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위선 - 스탠퍼드 법대 교수가 말하는
데버러 L. 로드 지음, 윤재원 옮김 / 알마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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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기관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교육하고 지식의 저변을 넓히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카디널 뉴먼은 고등교육의 역할은 지식인을 양성하고 이성에 대한 역량을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는 실제 얼마만큼의 성과를 냈는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목적인 것입니다. 대학의 연구와 교육은 모든 분야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 사회의 복지와 진보에 필수적인 기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나오고 있고, 그로 인해 대학간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학교수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대학의 문제입니다.

대학이 지식보다는 지위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은 순위문화에서 비롯됩니다. US뉴스에서 발표하는 대학순위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그 영향력에 비해 순위의 기준은 객관적이지 못하며 교육의 질을 평가할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는 탓에 대학의 명성은 허점투성이인 가짜 정보에 의해 좌우됩니다. US뉴스와 기타 관련지에서 매기는 순위에 사용되는 졸업생 비율이나 전문직 및 상위 학위과정 진입률, 자격증 시험 통과 비율 등의 정보는 교육의 질을 측정하는 좋은 수단이 아닙니다. 이런 기준들은 교육 경험에서 창출된 부가가치가 아니라 입학생들의 능력과 수준을 더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켈리포니아대학의 고등교육연구기관에서 실시한 연구도 이 같은 현실을 잘 드러내는데, 이 연구에서는 졸업생 비율에서 나타나는 변수의 3분의 2는 입학생의 특성에 따른 차이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려고 노력하면서도 결국 명성을 팔아 연명한다. - p.20

하지만 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데 사실적 근거가 아무리 빈약하다 해도 발표를 하는데는 상관이 없습니다. 최고 행정가들의 주관에 따라 평가되는 순위는 대학의 명성에 상당히 의존한 채 순위를 매기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각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대학의 수준을 인식하기 때문에 타 교육기관에 대한 충분하고도 체계적인 정보가 반영될 수 없습니다. 설문 대상자들은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명성이나 예전의 순위 기록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끝없이 울리며 반복되는 역학구조를 가진 일명 후광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과거의 인지도에 현혹된 평가자들은 해당 기관의 현 실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높은 점수를 매기게 됩니다. MIT에는 법대가 없고, 프린스턴 대학에는 전문대학 기관이 없는데도, 순위표에서는 좋은 실적을 올리는 것으로 나온 적도 있는가 하면, 기존 명문대학들의 텃세가 순위에 명확히 영향을 끼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US 뉴스&월드 리포트가 해마다 발표해온 영향력 있는 미국대학 순위선정 역사상 가장 논란거리가 된 1등은 1999년의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었다. 평자들은 칼텍이 전미 최고 대학으로 뽑히자 마치 스티븐 킹이 노벨문학상이라도 탄 것처럼 조소를 보냈다.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공과대학이 어떻게 하버드대나 예일대, 프린스턴대, 스탠퍼드대, 게다가 그보다 더 크고 더 유명한 동부의 맞수인 MIT를 능가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에 직면하자 결국 이 잡지는 굴복했다. 이후 선정 기준을 바꿔 칼텍이 독주하던 학생1인당 비용 지출 항목의 배점을 줄여버린 것이다. 이 잡지가 선정 기준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칼텍은 그 후에도 몇 년간 정상을 지켰을 것이다. 칼텍은 바뀐 기준에 따라 10대 대학 명단의 아래쪽으로 도로 미끄러졌고, 아이비리그와 기타 전통 명문들은 한동안 뒤집어써야 했을 망신으로부터 구제됐다. -《왜 학벌은 세습되는가?》p.335 

대학이 순위화되면서 대학의 자본화, 상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상위대학은 기부금과 지원금이 몰리고 상위대학의 교수들은 많은 돈과 시간을 얻게 됩니다. 그에 반해 일류대학의 교수가 아닌 경우 상대적으로 더 낮은 수입과 높은 업무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일류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한 경쟁적 구도가 마련됩니다. 교수는 경력을 위해 점점 더 많은 출판물을 내고 있지만, 이런 출판물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인지도를 향한 욕구는 학문적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질 수 있으나, 긍정적이지 못한 부산물도 함께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예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겉멋만 부린 문체, 난해한 주제 그리고 과도한 인용과 참조이며, 이러한 출판물이 제시하는 현대 학문이 내놓는 글은 난해하고, 사소한 주제를 다루며, 몇몇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읽지도, 읽히지도 않습니다. 또한 교수가 자신의 이해를 좇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비전임 교원이나 대학원생 등 훈련이 부족하고 월급도 적은 고단한 하급 인력들의 손에 학생들을 내맡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교수가 학부 수업을 맡는다 하더라도 해당 과목에 필요한 전반적인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 주제에 따른 특화된 내용만 가르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명성의 추구는 기관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은 종종 교육의 내용보다는 학점에 더 신경을 쓰며 그에 따라 학교, 전공, 교과과정을 선택한다. 헨리 워드 비처는 "만일 누군가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는 타이틀을 딴 것이다. 이는 자부심과 허영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타이틀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된다." 고 했다. - p.25 

대학의 운영이 점점 자본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대학 내에서의 빈부격차입니다. 노조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사무직 및 관리직 직원의 월급은 최저 생활비를 밑도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대학의 수치스러운 단면입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와 같은 사회 비평가들은 만일 대학이 인간의 가치와 사회 평등을 가르치는 곳이라면, 먼저 기관 내부의 노사관계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화는 대학의 운영자금과 연구 기금의 출처가 민간 기업 쪽으로 이동하는 추세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상업적으로 즉각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원합니다. 정부의 지원은 줄고 연구비용은 늘어가는 오늘날에는 교수들로 하여금 후원 기업이 보조금을 지원하는 연구가 어떤 종류인지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필연적으로 학계와 기업간의 커넥션을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뉴잉글랜드 의학 학술지는 지난 3년간 시행된 약물 검토의 절반 가까이가 해당 약품을 생산하는 업체와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연구진들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인정했고, 항암제 관련 학술지 기고문을 검토한 사례에서, 약물의 비용 효율성에 관해 부정적인 결론을 도출한 기사 중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경우에는 5퍼센트에 그친 반면, 비영리기관에서 지원금을 받은 경우에는 38퍼센트에 달하는 차이점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나는 베릴륨을 연구하면서 대니얼 로스 박사의 논문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그것은 베릴륨 업계를 위한 로스 박사와 폴 레비 박사의 재분석 논문이었는데, 예상할 수 있는 결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개변수 일부를 조작함으로써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높은 수준의 폐암 위험률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레비박사는 R.J.레이놀즈 담배회사에 고용되어 폐암과 작업장에서의 간접흡연 사이의 연관성을 밝힌 연구를 재분석하는 일을 맡았고, 로스박사는 필립 모리스 사의 소송을 도울 전문가 중 한명으로 고용됬다. -《청부과학》p.90 

이러한 대학의 지위의 추구, 교수들의 명예의 추구, 기업과 대학간의 결탁은 학문에서의 우선순위가 왜곡되고, 좋은 수업을 제공하려는 의지를 저해하며, 대학교수로 하여금 공적 지식인의 역할을 훼손합니다. 과거 조지 오웰처럼 대학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는데도 문학이나 정치, 경제 비판 서적을 출간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적 지식인 시장은 대학교수들이 장악하고 있으나, 학문적 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대학교수는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오히려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대학이라는 고등교육 속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대학의 임무는 무엇이며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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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첨 민주주의 - 선거를 넘어 추첨으로 일구는 직접 정치
어니스트 칼렌바크 & 마이클 필립스 지음, 손우정.이지문 옮김 / 이매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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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국민 거의 모두는,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자격은 25세 이상일 것, 중범죄를 저지른 후 집행유예기간이 남아있지 않을 것, 선거와 관련된 처벌을 받은 뒤 10년이 지날 것 등입니다.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기준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입사기준은 물론이고, 중소기업이 요구하는 취업의 스펙 요구사항에 비하면 제로나 다름없습니다. 명문대를 나올 필요도, 토익 900점을 넘지 않아도, 어학연수나 자격증, 인턴경험이 없어도,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는 대표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거를 통해 뽑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돈과 명성, 권위가 필요합니다. 돈이 없으면 공천 경쟁에 나설 수 없고, 공천을 받더라도 본선 경쟁에서 이기기 힘듭니다. 평범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학벌과 직업, 경력이 없다면 선거에서 뽑히기 힘듭니다. 결국 선거는 버나드 마넹이 지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적이라기보단 귀족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입니다.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뽑히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선거가 중요합니다. 선거만 잘 할수 있다면 몇번이라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당선하려는 욕망과 재선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국회의원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의욕보다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썰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은 재선에만 신경씁니다.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엘리트들만이 국민을 대표하는 현실을, 엘리트들의 활동이 정치 본연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정치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것에만 집중하는 현실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정치가 자신들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힘듭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점은 과거부터 꾸준히 지적되어 왔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사회계약론》에서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기본 원칙'인 자유가 취해야 할 두 가지 형태 가운데 하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유의 한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 자유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면 자신이 차지할 그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 《선거는 민주적인가》p.46


선거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안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저자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말하는 것은, 미국 상하원 제도에서 '하원 의원을 추첨을 통해 구성'하는 것입니다. 추첨제라는 아이디어는 과거 아테네의 민주주의부터 18세기, 19세기에도 여러 학자들에 의해 거론된 방식입니다. 추첨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 갓난아기나 연쇄 살인범에게도 국회의원의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네테의 추첨제를 기반으로 말하면, 추첨 대상은 자신이 하겠다고 신청한 모든 국민에 한합니다. 신청한 사람 중에서 랜덤으로 국회의원이 선출되며, 국민 누구라도 선출된 국회의원의 활동에 공개적으로 의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옳다면 직무를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에 대한 무차별적 의의를 방지하기 위해 의의를 제기한 시민은 그 주장이 불합리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아테네에선 추첨제와 동시에 투표제도 실시했는데, 투표제는 대표적으로 군대를 이끄는 장군을 선발했습니다.

대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생겨난 제도이며, 추첨 민주주의 역시 대의적 성격을 가집니다. 추첨 민주주의는 추첨을 통해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직접적이지만,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인, 이중적 성격을 가집니다. 저자들은 추첨으로 선발된 의원들이 기존의 정치구조가 지닌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추첨으로 뽑힌다고 해서 부정부패에서 완전히 자유롭거나, 뽑힌 사람들이 모두 정치활동에 열정적이거나, 행정부와 싸울만한 충분한 역량을 다 갖추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단점들은 지금 선거를 통해 뽑히는 국회의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자들은 추첨제도를 통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국민의 얼굴을 가진 국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재선의 동기가 없는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되는 지금의 의원들처럼 국회 업무를 팽개치고 지역구에서 재선 활동에 전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민들이 하루빨리 처리되기를 바라는 민생 법안을 계속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세제 관련 법안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정될 것이며, 연말에 도매금으로 수백 건씩 처리되는 법안들은 진지한 심의를 위해 처리 건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특권적 공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민주적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 p.12


국회의 이상적 모습은 국민의 마음과 감정, 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의 구성원들은 국민 다수의 얼굴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국회의원들은 거의 모두 남성들이며,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이고, 많이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들이 선호하는 의제와 국회가 선호하는 의제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대부분의 시민과 다른 계급의 사람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 정치를 멀리하는 참여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선택하지 않은 대표성의 문제를, 대표성이 낮아지니 그만큼 국회의원의 책임감이 결여되는 문제를 불러오게 됩니다.

캐나다의 경우 2006년에 단순 다수 대표제를 개혁하기 위해 추첨제를 통해 시민총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추첨 민주주의의 전통은 재판의 배심원 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작위 추출이 대표성을 가지기 위해선 통계학적으로 최소 500개 정도의 샘플이 필요하기 때문에, 추첨 민주주의가 국민의 대표성을 보장하기 위해선 국회의원 자리도 최소 500석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저자들은 투표제의 상원, 추첨제의 하원이라는 절충적 개혁안을 주장합니다. 추첨제도를 통해 국회가 구성이 된다면, 지금처럼 대부분이 남자이고, 절반이 변호사이고, 대부분이 부유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사라질 것입니다. 대신 절반은 남자이고 절반은 여자인, 공장 노동자와 비정규직 캐셔, 과학자, 선원, 교사, 의사, 광부, 변호사, 요리사 등으로 구성된, 시민의 얼굴을 한 국회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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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7-2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첨이라는 말을 들으니 어느 일본 기업이 생각납니다. 복지가 상당히 잘 되어 있고, 월급이 높아서 이직이 거의 없다는 회사인데 이 회사는 추첨을 통해 부장, 과장, 대리를 뽑습ㄴ디ㅏ. 입사 1개월인 신입사원이 운이 좋으면 전무도 될 수 있습니다.
전무는 전무가 해야 할 고유의 전문 스킬이 필요한데 이게 제대로 굴러가냐 ? 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지만
잘 굴러가더라고요....오히려, 전무가 되면 더욱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무였던 사람이 신입사원이 되면 한시름 놓는다고 하네요.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권이 상당히 스트레스를 주기에...
 
우리는 왜 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가 - 드라마 ‘오로라 공주’로 보는 한국 사회 대중심리
최성락.윤수경 지음 / 프로방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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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불륜, 배신, 사기, 패륜, 강간, 재벌가, 살인.. 한국 드라마가 이런 소재들을 당연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막장 드라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막장 드라마라는 말이 이젠 한두개의 막나가는 드라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가 곧 막장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인어아가씨』,『하늘이시여』,『왕꽃선녀님』,『아현동마님』,『보석비빔밥』,『신기생뎐』,『조강지처클럽』,『왕가네 식구들』,『아내의 유혹』등 다양한 막장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에게 소개되었고, 최근엔『여자를 울려』나『여왕의 꽃』같은 작품들이 막장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암세포들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원인이 있겠죠. 이 세상, 잘난 사람만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듯이 같이 지내보려고요. 나 살자고 내 잘못으로 생긴 암세포들 죽이는 짓 안 할래요." 시청자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던 이 대사가 나오는 드라마는 2013년에 방영된『오로라 공주』입니다. 강렬한 섹드립, 비현실적인 요소들, 뜬금없이 죽어나가는 배우들, 개연성 없는 전개 등으로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막장드라마입니다. 저자 윤수경과 최성락은 이 드라마를 기반으로 왜 막장드라마가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왜 막장드라마를 원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륜녀에 쏙 빠진 오금성이 극중 부인인 이강숙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이강숙은 알몸을 가린 가운을 벗어 제치며 분노를 터뜨린다. "뭐가 부족해 내가! 호강에 겨워서 뭐에 빠진다고.. 마흔 셋에 이 정도 유지하는 여자 봤어? 누구는 주물러 터트려서 귀찮아 죽겠대. 뭐가 그리 잘났는데? 나니까 살아줬어. 토끼 주제에..." 여기서 받아치는 오금성의 대사는 더 가관이다. "식어 빠진 사발면을 그럼 1,2분이면 해치우지 2,30분에 먹냐?" - pp.105~106

다른 예술작품들, 그림이나 소설, 연극과 영화, 심지어는 만화까지도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처럼, 드라마 역시 예술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현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막장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은, 방송계의 구조가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 좋은 구조이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의 가치가 막장 드라마를 선호하기 때문이고, 시청자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이 최우선 가치이며, 방송계에서 돈은 곧 시청률이고, 막장 드라마는 시청률이 보장되는 상품입니다. 드라마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방법은 탑스타를 기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투자대비 효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중고 신인들을 기용해 값싸면서도 많은 주목과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막장드라마야말로 자본주의적 가치에 부합하는 예술상품입니다.

드라마의 주요 시청타겟은 전업주부들이며, 성공적인 드라마는 전업주부가 원하는 심리를 잘 만족시켜주는 드라마입니다. 막장드라마를 잘 만들기로 이름난 4명의 작가 모두 중년의 여성이라는 것도, 드라마와 중년 여성은 빼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 드라마를 보는 전업주부계층은 여성해방 이전의 마지막 세대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여성들이 실제로 커리어 우먼의 꿈을 실현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반면, 그들은 그럴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드라마는 그들의 심리를 대리만족시켜줍니다. 드라마에서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만 나온다면, 시청자들은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입니다. 때문에 막장 드라마를 보며 자신의 인생은 이만하면 괜찮다는 안도감을 얻고,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들의 행동에 욕 하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심지어는 현실에서 막장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드라마 자체가 목적이라면 드라마의 줄거리, 앞뒤 이야기, 전개의 타당성과 진실성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드라마의 예술성과 작품성, 드라마로서의 가치가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하지만 드라마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는 절대 A급 문화가 필요하지 않다. B급 문화만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 p.188

성공한 드라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그 드라마가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는 지금 당장 끌려서 먹는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막장 드라마를 다시 보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먹을 성질의 것이 아니고, 새로운 불량식품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이런 막장드라마의 형태가 비단 드라마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 문화의 전체적인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한국문화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고, 대중적이지만 예술로서,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인정되지 못하는 B급 문화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B급 문화 자체는 나쁠 것이 없지만, B급 문화밖에 없는 문화라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한국 사회는 문화 그 자체에 목적을 둔 적이 없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건 작품 그 자체가 평가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핵심은 경제, 돈이며, 문화는 언제나 수단적인 존재였습니다. 정치권도 경제, 경제만을 이야기하고, 사회도 경제, 경제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 유치원 들어가는 것, 국제 중고등학교 들어가는 것, 수능 잘 보는 것, 토익 잘 받는 것, 좋은 곳에 취업하는 것, 좋은 차 사는 것, 해고당하지 않는 것이지 미술관에서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 사색할 수 있는 책을 보는 것, 깊이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문화는, 대중문화는, 드라마는, 돈 버느라 지친 몸을 휴식하기 위해 잠시 보는 수단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B급 드라마, 막장 드라마를 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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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장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실을 제대로 짚은 내용이군요. 막장 드라마를 불량식품에 비유한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미디어일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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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한 사람을 물리적 힘으로 성폭행했다면, 그것은 강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협박해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것도 강간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억지로 성교를 하는 것은 모두 강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유형들입니다. 그러나 밤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강제로 하는 것만이 강간은 아닙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 역시 강간입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놀러갔다가 강제로 당한 것도, 역시 강간입니다. 결혼한 부부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거부했을 때 강제로 관계를 가졌다면, 강간입니다. 성폭행에 대한 통계는, 한 가지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으슥한 밤에 자신을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사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여성의 '아는 오빠' 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잡지『미즈Ms』는 수천 명의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혹은 성폭력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대학생들이 이런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여성이었고, 소수의 남성 피해자도 있었는데, 남성 피해자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보다 더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가장 다루기 복잡하고 힘든 유형의 성폭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은, 가해자의 심리와 피해자의 심리에 있어서 낯선 사람에게 당한 강간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과 강간 피해자를 구분해서 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계를 차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지갑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그가 강도를 당할만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범죄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단지 가해자가 범행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강간 사건, 특히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책임을 묻고, 심지어는 가해자보다도 오히려 피해자의 책임이 더 큰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 p.41

여성이 남성의 집에 가거나 차에 탔다고 해서, 그와의 성관계에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남성의 데이트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관계로 보상되어야 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전에 어떤 행동을 했든 상관없이, 누구든 성적인 행동에 대해 거부할 권리가 있고 이 의사 표시는 존중되어야 하며,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강간입니다. 강간은 엄연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사건을 강간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에 의해 강간당했을 때, 여성들은 안전한 피해자가 됩니다. 안전한 피해자란, 성폭력 피해 상황을 부정하고 사건을 자신과 분리시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한편 내면의 불안감을 외면하고, 피해 상황에 맞서 심각하게 저항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피해자를 말합니다. 피해자가 이런 관계에 저항한다면, 피해자가 오히려 강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많은 여자아이들은 여성스러워지라고,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자기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직, 간접적으로 교육받습니다. 여자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독립심과 자립심이 부족한 상태로 머물 것을, 그리고 신체적, 경제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찾아갈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자에게 보호받는 대신 성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관계입니다. 그 결과 여성의 성은 남성의 보호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교환수단으로 이해되고, 많은 여성들을 안전한 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적 문화와 관습은 여성은 은연중에 강간을 원한다던지, 집에 왔으면 성 관계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잘못된 강간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여성들은 성적으로 매력 있다고 여겨지는 그런 남성들의 의지에 순응하도록 사회화되는 반면, 많은 남성들은 공격적인 방식으로 성적 행동을 하도록 사회화됩니다. 물리적 폭력과 강제적 격리, 언어폭력과 통제, 여성의 거부반응에 대한 무시 등과 같은 공격성은, 아는 사람에 대한 강간에 있어서 남성다움으로 포장됩니다. 때문에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이 강간임을 알면서도 아무 죄책감 없이 행하거나, 강간임을 인지하지도 못하기도 합니다. 여성을 살살 꼬셔서 자신의 자취방에 들어오게 하거나 여성에게 술을 먹여서 성관계를 하는 것은 하나의 팁이자 노하우가 되었고, 다른 남자들에게 자랑거리로 말합니다. 이런 잘못된 남성문화는 여성을 꼬시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이른바 '픽업 아티스트'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강간은 극소수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종의 정신병이 아닙니다. 사실 강간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남성들의 행동양식과 큰 차이가 없어요." 어떤 면에서 성폭력 가해자와 비가해자의 차이는, 소년들이 흔히 남자다움이라고 배우는 '마초성'을 얼마나 신봉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의 거의 모든 남성이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성적 가르침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이 대개는 남성들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 p.98

배은경 서울대 교수는, 남성의 성매매, 성에 대한 인식은 개인적인 성적 욕구보다 오히려 군대나 회식, 접대로 이어지는 남성 집단의 문화와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남성집단이 사용하는 언어만 보더라도 이런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성관계를 하나의 성과물로 여기거나, 여성을 재화로 보는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홈런을 쳤다던지, 따먹었다던지, 나에겐 왜 안대주냐는지, 가져보고 싶다는 등의 언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공고히 합니다. 남성의 언어는 여성 그 자체를 아동이나 동물, 또는 성기로 표현함으로서 여성을 대상화하기도 합니다. 드라마『파리의 연인』에서 백마탄 왕자님인 재벌2세 한기주가 여주인공에게 말하는 "애기야 가자"와 같은 대사처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남녀 관계에서는 성적인 강요가 워낙 흔하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강간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데이트를 먼저 신청했거나,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할 때, 영화를 보기보다 남자의 집에서 놀 때, 여자가 술을 마실 때 자신의 행동, 강간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친분 있는 사람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현실을,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여성이 남성의 집에 혼자 놀러가거나, 그 집에서 속옷바람으로 있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강간당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성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강간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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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적이 아니다 -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신기철 지음 / 헤르츠나인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영화『태극기 휘날리며』에선 안타까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반공청년단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입니다. 영신은 북한군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빨갱이로 몰려 죽게 됩니다. 반공청년단의 이런 행동은 영화를 위한 극적 장치도, 전쟁통에 과열된 과격함도, 순간의 감정에 의한 즉흥적인 살인도 아니었습니다. 영신이 겪은 일들은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겪은 실화이며, 체계적인 대량학살이었습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국전쟁에서, 한국 국민들,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은 북한의 인민군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한국 군대는, 그 총부리를 인민군뿐만이 아닌,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한국 국민들을 향해 들이댔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국부(國父)라 부르는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쟁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이 벌어지면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많이 희생되고, 점령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적국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적국의 민간인이 아닌, 자신의 국민, 자신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칼로 찔러 살해하는 부모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모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이 가장 먼저 공포한 법령은 전쟁을 위한 계엄령이 아니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었습니다. 이 법령을 통해 이승만은 수많은 시민들을 부역 혐의로 몰아 살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었습니다.

권력욕에 눈멀었던 늙은 독재자는 항일투쟁에서조차 전선에서 멀수록 안전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점점 다가오는 외부의 적뿐만이 아니었다. 내부 지배 질서의 흔들림 역시 공포였다고 한다. 해방 후 5년 동안 저질러 온 전횡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전쟁 상황에서 당장 눈앞의 적은 인민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 p.34

전쟁 초기 미국 대사는 인민군에게 잡히기 전까지 최대한 오래 대통령이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즉시 피난 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국회 토론에서 서울을 사수할 것이 결정되었고, 이를 알리기 위해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승만은 남쪽으로 피신한 뒤였습니다. 이승만은 전쟁이 시작된 순간부터 수도를 지킬 생각이,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었습니다. 이승만의 다양한 행적은, 침략하는 적보다 적에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국민들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건국 후 테러, 암살, 학살로 일관했던 독재자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잘못보다 국민을 원망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계엄령의 범위에 전라도를 제외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난민을 자신이 도망쳐온 곳과 멀리 떨어진 호남으로 유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부 수립 전후부터 이승만 정부에 사사건건 대들었던 지역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의 국민들을 이승만은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진군하면서 국군은 후퇴했고, 국군이 후퇴하는 길을 따라 한국군에 의한 한국인의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8사단은 후퇴하면서 제천, 예천, 영천에서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고, 6사단은 횡성, 원주, 여주, 충주, 음성, 괴산, 문경, 청원, 상주에서, 수도사단, 2사단, 7사단은 진천, 청원, 안동, 보은, 의성, 청송에서, 3사단은 울진, 영덕, 대구에서 시민들을 살해했습니다. 미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보에 의해, 때로는 의도적으로, 육군과 해군, 공군의 종합적인 공격을 받아 민간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민간인 학살은 전투성과로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후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한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 1.4후퇴를 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보안법은 불법 학살 행위를 조장하는 합법적 근거였다. 단독정부 수립 직후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입증 가능한 행위가 아닌 범죄 의도를 추정해 처벌하는 데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관적, 정치적 판단만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 p.240

이승만 정부의 한국전쟁은 방어 전쟁이라고 하면서 점령군이나 저질렀을 법한 집단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한강철교, 수원공항 등 다양한 실수들 역시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한강철교 폭파로 인해 1만명이 넘는 국군이 강을 건너지 못했으며,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국민들은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다리를 끊었지만 인민군의 진격 저지와도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충청도로 피신해서 국민들에게 안심해도 괜찮다고 기만적인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이 거짓 방송을 듣고 재빨리 피난을 간 사람들은 애국자가 되었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용공분자나 부역자가 되서 대통령의 손에 처형당했습니다.

이승만의 광기는, 반공주의와 정치권력과 결합해 합리적인 대량학살을 벌였습니다. 민간인 학살 책임에 있어서 이승만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이승만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엔 조명되지 못했고,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사의 어려움 등으로 국가가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와서야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희생자들에게 사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쩌면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자신에게 반대하는 한국인이 없는 클린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내내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한국 민간인 학살은, 국가적 폭력, 자발적 복종, 합리성이란 형태를 가집니다. 이 특징을 가지는 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현대성의 '밝은 핵심', '현대 문명의 꽃', 바로 홀로코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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