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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생각해보면, 아무런 연습도 없이 처음부터 온전하게 잘 해낼 수 있었던 일은 어느 것 하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부단히 연습을 해도 쉽지 않은 일들이 태반이었다. 지금은 내가 제대로 의식도 못할 만큼 일상이 되어버린 ‘걸음’만 해도 그렇다. 서툰 걸음마로 세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 가족들의 박수를 받고 방긋 웃었을 어릴 적, 이제는 늘 하는 걸음이지만 그 처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웃음부터 난다. 어설픈 걸음마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운동회 날 달리기에서 1등을 해 손목에 도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다치는 걸 보면 연습해도 완벽해지기란 쉽지 않은가보다. 여기 나와 같이, 툭하면 넘어지고 실수하는 사람들에게 ‘마야 안젤루’ 그녀가 선물을 준다고 한다. 우리 모두를 자신의 딸이라 하며, 그녀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을 들려준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더 넘어지고 다쳐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내가 걸어갈 그 길에 마야 안젤루의 선물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p.9 이 편지를 다 쓰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내가 살아오면서 얻은 교훈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예전부터 네게 꼭 들려주고 싶었단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지 셀 수조차 없다. 그 실수 때문에 쥐구멍이 있으면 거기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조금만 시간을 앞으로 돌려 실수를 없던 일로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운전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차선을 바꾸다가 심하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던 날에는, 내 삶에도 녹화방송이라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찍다가 맘에 안 들면 NG! 하고 외치고 한번 멋쩍게 웃고 다시 찍는 거다. 원하는 모습으로 멋지게 찍으면 ‘컷’소리와 함께 박수 한번 치는 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었다.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좀 만만해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런 날이 있었다. 마야 안젤루 역시 나와 비슷한 날을 보낸 적이 있는 것 같다. 모로코라는 곳에 처음 도착한 날, 낯선 사람이 건넨 커피에 바퀴벌레 네 마리가 들어 있다고 오해한 것이다. 그 후 마야는 어떤 기사를 보고 나서 그것이 바퀴벌레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손님을 대접할 때 공경하는 의미에서 커피 잔에 건포도를 넣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야는 사람들이 먹는 거라면 어떤 음식이건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아 입맛을 다셔가며 열심히 먹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때 마야는 내가 실수했을 때 느꼈던 그 마음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와 확연히 다른 점도 있다. 스물여덟 가지의 주제로 꾸며지는 이 책에, 내가 앞서 말한 마야의 실수담은 열 ‘모로코가 준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평생 잊지 못할 실수를 한 그곳을 마야는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 일이 생각이 나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수를 선물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야의 그런 삶의 자세가 흑인여성으로서 겪었을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해주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p90. 인간의 마음은 워낙 섬세하고 예민해서 겉으로 드러나게 격려해주어야 지쳐 비틀거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워낙 굳세고 튼튼해서 한번 격려를 받으면 분명하고 꾸준하게 그 박동을 계속한다.
실수투성이에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정말 맞는 것인지 늘 고민하고 있어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나를, 조금은 더 사랑해도 좋은 걸까. 마야가 선물로 준 ‘용기’를 가지고 내게 다가올 일들에 도전해도 좋은 걸까. 쉽지 않은 일들에, 반복되는 실수에 좌절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봐도 좋은 걸까. 가끔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것인지, 혹시 잘못 든 것은 아닌지 불안할 때가 있다. 수없이 실수하는 일에는 ‘나하곤 맞지 않는가봐’하고 포기하고 싶어 질 때도 있다. 그런 나에게 마야는 누구나 다 그렇다고 어서 일어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부디 일어나서 가던 길을 가라고.
p.109 그래도, 여기, 우리가 있다. 계속 여기 있다. 어떻게든 당신에게 힘이 되고픈 가슴을 안고.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추운 겨울동안에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왔다. ―아니 어쩌면 봄이 보내는 조그만 소리에 ‘아, 봄이 오긴 오려나보다’하고 생각하며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봄이면 언제나 찾아오던 새들이 어김없이 돌아왔다. 어김없이 꽃들은 피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던 추운 겨울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그렇게 봄은 왔다. 겨울이 봄이 되었듯이, 실수가 선물이 되었듯이, 내가 나를 믿으면 더 나은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마야 안젤루가 나에게 주는 선물은 이것이 아닐까.
p15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하게 만드는 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