의 것은 아닌데 그럴 듯 해보인다.- 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한게 아니고 안정적인건 더더군다나 기대할 수 없는거라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게 더 나을거란 생각이다. 밤중에 울린 화재경보기 덕에 난 짧은 글을 짓고, 나의 결핍감을 생각해본다. 결핍감은 간질 환자가 경험한다는 일초간의 공명상태처럼 때론 투명하기까지하다. 풍족한 가운데선 가당치도 않았을지 모를 일.
아직은 괜찮다. 괜찮은 말미를 ‘습지생태보고서’의 마지막 읊조림으로 대신한다.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걸까? (그렇겠지?)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일 수 없을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걸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 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 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기분좋은 외침은...... 단지 어리석은 때문만은 아니겠지?
이르든 늦든 청춘에게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