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성장 소설을 싫어한다. 이미 충분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읽을필요 없음 때문은 아니고  다만 그냥 특유의 분위기 같은게 싫었다. 다 잘될거야. 뭐든 열심히 하면 되는거야 하는 뜬구름잡는 낙관적 파이팅.  넌 아직 어려서 그렇지 언젠가는 더 힘든 어른이 되어야만 하니 지금은 그냥 좀 참으렴 같은 훈계인지 협박인지 모를 미묘한 경계선의 어딘가쯤에 걸쳐있는 내용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애들은 창조한 인물이 어른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겠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애 어른 같은 애들 (그러나 겉으로는 문제아) 이 한결같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껏 앞으로 나아간척, 그래서 '어때? 니들이 보기엔 꼰대에 불과한 어른인 내가 제법 니네 마음을 잘 알지 않니?' 하고 과시하는 듯한 허무심드렁주의적으로 나가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호밀밭의 파수꾼도 싫었고 완득이도 그저 그랬다.   

그런 내가 이 소설을 집어들게 된 것은 순전히 불면증 때문이다. 의사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언제부턴가 수면제를 보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차라리 잠을 못자면 못잤지 쌩으로 버텨보자 싶어 며칠째 근간에 보기 드물게 책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구입했거나 혹은 읽고 싶었던 모든 책이 똑 떨어졌고 그때에 마침 협찬을 받은 이 책 한권만 남았다. 보자마자 생각했다. 완득이 작가? 오...성장 소설로 또 상을 타셨어? 정말 성장소설 좋아하시나보다. 이 생각은 적어도 프롤로그를 읽을 때 까지는 그랬다.   

내가 생각하기에 첫 장이 재미없는 책은 끝까지 재미없을 확률이 거의 95%이다. 왜냐면 쓰는 작가도 초장에 독자들을 휘어잡아야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썼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없다는 것은 그 책이 원래 재미없는 책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다섯 페이지 정도 넘겨도 더 이상 재미가 없을때는 과감하게 그 책을 접어버린다. 내가 그렇게 재미없는 책을 붙들고 씨름하기에는 세상에 재미진 책들이 너무 많으니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저드 베이커리는 꽤 많이 봐준 셈이다. 약 14페이지 정도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작가. 이 책 왜 썼을까? 그게 너무 궁금해서 책의 뒷날개를 봤다. 그런데 거기에 적힌 이 책의 리뷰가 심상찮았다. 약콩이 익는 동안인지 끓는 동안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잘 안나는 소설가 권여선의 리뷰는 같은 동종업 종사자끼리의 상부상조 정도로 본다 하더라도 김지운 감독의 리뷰는 심상치 않았다. 내가 뭐 딱히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 사람은 부탁이나 인맥을 이유로 이런 리뷰를 써 주지는 않을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끝까지 재미 없으면 권여선과 김지운과 방은진까지 싸잡아 미워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 책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면서 '그래 우리도 헤리포터 못잖은 우리만의 독창적인 마법 판타지 소설을 구축해낸거야' 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거야말로 소설판 인생극장 (기억하는지 모르겠다만 빠밤빰 빠밤빰 하는 음악과 함께 이휘재와 이문세가 나왔던) 인거지' 하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뭣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성장 소설이 아니라고. 뭐 성장기 청소년이 본다고 딱히 유해할 소설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들만의 책으로 묶어두기에는 우리에게도 해당사항이 너무 많은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물론 주인공은 성장 소설답게 16살이다. 거기다 그 아이가 위저드 베이커리와 관련해서 겪는 일은 일면 유치하기도 하다. (이 나이쯤 되어서 아직까지 마법같은게 먹힌다면 순수한 인간으로 살 수 있었음을 신께 경배와 찬양으로 감사드리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외의 일들은 우리와 너무 가까이 닮아있다. 우리의 가장 추악한 부분들 어쩌면 그럴듯하고 고급스러운 어법들로 포장한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그 수많은 잘못들과 너무 닮아있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뜬금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이미 잊었고 극복했다고 믿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위저드 베이커리 점장에게 짠한 연민을 갖지만 외려 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더 갖게 되었다. 인간들이 이렇게나 못났음에 또 이렇게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존재들이라는 것에 대해.  

책의 끝 부분은 마치 인터렉티브 영화처럼 독자에게 두 가지 결과를 선물한다. 어떤게 디렉터 컷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 결과는 참 많이 닮아있다. 마치 영화 나비효과처럼 어떤 선택을 하건간에 그 큰 맥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물론 후자는 희망을 얘기하고 있긴 하지만 글쎄다. 적어도 낮부끄럽고 손발 오그라드는 희망은 아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권의 책을 집어들고 밤을 새서 다 읽어본 것이 말이다. 대게는 아무리 재미있어도 읽는동안 딴짓이 하고 싶어지는데 이 책 만큼은 적어도 그 정도의 힘은 충분하게 갖고 있다. 다만 프롤로그에서 '뭐야 이건?' 하고 생각하며 던지지 않고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말이다.

끝으로 이건 진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성장소설은 뭘로 분류를 하는걸까? 주인공의 나이가 만18세 미만이면 성장소설인가? 나는 어째서 이 책이 성장소설이라는 장르속의 장르. 액자 속의 액자에 갖혀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더 궁금한것은 작가가 이 모든 것을 상상했다면 그는 괴물일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토록이나 리얼하고 디테일하게 현실의 공포를 조근조근 나열할 수 있다면 분명 그렇다. (오히려 마법사의 부분에 대한 상상력은 그저 그랬다. 차라리 작가가 그려낸 주인공의 현실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나비 (온다리쿠) - 딱 내 입맛이다. 너무 재밌다. 온다리쿠의 글은 여성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서 좋고 뭣보다 이름이 요상하면서도 귀여운 일본 여류 작가들의 되도않은 책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좋다. 

2. 탱고 (구혜선) - 그냥 금잔디일때는 귀엽고 좋았는데... 그녀의 글 쓰기는 뭐랄까 너무 멋지려고 애를 썼다. 아직 어린데 비해 너무 많은걸 담으려고 또 너무 멋있으려 애썼다. 애어른의 심각하면서 지루하게 긴 일기장을 보는 기분이다. 암튼 난 애어른은 싫더라. 나처럼 어른임에도 철딱서니 없는것들은 대략 그러하리라.

3. 그래도 언니는 간다 (김현진) - 제목을 바꾸었으면 좋았을것을..그랬다면 할랑한 마음으로 읽다가 끝내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다가 외면하는 기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을... (언니. 이 제목 마음에 드는데 이런 가벼운 제목은 나같이 널널하고 헐렁한 인간에게 좀 넘기는게 어때요?) 

4. 축하해 (박금선) - 이런 책은 정말이지 파울로 코엘료 같은 인간이 읽어야 한다. 그래야 11분처럼 재미삼아 창녀가 되어 살아보니 허벌나게 유쾌해요 같은 말도 안되는 글을 안쓰지. 미실 작가도 좀 읽었으면 싶고 아무튼 세상에서 몸 파는 직업을, 직접 팔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뭔가 대단히 괜찮고 멋있고 고뇌에 가득찬 직업(?) 으로 상상해대고는 가볍게 휘갈기는 모든 작가들이 필히 읽어야 할 책.  

5.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 의외의 통쾌함. 그리고 노인도 머리에 피도 안마른 인간도 평화로이 맞담배를 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정신병원이라는 것에 매우 공감. 재밌게 잘 쓴 책. 그리고 그만큼 노력했구나 하는것이 돋보이는 책.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보다 이 책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6. 박쥐 (박찬욱 외) -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었을때 원작이 낫구나 아니다 영화가 낫다의 평 이외에 이 책 괜찮구나 하는 평을 처음 내리게 한 책. 영화와는 완전 별개로 보인다.  

7.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학 (빌 브라이슨) - 한동안 빌빌대던 빌 브라이슨의 화려한 복귀. 그러나 알고보니 애팔레치아 트레이킹을 할 당시와 거의 맞물리는 시기에 쓴 글. 역시 이 작가도 너무 많이 퍼내서 시간이 지나고 나니 재기발랄함이고 뭐고 짜증만 남은건가? 아무튼 이 책은 나를 부르는 숲 이후로 최고다. 

8. 더 리더 (베른하르트 슐링크) - 뭐 이 영화 좋다는 사람들 많던데 난 아직 못봤다. 그런데 책으로 만났을때는 그렇게까지 환장할 매력 같은건 느끼지 못했다. 그럭저럭 읽을만은 했지만 온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정도의 베스트셀러로 평가받는 이유는 글쎄다..잘.. 

9. 악인 (요시다 슈이치) - 나는 일본 작가들을 딱 세명만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온다리쿠,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 이유는 깊이는 없이 뭐든 쿨해 죽겠고 뭐든 가벼워 죽겠고 심드렁해 죽겠는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글을 쓰는 이들이라서. 이 책 역시 절대 쿨하지도 가볍지도 심드렁하지도 않다. 마치 소년의 일어 말투같은 그 글들 정말 너무 싫다.  

10. 대한민국 사용 후기 (J스콧 버거슨) - 음... 화나는거 알겠고 짜증스러운 건 알겠는데 이건 순전히 화내고 짜증 내려고 쓴 것 같다. 그렇게 지랄같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란 나라 쫌 귀엽지 않냐고 말하라고 하고 싶은게 아니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뭐같이 짜증만 낼 거라면 책을 왜 썼는지 모르겠다. 새댁 요코짱 같지 않다고 욕하는게 아니다. 이쯤되면 짜증에 한가락하는 나 조차도 너무 짜증나서 책을 읽다가 확 집어던지고 싶어지니 그게 문제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9-06-1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 브라이슨 책 제목과 표지와 괴상망측한 번역이라니, 지못미.(이 작가, 한 번도 제대로 된 번역자를 못만났다죠)

더 리더는 뱀처럼 유연하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소설. 한 발짝만 더 떼어내면 음란해질까, 싶은데 그렇지 않고 또 한 발짝만 나가지 않았더라면 `우린 어쩔 수 없었소'인데 그러질 않았고. '그러면 내가 지멘스에서 일하지 말았어야 했단 말인가?'이 한마디를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 절 또다시 절필을...(뒷이야기-원래 주인공을 니콜 키드먼이 할 뻔 했다지요)

플라시보 2009-06-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빌 브라이슨이 원래 영어로 얼마나 잘 썼는지를 몰라서 번역이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구요. (흐흐. 이 무식함) 제목은.. 언제나 빌 브라이슨은 그랬던것 같아요. 툭하면 발칙하죠. 이젠 발칙하다 표현하기에는 너무 많은 책을 썼고 너무 많이 유명해졌고 나이도 꽤 되는데 말입니다.

더 리더는 니콜 키드만이 할뻔 했다구요? 니콜이 아름답다는건 백번 인정하지만 주인공 한나와 너무 어울리지 않아요. 한나는 좀 강인해 보이는 이미지의 여성이 어울려요. (즉 떡대가 좀 있어야...)주인공 선택 잘 한것 같아요. (근데 영화를 안봐서 잘 모르겠네요.)
 

 나는 기계치다. 따라서 기계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허나 그러면서도 세탁기, 냉장고, 컴퓨터, 식기세척기, 에어컨, 핸드폰, 무선전화기, 로봇청소기, 오디오 등등 수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다달이 월세를 내는 셋방에서 전세로의 탈출을 그토록 꿈꿨던 것은 제발이지 저것들을 모조리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면서 사용설명서를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사에 드는 비용보다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사용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자괴감이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철저한 준비 끝에 절대 헤매지 않으려 저 기계들이 멀쩡하게 움직이거나 돌아가는데 필요한 한 다발의 선들을 용도별로 따로 담고 표시까지 해 두었지만 결국은 이사 전에는 딱 맞아 떨어졌던 선들이 한 움큼이나 남아서 ‘대체 어떤걸 연결 안한 거야’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이런 때에 사용 설명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이나 사용 설명서를 들고 씨름을 한 끝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용 설명서는 기계를 만든 이들이 자신들이 만든 기계가 얼마나 복잡하고도 위대한 것인지 (더불어 그걸 만든 자신은 얼마나 더 위대한지)를 무지몽매한 인간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안내서라는 것을 말이다. 갖은 복잡한 말과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로 쓰인 그 안내서를 보고 있노라면 아마 누구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안내서로는 절대 그 기계의 작동을 도모할만한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사를 한다면 저 기계들을 다시 조립하려고 애 쓰는 게 아니라 이참에 싹 바꾸어서 소비의 미덕을 실천하는 동시에 기계 설치는 구입처의 엔지니어들이 와서 사용설명서 따위는 절대 펴보지 않고 척척 연결하는 기인열전이나 관람하는 게 백번 옳은 일이다.

언젠가 이 고민을 당시 공대를 전공한 남자친구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돌이들이 문장력이 좀 부족하지’

문장력? 문장력이라고? 누가 사용설명서에서 괴테나 헤르만헤세를 만나기를 기대했나? 그도 아니면 하루키의 시니컬함과 빌 브라이슨의 위트를 기대했단 말인가. 나는 그저 사용 설명서 그 본연의 의미대로 기계를 사용함에 있어 도움을 받고자 했을 뿐이다. 사용 설명서를 만든 엔지니어들이야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용어도 설마 그걸 만드는 일 보다 더 복잡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 기계를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원을 꽂고 약간의 조립 끝에 사용을 하라는 건데 뭘 못 알아듣는다고. 근데 그게 우리 같은 일반인 (어쩌면 일반인에서 좀 모자라는 나 같은 인간) 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사용설명서 같은 건 되도록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나처럼 사용 설명서 기피증 환자를 위해 사용 설명서를 요약해놓은 초 간단 사용 설명서(?)가 존재한다. 드디어 그들도 고급 사용자 (즉 사용 설명서를 모두 이해함은 물론이고 거기에 간단한 응용까지 가능한 천재들) 와 저급 사용자 (사용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하란대로 다 했는데도 기계는 전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기적으로 사용 설명서를 들고 씨름을 해야 하는 경우에 종종 놓이곤 한다. 그건 바로 핸드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초우량 IT강국이 아닌가. 유치원 별님반인 내 조카도, 틀니를 해야 하고 돋보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 보는 우리 할머니조차 핸드폰을 갖고 있으니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닌) 핸드폰 보급률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이제 집 전화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핸드폰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핸드폰이 점점 진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용 설명서에 관한 이해력 저하로 되도록 기계는 한번 사면 다시 그 어려운 사용 설명서를 펼 일이 없도록 폐기처분하기 직전까지 사용하곤 하는데 핸드폰만큼은 그게 어려웠다. 이 기계는 정기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해 줘야만 한다. 내가 최근에 핸드폰을 바꾼 이유는 남들이 자꾸만 내게 80바이트가 넘는 문자나 이미지 전송 따위를 해대기 때문이었다. 내 핸드폰은 워낙 구형인지라 80바이트 이상의 문자가 도착하면 ‘멀티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라고 알려 줄 뿐. 그 멀티 메일의 내용은 결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미지 전송 따위는 당연히 안 될 밖에. 그래서 별 수 없이 핸드폰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맙소사 사용 설명서가 무려 173 페이지나 된다. 얼마 전 책을 내려고 원고를 보냈더니 출판사에서 350페이지나 된다며 300페이지 정도로 줄이기를 원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173페이지라니. 대체 이 작은 핸드폰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내가 숙지해야 할, 혹은 읽어도 모를 용어들이 얼마나 산재해있을 것인지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첫 페이지부터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주요 부분을 정리하기 위한 노트와 더 중요한 부분을 표기하기 위한 형광펜을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일단 내 핸드폰의 사용설명서는 간단하고도 형식적인 환영 인사 (우리 핸드폰의 질 높은 서비스를 만나게 되었으니 영광인줄 알아 이것들아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나서 바로 협박을 시작했다. 자기네 회사에서 공급된 휴대폰의 ESN을 제거, 변경 혹은 다른 번호의 복제 입력은 불법 행위로서 관련법규 형법 제 347조에 의거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는 처벌대상이 됨을 유의함과 동시에 이러한 불법적인 시도로 인해 휴대폰의 소프트웨어가 손상되어 더 이상 쓰게 되지 못할 경우 그건 전적으로 소비자 니 책임 이라는 얘기였다. 오... 그러니까 이 휴대폰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최고 10년 동안 감방에 갇히거나 내 통장 잔액보다 훨씬 더 많은 2천만 원의 벌금을 낼 수도 있단 말이지? 허나 다행인 것은 나는 ESN이 뭔지도 모르니 그걸 제거하거나 변경 혹은 복제 입력 따위는 절대 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로서 내가 이 핸드폰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2천만 땡겨 달라거나 사식을 부탁할 염려는 덜었다.

그 다음 장에도 협박은 계속되었다. 핸드폰을 남에게 함부로 빌려주지 말라던가 혹은 자기네 회사 이외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했을 경우 고장이 나건 폭발을 하건 휴대폰이 트랜스포머처럼 살인 기계로 변신을 하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말과 함께 빨간색으로 ‘사용자 안내문 - 제작자 및 설치자는 당해 무선설비가 전파혼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명안전과 관련된 서비스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데 이건 아직까지도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서 심폐 소생술을 할 때 주먹 대신 핸드폰으로 심장을 치지 말라는 소린지 아니면 누군가가 내 핸드폰으로 무인도에 갇혔다며 살려달라고 말할 때 전파혼신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건 헛소리로 간주하고 무시하란 얘기인지 도무지 접수가 안 된다. 그리고 이 사용설명서를 읽다가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건설현장, 군사지역, 주유소, 가스누출 위험지역, 화학 약품 보관소 배의 갑판 등에서는 모두 휴대폰을 사용하지 말란다. 나는 오직 비행기 안이나 병원에서나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놈의 나라는 연말만 되면 온 도로가 다 공사중인데 그때는 거의 핸드폰은 무용지물이 되겠군) 이런 협박들을 거치고 나면 비로소 구성품 확인하기. 즉 내가 산 휴대폰을 누군가 미리 뜯어서 베터리등을 슬쩍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페이지가 나온다. 그 다음은 휴대폰에 딸린 명칭들이다. 보니 총 16개이다. 전화번호도 3개 이상 못 외우는 인간에게 16개의 휴대폰 각 부분의 명칭들이라니. 근데 이건 약과다. 아직 시작도 안했다. 그 후에 이어지는 내부 버튼 설명은 무려 12개이고 측면 버튼 설명은 3개이다. 거기다 터치 버튼 사용법이 5개이다. 대체 언제 끝이 나나 싶어 목차를 보니 168개이다. 173페이지에 168개의 목차라. 아마 이걸 돈 주고 팔았다면 초판 1쇄도 다 못 팔았을 게 뻔하다. 

문득 이 핸드폰보다 조금 더 간단한 기계들의 사용 설명서가 몇 페이지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사용 설명서들만 잔뜩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서 핸드폰보다 더 사용이 간단한 기계들의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냥 켜면 뉴스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줄 알았던 TV가 무려 40페이지 (사용자를 더욱 헤깔리게 하기 위해 이건 페이지 순서가 1,2 이런 식이 아닌 1-2 1-3 으로 표기되어 있다.) 토스터기는 무려 83페이지 (빵 하나 굽는데 저 정도의 사용 설명서를 독파해야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밥솥은 24페이지다. (내 밥솥은 아마도 갈비 굽기 모드나 잡채 만들기 등도 되는 모양이다. 아니고선 끽해야 밥 하나 가지고 24페이지씩이나 설명할 리가 없다.)

그 중 하나를 골라 펼쳐 보았다. 내가 가진 에어컨의 사용 설명서 25 페이지에서는 열대야 숙면운전 작동순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열대야 버튼을 눌러 열대야숙면운전을 선택하세요. 입면모드-숙면모드-기상모드 순서로 3단계 냉방운전이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3단계 냉방운전의 순서는 열대야숙면운전 선택 시 3단계 온도와 바람의 변화에서 보다 자세하게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난 에어컨을 단 이후로 열대야 숙면운전 모드 따위는 한 번도 사용 해 본적이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말이다. 나 같은 인간들 몇 명과 공학박사, 문학박사, 엔지니어 및 인류학자 몇 명이 모여 사용설명서 사용법 같은걸 만들면 어떨까? 사용설명서를 위한 백과사전이라던가 사용설명서 사용법 100일 완성 같은 책을 내면 좀 팔릴 것 같은데...아니면 안철수 연구소 같은 곳과 손을 잡고 사용설명서 사용법 자동 해석 프로그램 같은걸 개발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세상에 나같은 어리버리한 인간들이 넘쳐흐른다고 가정하면 아마 남은 평생 나는 돈방석에 앉아서 사용 설명서 전용 메이드 같은걸 두고 살 수도 있겠지.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세상에 더 이상 복잡한 기계 같은 건 나오지도 말고 필요하지도 말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떠안고 있는 사용설명서의 해석 및 적용에만도 남은 평생을 다 써야 할 지경인데 여기다 더 새로운 것이 추가된다면 난 아마 평생 사용설명서를 해석하느라 정작 그 기계는 사용조차도 못 해보고 내 인생을 종쳐야 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자 그러면 나는 이만 173 페이지에 목차만 168개에 달하는 내 핸드폰 사용 설명서나 읽어야겠다. 어찌 되었건 이걸로 멀티메일이라는 것도 보내거나 받아보고 무려 카메라도 달려 있으니 못난 얼굴이나마 한번 찍어봐야 쓰지 않겠는가? (근데 아뿔싸. 내가 기존에 쓰던 핸드폰과 다른 메이커의 핸드폰이라 멀티메일은 고사하고 한글 찍는 법도 모르겠다. 당분간 80바이트 이상의 문자를 보낼 일은 절대 없을 것 같다.) 

 

 

* 이 글은 새로 연재를 시작한 글입니다. 아마 타이틀은 불만제곱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소 불만이 많은 인간인지라 1년정도 소재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했었는데 벌써부터 다음주에 뭘 마감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9-06-1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사용설명서가 100페이지가 넘어가면서부터 할수없이 하드웨서 사용설명서와 소프트웨어 사용설명서를 분책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어느 쪽을 봐야 자기가 원하는 내용이 있는지 헷갈려 하길래, 2장짜리 초간단 매뉴얼을 새로 만들었구요, 그 중에서도 가장 문의가 많은 기능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는 1장짜리 매뉴얼을 새로 또 만들었지요. 즉 매뉴얼의 매뉴얼의 매뉴얼이 만들어진 셈이죠.
그런데도 여전히 사용법 설명 AS가 줄어들지 않아 결국 새로운 선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에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 하는 기능이나, 조작이 어렵다고 사용하지 않는 기능을 하나씩 하나씩 없애가는 중입니다 -.-V

플라시보 2009-06-19 15:26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음..이런 계통에서 일하시나봐요^^ 아..우린 왜 그렇게 사용 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사용 잘 하라고 어서 사용해보라고 만든 책인데 그걸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죽기 전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니. 하긴 맨 끝장을 보면 '이건 고장 아니여요' 하는 란이 있는데 그건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안그럼 매번 A/S 센터에 전화했을듯.^^ 그나저나 설명서 만드는 입장에서도 애로사항이 많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어려워하니까.. 일단 기계 설명이나 사용은 말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흐흐.

1sosh 2009-06-19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휴대폰 바꿀때마다 그날 하루는 최소한 메뉴얼 보면서 기능공부를 하고했죠 ㅋㅋㅋ
기계들중에서 그중에 휴대폰종족들은 날마다 새로운 모델들이 나오고 가격들은 점점더 제자리인 월급봉투와 이제 별 차이를 못느끼고 뭐 그럽디다 ㅋㅋ
작가님 휴대폰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시는거죠?? ㅋㅋ 축하?드립니다^^
불만제곱 ㅎㅎㅎㅎㅎ

플라시보 2009-06-19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g Oxy님. 흐흐. 그래서 좀처럼 휴대폰을 안바꾸죠. 가격도 뭐랄까 너무 터무니없이 비싸더라구요. 정말인지는 모르겠는데 휴대폰 파는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요즘은 휴대폰 튼튼하게 안만든다고. 왜냐면 주기가 2년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한 4년 정도 고장 안나게 만든다나요? 더 이상 튼튼해봤자 사람들은 분명 2년 안에 갈아치운다고.. 정말 휴대폰처럼 사람들이 끝도 없이 갈아치우는 기계도 없을겁니다.
불만 제곱은 제가 그냥 지은 이름인데 그냥 갈지 아니면 그쪽에서 바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 나름 귀엽다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흐흐.
 

연예인들에게는 이른바 굴욕 사진이란 게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걸 지못미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지못미의 뜻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란다. 나는 요즘 들어 정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한때 나의 영웅이었고 내 정신의 일부분이었으며, 팍팍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 수 밖에 없도록 내버려 두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예능 늦둥이라는 소리를 듣고, 화려했던 과거를 조롱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론 세상이 변했고, 또 대세를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은 그걸 원했을까? 혹시 밥벌이라는 절박함 앞에 마지못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웃기는 사람으로 소모되다가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노래를 부른다 해도 아무도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걸 택했다. 우리가 다운로드 받아서 음악을 듣고, 앨범을 사는 대신 홈피에 배경 음악 정도로나 그들의 음악을 소모하는 동안.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미사리에서 추억의 콘서트를 하거나 아니면 TV에 나와 제 스스로 망가지는 길 뿐이다. 오히려 과거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은 요모양 요꼴 이라는 식의 웃음은 더 커진다. 이제 우리에게 그저 노래만 잘 부르는 사람 혹은 음악을 잘 만드는 사람 같은 건 더 이상 필요치 않은지도 모른다.

요즘 잘 나가는 가수들은 가수로 인기가 조금 오르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개그맨 뺨치는 입담을 과시하거나 아니면 TV 드라마에서 연기를 한다. 어쩌면 그들은 노래를 하고 싶어서가 아닌, 단지 연예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TV에만 나올 수 있다면 자신이 무엇으로 소모되던, 어떤 종목으로 어필하건 상관이 없는지도.

허나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우리가 사랑했던 그들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재주밖에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말로 음악을 하고 싶어서 음악을 택했고, 아마 가능하다면 평생 음악을 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보라. 그들 중 누가 처음처럼 음악을 지금까지도 하며 사는지를.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무대도, 또 노래만 부르며 살 수 있는 수입원도 보장되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자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랬어야 했다. 우리가 적어도 그들의 음악을 사랑했다면, 그들에게 그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제공했어야 했다. 음반을 사건 콘서트 장에 가건. 그들이 만든 작품을 즐기는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음악은 다운받으면 그만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새로운 노래를 가지고 나오면 그 음악에 관한 얘기가 아닌.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십에만 더 귀를 기울였었다. 어쩌면 이제 그들은 그런 우리들에게 진절머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피땀을, 재능을 공짜로만 즐기려는 우리들에게 나는 그들이 여전히 우리를 팬으로 생각하는지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이는 형태로 된 것들에게는 대가를 지불한다. 하지만 음악이나 영화 혹은 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그런 대가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들을 직업인의 차원으로만 봐도 일반인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 있어야 먹고 살 텐데, 그건 그냥 그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저 그가 TV에 나와 웃겨주기를. 숨겨진 과거에 대한 폭로에 가까운 얘기들을 해 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무엇인가. 그들을 음악인 혹은 예술인으로 불러 줄 수 있을까?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사지에 몰려 마지못한 발악인데 우리는 그걸 보며 비웃고 있다. 과거에는 그렇게나 잘난 척 콧대를 세우더니 너도 별 수 없이 물벼락을 맞고 복불복을 해야 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단지 얼굴이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과거를 웃음거리로 팔아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물론 그런 얘기들도 존재한다. 그들이 안일했다고, 이렇게 불황이 오기 전에 그들 스스로 각성을 해서 조금이라도 준비를 해야 했었다고. 일면 맞는 얘기들이다. 그들 중 분명 자신이 새운 왕국의 찬란함에 눈이 멀어서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왜 그런 그들을 고소해하는가. 직장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된 사람에게는 아무도 그러지 않으면서 우리는 유독 그들에게만 가혹하다. 그들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한낮 오락거리이다. 그들에게는 청춘을 바친 인생의 한 부분이건 말건.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음악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결혼 생활이 어떻고, 그때 사귄 여자 친구 중에서 연예인이 몇 명이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혹여 음악 얘기라도 하면 아직도 그때의 꿈을 깨지 못한 바보 취급을 하면서, 그 질김을 비웃는다. 나는 누군가의 꿈을 그리고 한때의 시간들을 이토록이나 철저하게 만인들에게 농락당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소위 얼굴이 팔린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게 당연해져버리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지금.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들의 음악에 그렇게나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그들의 음악으로 인해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서.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런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아니 적어도 원하지 않는 곳에 나와서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의 삶을 지탱시킬 힘조차 실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간혹 TV에 나오면 나는 우울해진다.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내 자신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도 전부 다 아프다.

그런 날이 다시 올까? 그들이 다시 음악으로 우리에게 얘기를 들려주고, 우리가 그 얘기들에 감동하는. 손톱만한 MP3로 다운받지 않은. 그들이 열심히 만든 곡들로 채워진 CD를 모두 사서 듣고. 그래서 그들이 제대로 된 음악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리그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

멀티 플레이어 혹은 팔방미인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아래 그들이 마치 국영수도 체육도 미술도 다 잘해야 하는 우리의 불쌍한 아이들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적어도 원치 않는 자들에게는 그저 잘 하는 것만이라도 열심히 제대로 하면서 살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 이 글은 제가 연재하고 있는 곳에 썼던 원고입니다.  

 

요즘 윤종신이라는 가수가 무척 잘 나가는것 같더라구요. 쇼오락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을 하는건 물론이고 꽤 인기있는 시트콤 드라마에서도 비중있는 역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가 한물 간 가수 컨셉을 취하고 있는 그 시트콤에서 결국 돈 때문에 트로트를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요.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그랬습니다. 윤종신이 했던 발라드가 위이며 트로트가 아래라는 얘기가 아니라 돈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얼굴을 숨겨가면서 창피해하면서 하다가 그것이 대박이 나니까 반짝이 옷을 입고 출연을 하는 것으로 나오니까요. 결국 가수 자신도 음악은 돈이고 따라서 돈 되면 창피할 것도 부끄러울것도 (원래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없다고 생각하는게 너무 이상하더라구요. 그럼 여태 그가 발라드를 했던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이었을까요? 음악을 사랑한 순간은 없었던것일까요? 교복을 벗고로 시작되던 그 많은 노래들은 전부 그에게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에 소중한 노래였던 것이겠죠. 그런데 이제 그것들로 더이상 돈벌이가 되질 않으니 예전 영광을 못 잊고 맨날 '나 연예인이야' 하는 철딱서니 없는 인물로 등장해서 과거를 팔아먹는 것이겠지요. 물론 제가 윤종신이라는 가수에게 생활비를 보내줄것도 아니고 그에게 음반을 내어줄 수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먹고 사는지는 그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과거를 희화시키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했던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말입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드 2009-06-1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김태원 생각 났더랬는데,
윤종신은 뭐, 회발언(여자는 회와 같아서 신선할때 잡아야 한다) 이후, 만정이 떨어졌어요. 학창시절 좋아했던 가수이긴 한데, 여러면에서 물음표가 생기는 인간입니다.

플라시보 2009-06-17 22:37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네. 요새는 김태원씨도 예능 프로그램에 그들이 말하는 예능 늦둥이가 되어 자주 등장하시더군요. 매우 톡특한 말투와 함께..(특히 UFO발언은 정말이지 재밌더군요) 그러네요. 세상은 한때 기타와 노래 만드는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적어도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던 사람에게 이제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입담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네요. 윤종신은...음...그런 발언을 했단 말이죠? 여자가 회와 같다? 그럼 남자는 뭘까요? 꿈틀거릴때 고기를 낚기 위해 꿰매어 달아야 하는 지렁인가? 암튼 실망스런 발언이 아닐 수 없네요. 그다지 정있었던건 아니지만 저 역시 하이드님처럼 만정이 다 떨어집니다요.

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라디오 스타에 한때 그 존재 만으로도 수많은 팬들을 까무라치게했던 이현우, 김현철, 윤상 등이 출연한 방송을 보았더랬습니다. 이현우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현철. 그리고 특히 윤상의 경우 워낙 좋아해서 제발이지 저기서 입담을 과시해서 예능계의 떠오르는 샛별(?) 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답니다. (뭐 윤상의 입장에서는 그런류의 TV출연이 꼭 필요했기에 나왔는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이드 2009-06-18 01:42   좋아요 0 | URL
덧붙이면 '여자는 회와 같아서 일단 신선해야하고, 쳐야 한다' 고 했었네요. 거기에 게스트는 '신선하지 않아 버렸는데, 다른 남자가 찌개 끓여 먹으면 부럽다' 며 둘이 낄낄거렸죠. 무려 공중파 라디오 '두시의 데이트' 에서요. 이건 아마 중징계 먹었고, 이전에도 위험수위 오르락내리락 하는 여성비하 발언 종종 했더랬어요. 티비에서 볼 때마다 씁쓸하다는..

전 오늘 며칠전 주문한 CD 도착했어요. 은근히 컴퓨터에 음악 넣고 하는거 귀찮아해서, CD가 젤루 편하다는. 윤상, 김현철, 이현우(전 이치 라디오 좋아하거든요. 다큐를 좋아하고, 환경을 아끼는 바른생활 사나이-), 유희열(은 별로지만) 네들은 요즘의 예능에 빠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다행히도 말이죠.

조선인 2009-06-17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편의점 택배를 이용하는데, 얼마전 실수로 회사를 지정했어요. 포장 뜯는데 주변 사람들이 다 눈이 똥그래져서 요새도 CD 사는 사람이 다 있네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지 뭐에요.

플라시보 2009-06-17 22:39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저 역시 CD를 사는 사람입니다. 실은 아주 돈이 없던 시절에는 컴퓨터로 다운을 받아서 듣기도 했는데요. 그나마 입에 풀칠은 하고 살게된 요즘은 무조건 사서 듣습니다. 음악성이 좋네 나쁘네 욕을 하려면 적어도 음반은 사주고 욕을 해야 하는데 다운받아서 들으면서 그게 니들의 음악적 수준이 낮아서 도저히 돈주고는 못산다고 말하는건 좀 이상한것 같습니다. 수준이 안되어도 돈주고 사서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음악으로 밥은 먹고 살게 해 주어야 그들도 음악적 수준을 높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음악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정상적인 룰이 만들어지는거라 생각하거든요. (가수가 입담으로 먹고 살거나 연기, 혹은 얼굴로 먹고 사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플라시보 2009-06-18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정말 중징계감이네요. 회라서 신선해야 하고 신선할때 쳐야한다는 발언도 놀라운데 그걸 듣고서 신선하지 않아 버렸는데 남이 찌개 끓여 먹음 부럽다니요. 아...정말 막던지는구나 싶은 사람은 김구라 한사람만이 아니었나봐요. 아마 이들의 엄마는 여자가 아니고 이들의 아내와 딸들도 여자는 아닌가봅니다.

1sosh 2009-06-18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티형?생계형?예술가(음악가)들이 점점더 늘어가는 예능공화국,
노래를 잘한다고 음악을 잘 만든다는 그들은 이제 그 공화국안에 살고있다,

[작가님 연재하고 있는 글은 어디서 볼수 있는건가요??이곳에서만 볼수 있는건가요?? 작가님 글도 좋지만 여기 댓글들 읽느라 배꼽 떨어져 나갑니다 ㅋㅋ]
[★*5 강추소설들 마이리스트에 업그레이드는 혹시 안하세요??ㅎㅎ]

플라시보 2009-06-1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g Oxy님. 그러게요. 이젠 가수가 노래만 잘 하는 (그리고 약간의 외모를 갖춘) 시대는 간것 같습니다. 다른것도 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나봅니다.

제가 연재하고 있는 글은 다음에서 S다이어리나 블루버닝을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책은 연애 오프 더 레코드 라고 알라딘에서 검색하시면 찾을 수 있구요.^^)
마이리스트 업그레이드는 좀 해야 하는데... 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좀 해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조만간 해 보겠습니다.^^

1sosh 2009-06-19 02:37   좋아요 0 | URL
조만간 부탁드립니다^^ 캄사합니다~~ 엔드 연애,오프더 레코드는 진작에 보았죠...... 두번째 책 준비중이라 들었는데요..아직인가요?? 그리고 제가 대화명을 바꾸어서 아마도 까먹으신것 같은데요^^ 일전에 그러니깐 작년쯔음에 메일도 보냈던 팬입니다,,^^ (itumok)라고 ㅋㅋ 여름잘 보내시구요.....

플라시보 2009-06-1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앗앗. 그러시군요. 저는 몰랐더랬습니다. 갑자기 아이디가 바뀌어서요. 호홋. 두번째 책은 실은 지난 4월쯤에 원고는 다 완성이 되었는데요. 출판사 사정상 자꾸 출간이 미뤄지더니 어제 전화가 와서는 이메일 보냈으니 왕창 수정해주시고 (이달 말까지..맙소사. 새로 연재도 하나 하는데...) 8월 중순 출간을 목표로 달려보잡니다. 음...아직 책 제목을 결정하지 못해서 그것도 고민이네요. 그리고 리뷰는 올려뒀습니다. 강추 소설은 아니지만 최근 읽은걸 정리해두었어요^^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별벌레 다방에 대해 어떤 적개심도 없다. 하워드 슐츠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커피 낙농가를 착취하다시피 해서는 엄청나게 비싸게 팔아먹음으로써 상상도 못할 이익을 내고 있는 것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불매운동을 일으킬 만큼 사회운동가 타입의 인간도 아니며,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심벌인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려 바위에다 배를 처박는 바람에 그만 명을 달리한 선조의 한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증거로 내 집에는 이번 여름 그들이 야심차게 내어놓았던, 그들이 평소에 쓰는 테이크아웃 용기와 똑같이 생긴 여름용 텀블러를 품절이 되기 전에 재빨리 구입해서는 맥심 아이스커피와 얼음을 넣어서 다니기도 한다. 내친김에 고백을 하나 더 하자면 그들이 코인 초컬렛처럼 사이렌 심벌을 크게 찍어서 파는 초컬렛이 담긴 초록색 철제 용기를 재떨이 대용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별벌레 다방의 빠순이 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에서 혹은 이 세상에서 그런 악덕 기업은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절대 아닌 것이다.

내가 품는 불만은 제목에도 적혀있다시피 매우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불만 몇 가지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 불만 같은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대로 에티오피아의 어린이가 하루 종일 땡볕에서 고생하며 딴 커피콩을 헐값에 사들여서 초록색 로고가 찍힌 컵에 담아 눈 튀어나오게 비싼 가격으로 팔아먹으면서 우리는 커피를 파는 게 아닌 문화를 판다는 자부심을 계속해서 가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의 친구로는 나이키도 있고 전 세계 기업 중 인지도 넘버원인 코카콜라도 있으니까. 내가 그 모든 거대 기업들을 상대로 (더구나 걔네들은 내가 취약하기로 소문난 영어를 쓴다.) 딴죽을 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다만 누누이 말하지만 무척 개인적이면서도 사소하여 그들이 무시해도 이 땅에서 커피를 파는데 아무 탈 없는 작은 불만 몇 가지를 갖고 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별벌레 다방 (이렇게 표현하는 것에 잠시 설명 들어가시겠다. 원래 별벌레 다방의 벌레는 bucks 라는 철자를 쓰고 있으나 그 발음이 bug's 와 흡사하여 편의상 그냥 벌레라고 쓰기로 한다. 사전에 찾아보니 bucks 의 뜻은 별과 함께 쓰기에 매우 적합지 아니하였으므로) 에 대해 품은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불만을 말해보기로 하겠다. 일단 그들이 쓰는 용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차피 미쿡에서 온 것이니 그 사이즈 (이것도 영어구나. 크기로 정정한다.) 를 표현함에 있어서 스몰이나 미디움 라지 같은 단어를 쓴다면 나도 별 불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영어 못하기로 소문난 나 조차도 알아들을 수 있는 저런 쉬운 용어들은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컵 사이즈를 표현하는 말을 보자. 일단 가장 작은 스몰에 해당하는 용어로는 톨(tall) 사이즈가 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이 용어에 대해 네이버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었다. 1. 키가 큰, 높은. 2 (구어) 많은, 엄청난, 거창한, 터무니없는, 믿을 수 없는, 과장된. 솔직히 나는 평범한 잔 사이즈에 해당하는 이 용어가 어째서 크거나 높거나 비록 구어이긴 하지만 엄청난 많은 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을 사용하는지를 모르겠다. 뭐 그 잔에 든 내용물과 그 양에 비해 돈이 터무니없이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싸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략 동의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뜨거운 커피의 경우 제일 작은 사이즈가 숏 사이즈이긴 하지만 여름이니까 아이스만 보자면 제일 작은 사이즈는 톨 사이즈이다.) 그리고 그 다음 중간 사이즈. 즉 미디움이라 표현될만한 사이즈에 해당하는 단어는 그란데 (Grande) 그리고 제일 큰 사이즈는 벤티 (Venti) 라는 용어를 쓴다. 머리가 매우 비상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 채셨을 것이다. 내가 왜 톨 이후로는 더 이상 사전을 찾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그렇다. 이건 영어가 아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별벌레 커피가 어째서 영어가 아닌 다른나라 말로 컵 사이즈를 설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다방에 가려면 뜻도 모를 톨-그란데-벤티 라는 용어를 순서대로 외워야 한다. 안 그러면 종업원이 사이즈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만만해 보인다고 해서 벤티요 라고 말했다가는 터무니없이 큰 잔에 믿을 수 없는 가격표를 단 커피를 손에 쥐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선택권을 넓혀준답시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세분화 시켜놓았다. 정말이지 거기서 커피 한잔을 시키노라면 오도방구를 몰고 와서는 ‘설탕? 프림?’ 하고 간단하게 물어주는 언니들이 마구 그리워질 지경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커피를 마시겠냐고 묻고, 사이즈는 어떻게 하겠냐고 묻고, 시럽은 첨가를 할 건지, 우유는 저지방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보통 우유로 할 것인지 혹은 두유로 할 것인지, 위에 토핑을 추가하고 싶은 것은 있는지, 크림이 토핑이 되고 그 위에 시나몬 가루가 뿌려져 나가도 괜찮은지를 묻는다. 별벌레 다방에선 ‘그냥 커피’ 같은 건 없다. 뭐든 특별하고 매우 대단해서 하나 주문하는데도 수많은 질문에 수많은 답변을 해야 한다. 거기다 커피의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솔직히 이건 요즘의 거의 모든 커피 체인점에 해당되는 얘기다.) 나는 커피라고는 원두를 바로 내린 에스프레소. 그리고 거기다 물을 좀 타서 싱거운 맛을 낸 아메리칸 스타일. 거기다 우유를 부은 라떼. 마지막으로 그 위에 크림이랑 계피가루를 좀 뿌린 카푸치노 정도가 전부이다. (쓰고 보니 굉장히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만 별벌레 다방에서는 이정도 지식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러나 별벌레 다방에서는 우리의 까다롭고 미세한 입맛까지도 모두 고려해서 다음과 같은 음료들이 널려있다. 아이스 화이트 초컬릿 모카, 아이스 캬라멜 마끼야또를 비롯해서 다크 베리 모카 프라푸치노나 초컬릿 크림 칩 프라푸치노 같은 음료도 고를 수 있다.(이런 커피 음료가 부담스럽다면 스위트 오렌지 블랙이나 아이스 타조 차이 티 라떼를 시킬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마끼야또도 프라프치노도 정확히 뭔지 모르겠고 다크 베리 모카 프라프치노쯤 되면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경험에 의하면 말이 길면 길수록 그만큼 엄청나게 달며 또 그만큼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커피맛이라고 하는 것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 밖에는 말이다. 그 수많은 커피 종류의 알 수 없는 용어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일트럭 앞에서 오린지가 맞는지 어륀지가 맞는지 싸우고 있는 애들을 보고 있을 때 만큼이나 심란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제일 양이 많은 사이즈인 벤티 사이즈의 음료를 시킬 경우 오늘내로 다 마실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만큼이나 거대한 양의 커피를 팔면서 의자는 기껏해야 10분을 버티면 많이 버티고 30분 이상 지나면 이미 퇴화되었다고 배운 꼬리뼈의 존재가 새삼스러워지면서 7번과 4번 척추 및 요추, 경추에 심하게 무리가 올 만큼 딱딱하고 작은 나무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물론 간혹 가다 약간 폭신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만한 의자를 두고 있기도 하지만 그런 자리는 고작 두어 개에 불과해서 적어도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단 한 번도 비어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전에 말했던 라식 시술을 한 환자들  만큼이나, 약간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별벌레 다방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장시간 뭔가를 하는 언니 오빠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나처럼 마감이 업인 인간들이나 이미 마감을 한참이나 어긴 자신들에게 일종의 벌을 내리는 의미에서 거기에 앉아 마감을 끝낼 때까지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심한 인간이므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별벌레 다방에 개인적 원한 혹은 단체적 적개심 같은걸 품고 있지는 않다. 한때 명동에서 쇼핑몰을 차려도 될 만큼 큰 별벌레 다방 체인점이 생겼을 때는 매우 신기해하며 들락거리기도 했고 사람 많은 곳에서 약속을 할 때는 누구나 쉽게 알아보고 찾을 수 있도록 동네마다 목 좋은 곳에 포진해있는 별벌레 다방을 약속 장소로 잡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커피 체인점에 비해 별벌레 다방의 로고 디자인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별벌레 다방의 매출이 전 세계적으로 감소하여 운영진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며 초창기 로고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그 로고는 내가 알기로는 요즘 로고보다 명백하게 복잡하고도 촌스럽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내가 가진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불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좀 더 쉬운 용어를 사용하고 좀 더 합당한 가격을 받으며, 그들이 파는 커피를 즐기기에 적당한 의자를 제공한다면 나의 이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불만은 곧 사라지겠지만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매출 감소를 로고의 문제로만 돌리고 있으니 내 불만의 해소는 요원해 보인다. 
 

* 이 글 역시 다다음주나 혹은 그 다음주 원고용으로 쓴 글입니다.


댓글(10) 먼댓글(1)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스타벅스 커피 사이즈에 대한 고찰
    from little miss coffee 2009-06-16 16:37 
    플라시보님의 별다방 글을 보고, 스타벅스 커피 사이즈 ( tall, grande, venti) 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그에 대해 조금 더 써보기로 한다.    톨, 그란데, 벤티라는 사이즈 이름은 미국인들에게조차 혼란스러운 이름임이 분명하다. 스타벅스를 애용하는 나에게는 커피빈의 '스몰' 과 '레귤러' 사이즈가 갈때마다 더 헷갈리긴 하다만( 그래서 요즘 왠만한 커피전문점에는 커피 사이즈를 주문시 확인할 수
 
 
하이드 2009-06-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티는 이탈리아어로 20 이에용- 20온즈라서 벤티. ^^
전 요즘 별다방 할인을 무려 3개씩.. 에 마일리지 도장까지 열심히 찍으며 ( 텀블러, 신한러브 체크카드, 엘지텔레콤카드) 받는터라, 왜 이렇게 싼거지! 하면서, 마시고 있다죠.

플라시보 2009-06-16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하이드님. 벤티 말고 그란데는 어디 용어인가요? 그것도 이탈리아어인가요? 이 원고를 쓸 당시에는 지인과 토론할때 불어인가? 불어일꺼야.. 불어겠지 했었거든요. 그리고 저도 별벌레 다방을 싫어라하진 않아요. 다만 사소한 불만이 몇 개 있을 뿐이지...ㅎㅎ (거기도 할인 제도가 다양하게 있군요. 몰랐더랬어요.)

하이드 2009-06-16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스타벅스 얘기입니다만, 애초에 스타벅스에는 숏과 톨 사이즈가 있었죠. (메뉴에는 없지만, 숏 사이즈를 요청하면 주지요) 더 큰 사이즈를 원하는 미국인의 습성상 더 큰 사이즈를 만들기 위해 그란데(이탈리어에 뿌리를 둔) 사이즈를 만들었고, 더 더 큰 사이즈를 원하는 미국인들을 위해 벤티( 20온즈, 그나마 가장 정확하고, 사이즈를 알려주는 이름) 사이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스타벅스에서 이탈리아어로 사이즈를 만든 것은 커피를 많이 마시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탈리아어로 사이즈를 쓰면 쿨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에스프레소로만 마시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벤티' 사이즈 커피를 주문한다고 한다면, 기절초풍할지도. (에스프레소 20온즈요. 꽥!)

플라시보 2009-06-16 20:43   좋아요 0 | URL
에스프레소 20온스는 정말이지 꽥입니다. 아마 마시다가 써서 죽지 않을까요? 흐흐. 보약 팔면 그 나라에 잘 팔릴것 같다는 헛생각이...(아님 칡즙이라도) 자세한 답변 감사드려요.^^

추신 : 멋댓글의 뜻을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제일 처음 쓰신 글에다 먼댓글을 써 두셨더군요. 호홋 도움이 되었습니다. 댐 원고 수정해야겠어요.^^

마노아 2009-06-1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진중권 씨가 쓴 글을 보니까 작은 사이즈를 시키면서 '톨'이라고 발음하면서 위축될 법한 주문자의 마음을 어깨 으쓱으로 바꿔주는 전략이라고 하더라구요. 거창한 표현이지만, 대략 그런 의미였고, 그걸 보니까 오, 똑똑한데! 했답니다. 전 스타벅스 가면 캬라멜 프라프치노만 마셔요. 다른 건 복잡해서 이름도 기억할 수 없어요. 처음 맛보았던 그걸로 쭈욱 가고 있답니다...;;;;
그리고 의자 얘기 동감이에요. 손님을 빨리 회전시키려는 음모가 틀림 없어요.

플라시보 2009-06-16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진중권씨의 책을 꽤 여러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스타벅스와 관련한 얘기는 못 읽어봤네요. 그런식의 해석이..하하. 손님을 빨리 회전시키는건 좋긴 한데요. 원래 커피숍이라 함은 커피 한잔 시켜놓고 주야장창 앉아있으라고 만들어진거야 라는 근거없는 생각 때문인지 마치 페스트푸드점처럼 의자를 딱딱한걸 놓아두니 영 밉더라구요. 우리의 모든 수다는 따지고 보면 커피숍에서 완성되어 술집에서 농익는데 말입니다.^^

마노아 2009-06-17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였던 것 같은데, 정재승 씨와 함께 한가지 주제를 놓고 같이 쓰는 칼럼이 있어요. 한 명은 미학적으로, 한명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거지요. ^^

플라시보 2009-06-17 18:1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아..신문에 연재되는 칼럼이었군요. 안그래도 얼마전에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진중권씨는 미학적으로 정재승씨는 (과학 콘서트 쓰신 그분 맞죠? 이분 책도 재밌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군요. 재밌겠네요. 아마 곧 책으로도 기획되어 나올것 같은데요. 흐흐. 인터넷에 기사를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정보 고마워요.^^

1sosh 2009-06-17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벌레 다방?? ㅋㅋㅋㅋ 역쉬 작가님은 생각은 무궁무진무한 합니다.^
그런댈 아직 한번도 안가본덕에 잘은 모르겠지만.비싸다는 생각은 늘 했던것 같습니다.전 차라리 커피값으로 밥을 한끼 더 먹는게 낳지라는 생계형이라서요^
건물이 사람을 앞도하면 안되듯이 매장이나 가게들또한 인간들과 친숙한 서민적인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뭐랄까..좀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그런곳들중 하나인것 같습니다..저에겐^^
언제가는 방석깔고 침대깔아 주는 다방이 나오질도 모르죠..ㅋ

플라시보 2009-06-17 18:19   좋아요 0 | URL
Sang Oxy님. 후훗. 저도 가기 꺼려지는 그런 곳들이 있어요. 꺼려진다기 보다는 뭐랄까 왠지 주눅 드는곳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능숙하게 주문도 하고 또 여러가지를 즐기는데 전 처음 가는 곳이라 어리버리할때 그런걸 느낍니다. 스타벅스 처음 생겼을때도 비슷했던것 같아요. 딱 드러서자마자 메뉴판을 처다보는데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건물이 사람을 압도하면 안되듯 매장이나 가게들 또한 그러하다는 생각은 저도 공감합니다. 좀 편하고 만만한 공간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거대한 멤버쉽처럼 느껴질때가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