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쯤 장거리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나의 이상형이었고, 내게 너무 완벽한 남자였다.
항상 내게 예쁜 말들을 해 주었었는데
그 중 최고는 아직 사귀기 전 함께 밤길을 산책하다가 불쑥 안길래
엉거주춤하게 안겨서는 어떻게든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으려고 그의 등을 토닥이는 내게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요' 라고 말 한 것이었다.
너를 너무 안고 싶어도 아니고, 니가 좋아도 아닌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는 남자.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 얼마 동안은 말 그대로 구름 위의 산책이었다.
그는 늘 내 두 다리를 땅에 붙어있지 않게 했고
그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것들은 페이드 아웃 되게 했다.
하지만 그의 달콤한 말들은 점점 힘을 잃었다.
자주 들어 익숙해져서가 아니라
그냥 말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닭살스런 말도 잘 못하는데다 애교마저 없는 나는
처음에는 그의 달콤한 말들이 너무 좋았지만
보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하면서도
그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늘 움직이는 것은 나였고
늘 진짜로 보고싶어 하는 사람은 나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그 였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였다.
왜냐면 사랑은 말로 하는게 아닌 행동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는 미국으로 촬영차 출장을 가게 되었다.
한 달 일정의 비교적 긴 화보 작업이었다.
해외로밍을 했었는지 어쨌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튼 그 한 달 동안 전화한통 없었다.
나도 바쁜사람에게 전화하면 괜히 일에 방해가 될까봐
그냥 가만히 기다렸었다.
그가 한국에 온다고 연락이 올때까지.
한 달이 넘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했다.
그는 한국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내가 왜 도착했는데 연락하지 않았냐고 하자
그는 바빴다고 했다.
그래, 바빴겠지. 그랬겠지.
하지만.
여자 친구에게 전화 한 통 할 시간도 없었을까?
나는 그를 보기 위해 휴가를 앞으로 땡기느라 회사에서 온갖 눈치를 보고
가서도 늘 피곤하다는 그 때문에 데이트 같은 데이트를 한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났다.
순간. 나는 느꼈다.
사랑이 끝난게 아니라
사랑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 혼자 그를 사랑했고, 그를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달콤한 말을 잘 하는 남자였다.
명색이 포토그래퍼였으면서 내 사진 한 장 찍어주지 않았고
전화를 하면 모델들과 술을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왜 몰랐을까?
그렇게 명확하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달콤한 말에, 예쁜 말에 나는 그만 눈을 감고 생각을 멈췄던 것이다.
오직 귀 하나만 열어둔 채.
헤어지고 난 다음 오래 슬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이 출장을 간 모델과 그렇고 그런 섬씽이 있었다는 말을 전해들으니
정말이지 쫒아가서 한 대 패 주고 싶었다.
니가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내 사랑을 우습게 볼 권리까지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있었다.
그와 밤새 통화하느라 엄청나게 청구된 핸드폰 영수증을 보면서
그리고 빨리 오라는 재촉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느라 끊은 티켓들을 보면서
내가 어리석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말 없는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는 말 뿐인 남자이다.
말로는 하늘에 별도 달도 다 따다줄 것 같지만
막상 실제로는 사과 한알 따 주지 않는 사람.
그 후 나는 말이 많은 남자. 말을 예쁘게 하는 남자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입에 곰팡내나게 말 없는 남자를 좋아하진 않지만
적어도 말만 하는 남자는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이후 나의 연애는
줄곧 이런 식이었다.
'말 좀 해. 그러다 말 잃어버리겠다'
그래도 나는 그 말 뿐인 남자 보다 말 없는 그들이 좋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