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친구녀석이 만나고 있던 여자 얘기를 해준적이 있다.
성격도 괜찮고 얼굴도 이쁘장한 편이었지만 객관적인 미점 말곤 매력을 발견할 수 없었단 얘기와 함께.
헌데 요 여자 아인 친구가 맘에 들었는지 결혼 운운하며 진지한 모드로 나가길 바라고 있었고 친구는 에둘러 그 애에게 설명이란걸 해줬다.
"오빠는 말이지.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야. 보헤미안이라고나 할까."
쌍팔년도식의 느끼함은 제쳐두고, 그 뒤로부터 그 녀석의 별명은 미친 보헤미안이 돼버렸다.
또 다른 녀석의 경우.
녀석이 두달 정도 사귄 귀여운 여자 친구와 -요즘 애들치고 예쁘고 귀엽지 않은 애 없다지만.- dvd방에 갔더랬다. 사귄지 얼마 안 됐으니 얼마나 들끓어올랐겠어. 장소가 무슨 대수랴. 영화는 이미 사운드와 조명의 구실 밖에 못하고 둘은 일을 치르기 직전까지 다다르고 있었는데 여자 아이,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란다. 뭔가 했더니 베네통 콘돔이었고 녀석은 나어린 애인의 남다른 준비성에 감탄을 했단다.
베네통에서 콘돔도 나오냐며 해야할 일도 망각한채 콘돔 구경에 빠진 녀석은 분명 10개라고 또렷히 적혀있는데 콘돔이 몇개 밖에 없다는걸 알아챘다. 보통 예민한 녀석이 아니었다. 그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그런걸 확인하다니.
"누구야, 콘돔에도 불량품 있나봐. 몇개가 없어."
사심없는 그의 질문에 사슴같은 눈을 말똥히 굴리며 그녀가 한다는 말은
" 오빤 다른 사람이랑 하고 싶은적 없어?"
와와와와~~~
꼭 그일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녀석은 그 여자 아이와 헤어졌다고 한다. 무쓸모 개념을 지닌 녀석이었지만 도저히 그 뉘앙스까진 따라잡기 힘들었단 고충을 토로하며.
20대 초반 두 아이의 정서가 사뭇 다른 것처럼 결국 사람의 스타일은 나이와는 별개의 문제같다. 속 다 보이는 20대의 열정이나 의뭉스런 30대의 사심이나 태반은 그릇만 다를 뿐 본질적인건 이미 그 사람 안에 다 있는거니까.
20대 초반에 어리버리했던 내가 어느 날 지나가는 도사의 가르침을 받자와 개벽되지 않았던 이상 지금도 역시 면면히 그 코드를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내가 미친 보헤미안이라도 좋으니 겁없이 사랑하고 용기있게 고백하고 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감식안을 갖으려고 노력하고 몇개 비는 콘돔곽을 슬쩍 남자에게 건냈던 과거가 있었다면 지금의 나보다 삶을 살아가는데 더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본다. 글쎄 역사에 가정이 없는 것처럼 개벽이란 허상만큼이나 때 지난 푸념일뿐이겠지만.
물질하는 처녀가 깊은 물 속까지 가라앉았다가 제 숨을 도저히 참지 못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흔하디 흔한 공기의 질감조차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숨이 다할때까지 꾹 참는게 아니라 쉴새없이 물 안과 밖을 들락거리는 정체성을 가진 난, 전복도 물 밖의 세상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나이만 들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건 늙는단 것보다 더 아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끔씩 다가오는 씁쓸한 생각.
20대 초반의 풋풋함으로 무모할순 없을지라도 지금 딛고 있는 곳에서 시작해도 늦진 않다. 모순에 치여 살지만 내 가장 큰 강점은 바로 터무니없을 정도로 말끔한 희망을 꿈꾼다는거니까.
우선은 기다림과 인내가 시작이고 그 다음은 아주 아주 나중에 생각해보련다.
<보그>의 편집장이었던 아나 원터는 천박한 스타일이 스타일이 아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 그러저러한 일상을 지탱하는 나를 새롭게 리메뉴얼할 수 있는 계기가 올거라고 믿고 그런 예감에 설레는건,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놓고 음반 화보를 찍은 제인 버킨에 준하는 자아 정체감을 찾아가는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