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직업 학교에서 점심을 먹다가 내가 싸온 제육볶음을 옆에 앉은 손언니에게 권했다.

-언니 이것 좀 드세요. 제가 한거라니까요.
-어, 그래, 용하네. 그런데 내가 고기를 안 먹어.
-네? 진짜요? 언제부터?
-태어날때부터.

그때부터 언니들의 탐문이 시작됐다.
평소 한놈만 걸려라. 언니-아니, 그럼 그 살은 어떻게 된거여.(삿대질을 험하게 하신다)
손언니-(한참을 생각하더니) 응, 내가 부침개를 좋아해. 튀김이랑.
나(채식주의 일주일 경험이 있는 주제에)- 언니, 그럼 아예 고기를 못먹는 거에요?
안달난 언니 2- 만두도 못먹어? 돈까스도?
손언니- 만두는 먹지. 그리고 돈까스는.

모두들- 돈까스는?

손언니 - 응. 고기 얇은 것만.

그러니까 손언니는 채식주의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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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6-24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 일주일 경험이 여러번 있었던 작심일주일 웬디양
손언니 채식주의 최고 ㅋㅋㅋ

나 채식 때 제일 힘들었던게 만두였다나 뭐라나 ㅋㅋ (만두는 예외 막 이런 원칙도 세웠었는데 ㅋㅋㅋ)

Arch 2008-06-24 09:2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손언니는 채식주의자였다나 뭐라나.ㅋㅋ 만두는 예외, 얇은 돈까스 예외, 또 뭐 예외. 회는 먹고, 고기 튀긴건 아마 드실테고 막 이런 원칙도 세우고^^ 저도 채식 일주일하다 관뒀어요. 흡.

2008-06-24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4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재를 돌아다니다 보면 김치 담그는 광경이 생각난다. 소금에 간간하게 절인 배추를 받침에 바쳐 물이 다 떨어지길 기다린다. 쪼르르 떨어지는 물소리마저 경쾌하다. 갖은 양념을 준비해 배추를 버무리는 것도 처음 김치를 담그듯 조심스럽다. 배춧잎 하나하나마다 정성껏 양념으로 무치고, 버무리고,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아내는 과정. 김치 만들기 23p를 직접 시연하듯 정교하고 체계적이며 일관되다. 전기작가들이 곧잘하는 실수 중에 하나는 일관된 큰 틀을 좇다보니  한 개인의 삶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는거라고 한다. 그치만 대체 그 틀이란게 있는건지 의심스러운 나로선 '정체불명' 서재의 정체성이 고민되기 시작했다. 

 서재 김치를 담그는 나는 서툴고, 우왕좌왕하고. 알스님 말처럼 과연 '네 정체는 뭐냐'싶은 순간이 많다. 나대기 좋아하고, 딴지걸기 좋아하면서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애들 노는 것만 구경하고.  머릿속에 돌아다닌걸 전혀 연관없이 툭 꺼내놓곤 엉뚱하단 소리를 듣기 일쑤이며 주위에서 결혼해라 어쩌라 할때는 귀찮소로 일관하다 달 밝은 밤, 정말 그 장면을 떠올려보곤 쑥쓰러워서 결혼식을 대체 어떻게 하냐고 얼굴을 붉히는 나는 뭔가.

 사실 카테고리만해도 그렇다. 메피님처럼 아주 근사한 제목을 달지도 못하고, 순오기님이나 웬디양님, 마노아님처럼 다방면의 카테고리를 장착하지도 못하고. 여러모로 부실과 잡다함을 무기로 페이퍼만 달아대고. 이건 서재라기보다는 블로그라고 해도 될만치 책 얘기는 없고. 그렇다고 페이퍼로 승부를 보는 산사춘님만한 내공은 턱없이 부족하다. 서재의 카테고리 정리만으로도 하루를 꼬박 허비했다.

 이슈 브리핑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올리다가 금세 아프님의 막강한 의욕과 내용에다가 넘치는 열정에 턱도 없이 못미치고, 느긋하지만 날카로운 드팀전님만도 못하고. 발빠른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차니스트답게 여러모로 삐긋댄다. 그러다 계속 ~ 만도 못하다보니 비교에 비교에 비교를 낳다보니 정작 내가 정말 서재에서 뭘 하고 싶어했는지도 까먹고 말았다.

 나는 서재에서 뭘 하고 싶었을까. 뭘하고 싶은걸까?

 알라디너랑 같이 알콩달콩 댓글 놀이도 하고 싶고, 서재의 달인이란 칭호도 듣고 싶고, 책선물도, 정모 모임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건 같은 책을 읽고, 얘기하고 공감하는. 온전히 알라딘에서만 더욱 빛을 발하는 책과 관련된 사람과 어울리고 싶은 바램이었다. 그런데 자존감 없는 인간답게 이리저리 휘둘리다 정작 내가 바랐던건 빛을 바래고, 이건 즐찾수와 방문객수에만 열을 올리는 지경이니,  제대로 반성해야겠다.

 사실 내 위치는 굳이 내가 발악을 한다고 찾아지는건 아닐거다. 도리어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묘사한 것과 비슷한 수순이 되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사랑이, 이렇게 노을처럼 젖어드는걸 수도 있는거구나.

 알라딘이, 이렇게 조용히 내게 다가오는구나.

 욕심 좀 버리고, 어깨에 힘 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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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2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다 아니고, ~와는 다르게! ^^

Arch 2008-06-23 23:5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순오기님!! 목포는 잘 다녀오셨어요? 다름다움이 아름답다잖아요. 제가 아름답단건 아니고.^^

웽스북스 2008-06-24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내가 다방면의 카테고리라니 말도 안돼요 ㅋㅋㅋ

Arch 2008-06-24 09:42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아님 말구. 그래도 전 좋던데요.
 

 면접을 봤다. 그룹 면접이었는데 한사람 건너 자리에 앉은 남자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면접관 : ooo씨, 적은 나이는 아닌데 경력이 전무하네요.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남자 : 이 업무와 관련있지 않아서 기재를 안 했는데 용산에서 매장영업관리총괄 책임자를 했었고 잠깐 레스토랑 주임을 했습니다.

 난 피식 웃고 말았다. 저거 어디서 들어본말인데. 매장관리총괄은 뭐. 사장 아래로 직원 하나일때 그들이 쓸 수 있는 말 아닌가.

 과도하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주입시켜 다단계가 아니면 뭔가 음모가 있을거란 확증을 심어준 회사에 다닐 때가 있었다. 처음엔 다른데와 달리 매일 점심시간마다 밥도 사줬다. 그래주니까 잘해주는거라 생각한거겠지. 밥 사주면 만사형통이야 아주. 쩝.


 그 날도 여느 때처럼 회관 비슷한데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밖은 왁자한 무리들 소리로 들끓고 정신없이 바쁜 아주머닌 오로지 서빙 본연의 임무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즉 음식 전달과 치우기. 빠르게 자리 확보를 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몸놀리는건 기본이고. 거기엔 손님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선의가 어느 한구석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더라도 차마 그 북새통에선 드러낼 수 없었으니까.

 아주머니가 바쁘게 서빙을 하느라 그릇을 탁자에 탁탁 놓은 순간, 입방정 떨기 좋아하던 지점장이 한마디 한다.
 

 -저 아주머닌 평생 식당 종업원만 할거야. 서비스 매니저로서 자질 부족이야.


 난 안 보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서비스 마인드는 개뿔.

 서비스 업종에 다년간 종사해온 나로선 다수의 서비스 업종 종사 경력은 쓸만한게 아니란 남자와 서비스 마인드를 엉뚱한데서 찾는 지점장이 좀 고까웠다.


 인간 성분과 무관하게 오로지 한국어가 통하고 몸을 부지런히 놀릴 수 있다는 이유로 서비스 업종은 직업에 귀천없단 소리 속에서도 굳건히 천대 받아왔다.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도 독보적인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서비스업의 특성에다 이건 거쳐가는 곳이지 머물 수 없단 강단있는 종사자들의 자의식이 합쳐져서.


 사람을 상대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다. 실험을 할 수도 없고, 100% 적확하게 들어맞는 고객 상대법도 없다. 치밀하게 분석을 해서 적용을 한다고 하더라도 변수는 늘 존재하는거고, 더군다나 사람에 관련된 일이다보니까 그 편차는 확률적으로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깊은 관심은 아니더라도 서비스를 받을 때 경미한 존중과 이해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비스가 만족스럽길 원한다면 그만한 장소에서 요구하고, 마인드 운운할게 아니라 의도적이거나 상당히 불쾌한게 아니면 기분좋게 넘어갈 수 있는 아량도 갖어보기. 그렇다고 이게 극악스러운 집념을 불태우며 술값이 비싸단 이유로 그곳의 종업원들에게 과도한 서비스를 요구해야 한다는걸로 생각하진 않길. 그렇지 않아도 언니들은 피곤하니까.

 나이든 양반이랑 만나고 있을 때 찜질방에 간적이 있다. 출출해서 옆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는데 아주머니 인상이 험악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손님이 와도 본체만체다. 평소에도 까칠한 성격 유감없이 발휘하던 이 양반, 툴툴대는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한다.


 -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렇지 손님이 왔는데......


 혼잣말이기엔 크고 아주머니가 대꾸하자니 애매하게 작은 목소리로.
 어줌마, 그릇을 탕탕 놓는다. 분위기가 안 좋아 난 맥없이 TV만 보고 있었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가 이 냥반 특유의 비아냥 앞에서 만신창이가 될게 뻔했으니.

 식사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가 식혜를 산다. 밥 먹기 전에 웬 식혜냔 눈짓을 했다. 물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식혜를 아주머니에게 갖다준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성질내느라 목 칼칼할테니 식혜드시란 말과 함께. 손님이 식혜 사주는건 처음이라며 금세 얼굴색이 환해지는 아주머니.


 두말할 것 없이 그 날 먹은 미역국은 최고로 맛있었다.
그를 보면서 평소에도 달리 나일 먹는건 아니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때만큼 고개를 끄덕인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고객감동은 너무 뻔하니까 종업원 감동은 어떨까. 구태여 쩔쩔매거나 억지로 안 내키는 수작을 거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흥이 나게. 기계적이고 일률적인 관계 안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샘솟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뭐, 지금의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단 사람들에겐 역시 오지랖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지 않을까. 구태여 욕쟁이 할머니 찾아가는거 말고, 피곤한 표정의 알바생에게 사탕을 준다거나 농담을 건네는 것. 그 순간만큼은 환한 미소란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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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8-06-2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발상의 전환 또는 고정관념의 파괴 라는 수식을 붙이지 않더라도 서비스의 척도에는 법칙이란 것이 없어 보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기만 하면 될 테니까요. 물론 모두에게 긍정적인 부분에서 이겠지만......

Mephistopheles 2008-06-2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서비스 마인드는 어쩌면 매너있고 수준있는 손님들에게서 나오기도 한다죠.^^

Arch 2008-06-23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그 수단이란게 애매해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서비스 지침이 있다면 좀 편하겠죠?^^/메피님. 매너있고 수준있는 손님이실 것 같은데. 나 자꾸 상상만해.ㅋ

BRINY 2008-06-23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아무리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잖아요. 자기가 건넨 인사가 무시당하는데 서비스할 맘 생길까요.

Arch 2008-06-23 22:50   좋아요 0 | URL
BRINY님 반가워요. 그러니까요. 그 사람은 천번의 인사일 수 있지만 우린 딱 한번이잖아요. 딱 한번 웃어주고 인사 받아주는게 그리 힘들까 싶기도 하고 말이죠. BRINY님은 인사 잘 받아주실 것 같은데^^

2008-06-23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3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3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3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8-06-23 16:15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8-06-23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샘나신거에요? ^^

웽스북스 2008-06-24 00:41   좋아요 0 | URL
메피님 질투쟁이 ㅋㅋ 저 비밀댓글 나지롱요~ ㅎㅎ

Arch 2008-06-24 09:40   좋아요 0 | URL
GT쟁이?^^

Mephistopheles 2008-06-24 12:39   좋아요 0 | URL
역시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8-06-24 12:51   좋아요 0 | URL
우왕. 재미없어요. 메피님 기를 팍팍 드리고 싶은데, 주소 좀.
 

  촛불집회에 나가고, 후원할데가 있으면 코묻은 돈 탈탈 털어서 모금함에 넣고, 내가 할 수 있는건 이것 밖에 없다는게 부끄러울 정도로 전 사회 운동 초보입니다.

 누군가 선전 구호를 외치고, 운동에 동참하라고 할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고, 나 하나 빠진다고 뭐 달라지겠냔 맘이 있었으니까요. 나는 내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우리 가족의 굳건한 기대를 등에 짊어져야한다는 부담감. 운동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의적인 판단. 나는 나대로 부지런히 행복하게 살면 어차피 깃발 아래 모이지 않아도 전체적인 행복지수는 높아질거란 낙관.

  아직은 쑥쓰러워 촛불 들고 구호 외치고, 어딘가에 내 의견을 말하는게 참 어색합니다. 쟁쟁한 논리력에 막혀 정말 제가 바라는바를 소신있게 밝히기도 어렵습니다. 이 물결에 휩쓸려 주관없이 휘둘리는건 아닌가란 자성도 해봅니다. 아침 신문에 시민의 힘으로 조중동의 언론같지 않은 행태를 몰아내자고 할때 탄압이라며 권력의 힘으로 언론을 보호해줘야한다는 홍준표 의원의 발언을 접할때는 절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들기 시작하면서 제 삶이 조금씩 재편성 되는걸 느끼고 있습니다.

 전에는 한번도 관심을 갖지 않던 이웃의 곤궁한 삶이 눈에 들어오고(이건 절대로 제가 그들보다 낫다는 우위에 선 시선이 아닙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상형 인간의 자세로 세상을 관조만 해오던 시선을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로 단련시키기도 합니다.  놀이터에 있는 쓰레기를 보면 옥찌들과 같이 주우려고 하고, 오지랖 넓게 나를 필요로하는 곳에 있으려고 노렵합니다. 내가 필요해서 누군가를 찾고, 혹여 누군가의 부탁에 마지못해 응해주는 것보다 오지랖형 인간으로 사는건(지나친 간섭은 조심해야겠죠!) 훨씬 즐겁습니다.

  아파트라는 벽을 마주보고 10년을 살았어도 변변한 이웃 한명 있지 않았는데 이번 달 들어서만 옥찌들을 매개로 벌써 두분의 할머니와 친하게 되었습니다. 옥찌들처럼 지나가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싶고, 비오는 날이면 부침개를 푸지게 부쳐 맛있게 나눠먹고 싶습니다. 조선인님의 페이퍼에서 본 정류장 도서관을 구상하면서 혼자 빙긋 웃기도 하고, 비오는 수요일이면 장미 한다발을 사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도 싶습니다. 이런 에너지들과 상상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요즘은 정말 행복한 일 투성입니다.

 촛불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촛불을 들면서 그 작은 쑥쓰러움과 내게만 향했던 연민과 방어기제들이 한꺼번에 해체되고 물컹해져버렸습니다. 하기 싫은 모든 일들에 '세상이 원래 그래'로 체념하기 전에 원래 그런 세상의 판을 바꾸고싶은 마음. 그 마음 하나 하나가 모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살기좋게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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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20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깨진 유리조각을 주웠던 페스탈로치가 존경스러웠던 건, 날마다 오르내리는 학교 계단의 휴지 조각을 외면하고서야 느꼈답니다. 날마다 새로이 마음을 다지는 건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줍는답니다. 저도 이런 말하기 좀 쑥쓰러워요. ^^

Arch 2008-06-20 11:4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쑥쓰러우면서도 좀 자랑도 하고싶고, 그런거 있죠! 허리 운동도 되고 좀 좋아요.
 

 며칠 전, 가족 모임에 갔다가 아빠께서 내 얘기를 하시는걸 우연찮게 듣게 됐다. 워낙에 과묵하시고 필요할 때 아니면 말씀을 잘 안 하시는 분이라 약주 한잔씩 드셔야 속엣말을 하셨는데 그 날이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사실 내 얘긴 할게 없다. 기껏 대학까지 가르쳐놨더니 몇년째 뭔 준비만 한대고 성격도 이상하고 이쁜 구석도 없으니 뭐 굳이 눈 씻고 찾아보면 아주 티끝만한 장점이 있긴하나 대체로 유해해서 찾아볼 엄두도 안 나실거다. 대체 아빤 무슨 말씀을 하실까.

"우리 큰 딸이 머리는 좋아-모든 부모님들이 갖고 계신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판단- 얘가 조금만 노력해도 뭔가 할텐데. 그래도 지가 하고 싶은거 한대는데 어떡하겠어.-여기서 잠시 한숨. 난 심호흡- .. 그래도 우리 딸이 아빠라면 끔찍히 생각해요."

 그 다음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생각은 이미 '끔찍히'에 사로잡혀 버렸다.

 아빠를 좋아하고 염려하는 맘은 있지만 아빠가 강조한 '끔찍히'란 굉장히 살갑고 찡한 꾸미는 말만큼이나 끔찍하게 아빠를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아빠를 보는 시선은 부모로서보단 인간적인 면으로 바라보는게 다였고 배울 점도 많지만 그만큼 부정적인 부분도 허다하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아빠랑 있는 시간은 즐겁지만 꼬박꼬박 안부 챙길만큼 성실한 딸도 아니고 '아빠'란 정서만으로 맘이 애틋해지는 유아기적 몰입을 투영할만한 나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아빤 왜, 내가 당신을 끔찍히 생각한다고 여기신걸까.

 그 궁금증은 며칠 가다가 오늘 알라딘 서재에서 글을 읽다 모든 부모들은 약간씩 자식들을 과장해서 표현한단 문구를 대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자식을 투영시켜 자신을 대변하는게 아니라 부모란 존재가 원래 그렇다는 것. (아마 마태우스님 서재였던 것 같다.) 그게 사랑이든 집착이든 과시든 남에게 자기 자식이 손가락질 받는걸 싫어하는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그래서 자식에게 허물이 있을수록 반대 급부로 자랑에 열을 올린다고 한다.

 자랑할게 너무 없어 아빤 '끔찍하게'란 표현을 쓰셨고 매번 가족 모임에서 결혼 아니면 직장으로 공격받던 난 그래도 부모한텐 잘하는 말하자면 무능하지만 '애는 착한'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아빠는 술 드실때면 수순처럼 자식 자랑을 하셨고 옆에서 듣고 있던 난 과문한 탓에 아빠가 참 주책이라고 생각했던게 참 오래 전 일 같다. 그때 아빠의 가장 큰 보물은 세딸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아주 조금 공부 잘했던 날 아빤 특별히 조금 더 이뻐하셨다. 물론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열 손가락 중에 난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이었고 애정을 많이 주는만큼 기대하는 것도, 그로인해 내가 받은 부담감도 컸다. 어렸을땐 그게 참 싫어서 아빠가 기대를 하실수록 나는 엇나간다는걸 보여주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 그래봤자 야자 튀고 가끔 심부름 시키실 때 귀먹은체 한게 다였지만. -무능의 정점이로군-

 꿈을 갖고 자식 자랑하시던 아빤 꿈처럼 빛나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자식들을 보시며 술자리에서도 별 말씀을 안 하셨다.- 어쩌면 못하신거겠지. - 날 추스려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겹던 20대엔 관계의 형태가 늘 일관될순 없다고 생각했고 어깨 위에 얹힌 아빠의 무게가 가벼워져 좀 숨쉴만 해졌다며 난 안도했다.

 그리고 오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자식을 옹호하신 아빠 맘이 느껴져 맘 한편이 싸해진다. 그동안 자식들을 속박하지 말라고 아빠에게 볼멘 소릴 내뱉곤 했던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자기 안에서 찾는 행복과 충족감도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받을 시선으로 행여 딸들 맘 다칠까 다 주셔놓고도 당신의 부족으로 자식들이 웃자랄까 염려하는 마음. 깨달음이나 고마움은 한걸음 늦게 찾아온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훈기로 따듯한 분위기가 감도는 날, 얼큰한 취기로 말씀을 꺼내실 아빠가 굳이 최고치의 부사인 '끔찍하게'란 말을 안 쓰시고도 흐뭇하게 딸들 얘기를 하실 모습을 상상해본다.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는 딸들의 면면이 생생하고 예쁘게 취억되는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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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1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부모의 맘이 다 그렇다는 걸 알고, 겪은 나이가 되었어도.....부모님의 그 마음엔 아직 못 미친답니다.ㅜㅜ

웽스북스 2008-06-1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어떻게 자랑할 거리를 찾아내시는 것도 참 대단해요
저도 같은 마음, 여러번 느꼈었어요

Arch 2008-06-2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매번 그런가봐요. 웬디양님/그쵸. 저희 아빠 대단하게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