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가 - 드라마 ‘오로라 공주’로 보는 한국 사회 대중심리
최성락.윤수경 지음 / 프로방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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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불륜, 배신, 사기, 패륜, 강간, 재벌가, 살인.. 한국 드라마가 이런 소재들을 당연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막장 드라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막장 드라마라는 말이 이젠 한두개의 막나가는 드라마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가 곧 막장이라는 식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인어아가씨』,『하늘이시여』,『왕꽃선녀님』,『아현동마님』,『보석비빔밥』,『신기생뎐』,『조강지처클럽』,『왕가네 식구들』,『아내의 유혹』등 다양한 막장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에게 소개되었고, 최근엔『여자를 울려』나『여왕의 꽃』같은 작품들이 막장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암세포들도 어쨌든 생명이에요.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세포들도 느낄 것 같아요.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원인이 있겠죠. 이 세상, 잘난 사람만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듯이 같이 지내보려고요. 나 살자고 내 잘못으로 생긴 암세포들 죽이는 짓 안 할래요." 시청자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던 이 대사가 나오는 드라마는 2013년에 방영된『오로라 공주』입니다. 강렬한 섹드립, 비현실적인 요소들, 뜬금없이 죽어나가는 배우들, 개연성 없는 전개 등으로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막장드라마입니다. 저자 윤수경과 최성락은 이 드라마를 기반으로 왜 막장드라마가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왜 막장드라마를 원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륜녀에 쏙 빠진 오금성이 극중 부인인 이강숙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이강숙은 알몸을 가린 가운을 벗어 제치며 분노를 터뜨린다. "뭐가 부족해 내가! 호강에 겨워서 뭐에 빠진다고.. 마흔 셋에 이 정도 유지하는 여자 봤어? 누구는 주물러 터트려서 귀찮아 죽겠대. 뭐가 그리 잘났는데? 나니까 살아줬어. 토끼 주제에..." 여기서 받아치는 오금성의 대사는 더 가관이다. "식어 빠진 사발면을 그럼 1,2분이면 해치우지 2,30분에 먹냐?" - pp.105~106

다른 예술작품들, 그림이나 소설, 연극과 영화, 심지어는 만화까지도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처럼, 드라마 역시 예술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현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막장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은, 방송계의 구조가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 좋은 구조이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의 가치가 막장 드라마를 선호하기 때문이고, 시청자들이 막장 드라마를 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돈이 최우선 가치이며, 방송계에서 돈은 곧 시청률이고, 막장 드라마는 시청률이 보장되는 상품입니다. 드라마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방법은 탑스타를 기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투자대비 효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중고 신인들을 기용해 값싸면서도 많은 주목과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막장드라마야말로 자본주의적 가치에 부합하는 예술상품입니다.

드라마의 주요 시청타겟은 전업주부들이며, 성공적인 드라마는 전업주부가 원하는 심리를 잘 만족시켜주는 드라마입니다. 막장드라마를 잘 만들기로 이름난 4명의 작가 모두 중년의 여성이라는 것도, 드라마와 중년 여성은 빼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 드라마를 보는 전업주부계층은 여성해방 이전의 마지막 세대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여성들이 실제로 커리어 우먼의 꿈을 실현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반면, 그들은 그럴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드라마는 그들의 심리를 대리만족시켜줍니다. 드라마에서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만 나온다면, 시청자들은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입니다. 때문에 막장 드라마를 보며 자신의 인생은 이만하면 괜찮다는 안도감을 얻고,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들의 행동에 욕 하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심지어는 현실에서 막장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드라마 자체가 목적이라면 드라마의 줄거리, 앞뒤 이야기, 전개의 타당성과 진실성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드라마의 예술성과 작품성, 드라마로서의 가치가 중요한 평가기준이 된다. 하지만 드라마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는 절대 A급 문화가 필요하지 않다. B급 문화만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 p.188

성공한 드라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그 드라마가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는 지금 당장 끌려서 먹는 불량식품과 같습니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막장 드라마를 다시 보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먹을 성질의 것이 아니고, 새로운 불량식품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이런 막장드라마의 형태가 비단 드라마의 문제만이 아닌, 한국 문화의 전체적인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한국문화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고, 대중적이지만 예술로서,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인정되지 못하는 B급 문화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B급 문화 자체는 나쁠 것이 없지만, B급 문화밖에 없는 문화라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한국 사회는 문화 그 자체에 목적을 둔 적이 없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건 작품 그 자체가 평가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핵심은 경제, 돈이며, 문화는 언제나 수단적인 존재였습니다. 정치권도 경제, 경제만을 이야기하고, 사회도 경제, 경제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 유치원 들어가는 것, 국제 중고등학교 들어가는 것, 수능 잘 보는 것, 토익 잘 받는 것, 좋은 곳에 취업하는 것, 좋은 차 사는 것, 해고당하지 않는 것이지 미술관에서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 사색할 수 있는 책을 보는 것, 깊이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문화는, 대중문화는, 드라마는, 돈 버느라 지친 몸을 휴식하기 위해 잠시 보는 수단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B급 드라마, 막장 드라마를 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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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7-22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장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실을 제대로 짚은 내용이군요. 막장 드라마를 불량식품에 비유한 부분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