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엔 둘이서 청주를 한 다섯 홉쯤 마셨다. 술값은 선생님이 치렀다. 다음에 같은 집에서 만나 마셨을 때는 내가 계산을 했다. 세 번째부터는 계산서도 각각, 돈을 내는 것도 각자 하게 되었다. 그후 이 방법이 이어지고 있다. 만남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은 선생님이나 나나 그런 기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주의 취향뿐 아니라 타인과 거리를 두는 법도 닮아 있다. 나이는 삼십 년도 넘게 차이 나지만, 동갑내기 친구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10쪽
분노라는 것은 미묘하게 쌓이고, 작은 파도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는 것처럼, 그렇게 쌓인 분노가 살면서 뜻밖의 장소에서 터질지도 모르는 거지요. 결혼 생활이란 그런 거죠, 그럼요.-69쪽
짐을 챙겨 왔던 길을 돌아갔다. 걷고 있는 동안에 웃고 싶어졌다가 울고 싶어졌다가 했다. 취기 탓인지도 모른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취기 탓이겠지. 사토루 상과 도오루 상이 똑같은 등을 보이며 똑같은 걸음걸이로 앞서 가고 있다. 선생님과 나는 나란히 서서 함께 웃고 있다. 선생님, 도망간 사모님을 지금도 사랑하세요? 내가 중얼거리자 선생님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아내는 지금도 내게는 알 수 없는 존재지요, 하고 선생님은 약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나서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나게 많은 생물들이 내 옆에 있고 모두들 붕붕거린다. 어째서 이런 곳을 걷고 있는 걸까, 전혀 알 수가 없다. -78쪽
다카시를 만날 때면 언제나 나는 ‘어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 나이와 그에 걸맞는 언동, 다카시의 시간은 균등하게 흘렀고, 몸도 마음도 균등하게 성장했다. 나? 나는 아마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거꾸로 어른스럽지 못하게 되어 갔다. 더욱더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어린애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 시간과 사이좋게 갈 수 없는 체질인지도 모른다. -151쪽
선생님의 의향에 신경 쓰는 일 따위는 이제 그만둔 것이다. 들러붙지도, 떨어지지도 않는다. 신사답게, 숙녀답게 담백한 교제를.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담백하게, 오랫동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리 내가 다가가려 해도 선생님은 다가가게 해주지 않는다. 공기로 된 벽이 있는 것 같다. 얼핏 보기에 부드럽고 거칠 것이 없건만, 압축되면 그 무엇이든 퉁겨내 버리고 마는 공기의 벽.-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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