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동양고전 슬기바다 5
추적 지음, 백선혜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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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전(古典)은 위대하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영향을 끼쳐 온 고전들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 탁월한 대중성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정신을 꿰뚫고 있다.

고전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여타 책과는 사뭇 다르다. 단순히 정보를 습득하고 기억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내게 전달해준다. 그것은 마치 완성된 하나의 요리를 먹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서도 요리의 가치가 있는 식재료를 받은 느낌이다. 그 풍부한 만족감은 고전이란 것이 단순히 말뿐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게 해준다. 더 도약할 수 있는 느낌, 사색에 잠길 수 있게 하는 고전의 힘은 그야말로 위대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의 책읽기엔 문제점이 있다. 이번에 느낀 거지만, 나의 책 선정은 지나칠 정도로 외국서적에 치중되어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내 방의 책장을 보면 거진 60여권의 책이 모두 외국인의 책이다. 외국도 거의 대다수는 서양인의 서적이고, 동양인의 서적이라곤 무함마드 유누스나 달라이라마 정도랄까, 누가 보면 편애하고 있다고 말해도 변명거리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동양서적의 수준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치, 사회적으로 끼친 영향력은 고려하지 않고 순수한 학문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성리학만 해도 영남학파의 이기이원론이나 기호학파의 기발이승일도설 등 사람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고자 했던 철학적 수준은 서양의 그것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동양의 학문이 18세기까지만 해도 더 앞서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도 그것을 인정하기는 하나, 근래의 현대 사회문제에 관련된 책은 개인적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단연 서양쪽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18세기 이전의 동양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비록 타의로 접하게 되었지만 꽤 흥미로운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근래의 한국서적들에 흥미를 잃어버린 나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자극이 될지도 모른다.

명심보감은 요근래의 책과 비교하자면 자기계발서에 비교될거 같다. 실제로 자기계발서 부류의 베스트셀러였던 시크릿이나 그 외 유명 서적들 대부분은 명심보감과 같은 고전을 바탕으로 씌여져 있었다. 서점에서 슬쩍 봤을때의 기억으로는 손자병법의 글귀에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심보감 또한 그 이전의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모아놓은 책이니, 성질적으론 동일한 성질의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책의 효과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선해야 한다는 것 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선해지라는 책을 접함으로 인해서 마음을 다짐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각종 심리학적인 실험만 봐도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쉽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대중효과만 고려해도 이런 책을 주변에서 읽어주고 실행해주기만 해도 덩달아 행동이 변화하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명심보감은 오랜 세월 입증되어 온 책이다. 순수하게 이 책만의 영향력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문화가 오래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의 효과를 입증하고 있다. 수많은 사상의 바탕이 되어 준 고전이 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유별나게 뛰어난 부분이 있다. 고전의 영향력은 엄청나지만, 그 영향력이 꼭 좋은 방향으로만 흐른다고는 할 수 없다. 독재정치를 옹호할 수도 있고, 현대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고, 과격한 민족주의를 옹호함으로서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치닫는 사상도 있었다. 결국 과거 사상의 변화에 큰 틀이 되었을 뿐 고전이라는 것이 현재의 사회에 적용시키기엔 무리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 명심보감은 그러한 느낌이 놀라울 정도로 적다.

특정 사상을 연호하거나 과학적 발견을 말하는 책이 아니니만큼 책의 내용이 무난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야 말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진리인 것이 아닐까? 이러한 오랜 세월 속에서도 아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때로는 짧은 성찰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위대한 것이 아닐까? 남녀평등시대에 과거 남성우위의 사상은 고쳐야 할 점임은 분명하다. 허나 그 외의 부분, 효, 예, 인, 덕 등과 같은 미덕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원한 동물적인 미덕이 아닐까. 비록 현대의 급격한 서구화에 효와 같은 덕목에 대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양과 동양에서 효를 하는 방식에서의 차이였지 결코 효라는 미덕의 부정은 아니였다. 늙었을 때 노인을 모시지 않아도 노인끼리 자립해 나가는 모습이 옛 동양적 사고관에서는 부정적으로 비춰졌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효라는 미덕의 부정은 아닐뿐더러 요새는 오히려 그러한 부분을 우리 사회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이 은퇴후에 경제적 능력이 없는 부모를 내버리는 짓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효는 살아있고, 다른 미덕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하다면, 이 명심보감의 교훈도 계속 살아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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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픽 - 운전습관과 교통체계에 숨겨진 인간의 비이성적 본성 탐구
톰 밴더빌트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김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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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운전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운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방향지시등을 켠 채로 계속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이나, 전화하는 사람, 심지어 컵라면을 먹으면서 운전하는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도로 위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들은 다양한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왜 평상시에는 점잖고 자상한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돌변하는가? 왜 내 차선만 막힐까? 왜 정체가 생길까? 나는 정말 운전을 잘 하는 것일까? 저자는 다양한 사회학, 심리학적 방법 등을 사용해 운전자들의 습관과 교통체계에 숨겨진 인간의 비이성적인 본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운전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말을 흔히 하곤 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운전자들은 운전대를 잡으면 돌변합니다. 안타깝게도 변화는 부정적인 형태로 향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운전자들이 야누스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운전자의 환경은 필립 짐바르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썩은 사과상자와 같습니다. 자동차의 경우 외부와 차단되어 있고 익명성을 가지며, 다른 운전자와 커뮤니케이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운전할 경우 우리는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지 못합니다. 운전대 앞에 앉은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는 식으로 달려가는데, 이러한 환경은 커뮤니케이션 부재 현상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한 운전자는 자동차가 곧 자신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옆좌석이나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흥분하지 않을 상황이 오더라도 운전자는 흥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인지 알 수 있는 표시와 인간적인 접촉 기회를 없애면 인간은 말 그대로 비인간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운전자가 화를 내는 상황은 대부분 운전자의 운전 미숙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운전자의 절대 다수는 자신의 운전 실력을 평균 이상이라고 대답합니다. 심리학자는 이러한 인간의 과대평가 현상을 낙관적 편견이라 부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운전자에게 민폐를 끼치는 운전자의 대부분은 평소에 자신이 운전을 잘한다고 과시하는 운전자들입니다. 운전자가 자신의 운전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이유는 운전 실력을 정확히 평가할 실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고속도로는 운전자의 평판을 평가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피드백을 받고, 개선할 기회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근거해 미국에서는 드라이브캠 이라는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운전자의 운전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실력을 개선시켜주는 서비스입니다.

운전은 1500개 이상의 작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기술인데, 뇌 수술 전문 외과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것이 바로 운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전을 아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운전을 과잉 학습 행동이라고 부르는데, 일단 익히고 나면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전은 엄밀히 말하자면 눈앞의 고릴라를 보지 못하고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눈과 마음이 운전중에 보여주는 다양한 착시 현상과 방심은 운전을 많은 사람들이 접하기 쉽게 해주기도 하지만, 예외적 사건이 발생했을 시 대응하기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운전자들의 심리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교통정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운전자가 무심코 스마트폰을 잠깐 본 시간 때문에 파도 현상이 생겨 도로가 정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정체에 대응하기 위해 도로를 더 넓히고, 더 많이 건설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체를 사라지게 하지 못합니다. 도로의 추가 건설은 새로운 자동차 수요를 불러와 통행량 증가로 이어집니다. 주차 문제 또한 교통정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데, 통계를 보면 자동차들은 운행시간만큼의 시간을 주차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차와 관련된 문제는 거리에 주차공간이 부족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료 혹은 저렴한 주차공간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무료 혹은 저렴한 주차공간이 있기 때문에 운전자들은 그러한 공간을 찾아 낮은 속도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러한 행동이 교통정체를 발생시킵니다. 개인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개별적인 행동이 집단에는 어리석은 결과를 초래하는 사례인 것입니다.

정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차선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추돌 사고를 덜 내는 대책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운전자들이 교통사고를 덜 내게 하려면 좀 더 안전한 시스템 구축을 하면 된다고 직관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시스템이 실제로는 더 안전하고, 우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시스템은 실제로 더 위험합니다. 교차로 시스템은 로터리 시스템보다 위험하며,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도로에 설치된 수많은 교통 표지판들은 대부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한 신호들은 운전자들의 심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차선이 없는 도로가 오히려 안전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몬더만은 알데하스케의 중심 도로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그는 그 거리를 자동차, 자전거, 보행자가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을 없앤 것이다. 차도와 인도를 완전히 분리하면 운전자는 '차도 공간은 모두 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속도를 내 운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이 나만의 길이 아니라 내 차 앞으로 얼마든지 어린이가 지나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서행하게 된다. 몬더만은 물리적 강제로 감속 효과를 유발하기보다는 심리적 교통 진정 대책으로 알려진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 p.429 

도로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현상들은, 인간 내면의 축소판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일면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교통량이 적은 도로변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더 많은 교통량을 유발하는 반면, 교통량이 많고 시끄러운 도로변에 사는 사람들은 더 적은 교통량을 유발하는 모습은, 결국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방법으로서 자동차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부패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교통사고가 많고, 남성 운전자가 여성 운전자보다 위험하고, 검은 차가 흰색 차보다 위험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저자의 질문처럼 자동차 운전자는 왜 자전거나 오토바이 운전자처럼 헬멧을 착용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자동차라는 교통 수단이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 지금, 도로에 내재된 비이성적인 부분을 개선함으로써 좀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제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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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디씨 - 디시, 잉여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인류학
이길호 지음 / 이매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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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하나의 기술에 불과했던 인터넷은, 이제는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기초생활 수급자도 인터넷요금 감면 혜택을 받으며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표현하는 단어들, 정보고속도로, 지구촌, 디지털 도시 등과 같은 네트공간의 은유는 모두 공간지향의 은유입니다. 공간은 그 자체로, 또 그 자체를 위하여 구상됩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바깥에서 공간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함을 나타냅니다. 인터넷이 단순히 디지털 기술이 아닌 공간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인터넷을 공간으로 이해하고, 인터넷을 공간으로 꾸미려고 시도합니다.

인터넷을 표현하는 가장 영향력이 큰 은유는 '정보의 바다'라는 은유입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뒤에 붙은 첨가어 스페이스의 경우 무한 너비의 공간, 한때 모험가와 발견가가 늘상 즐겨 선택하던 영역이던 실재의 바다처럼 아직은 발견하고 탐구해야 하는 공간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이버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다의 은유와 결합시키고, 그리하여 우리는 정보의 바다와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현실공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가능성의 공간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가상 세계,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는 실재의 삶이 제공해주는 것을 넘어서야 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열광자들은 초기 인터넷을 만들면서 인터넷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임을 제창했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는 실제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했던 적이 없는 자유가 존재해야 했습니다. 이 세계 속에서는 강제와 사회적 통제는 낯선 외국이어야만 했고,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했으며, 평범한 생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성차가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자의적으로 정체성을 가졌다가 또 그로부터 다시 벗어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출신이 중요해서도 안 되고, 주변적으로 밀려난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이 세계에서는 펼칠 수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국가의 간섭과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이 기여한 바는 우리가 더 이상 공간을 주어진 절대항으로, 그 속에서 사회적인 것이 벌어지는 용기나 테두리로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생산된 것으로서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의사소통을 통하여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공간 이해는 모든 사회적 단계에서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여기서 정치적 공간 역시 제외되지 않는 바, 이런 새로운 공간관은 적어도 하나의 동일한 장소에서 참으로 다양한 공간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공간, 장소, 경계》p.312 

그러나 처음에는 경계가 없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점차 많은 경계가 생겨났고, 하나의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다중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가상화된 공간은 곧바로 공동체를 찾으며, 각각의 공동체들은 서로 외재적이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동질화된 거대 구조물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볼 때, 가상 세계는 실제 세계의 대안은 아니였습니다. 분명 실제의 세계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질적 실제와 네트의 가상 세계는 이제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무수히 다양하고 특별한 공간의 집합체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최근의 저서《어제까지의 세계》에서 전통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하면서 그러한 인류학적 접근이 가치 있다고 말하듯이, 이 책의 저자 이길호 역시 독특한 사회,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하며 그곳이 가진 의미를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국내 최대 커뮤니티 포털이라 불리우는, 디시 입니다.

디시의 기본적 의미는, 다른 사이버스페이스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 표출은 소통과 다른데, 디시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방적 증여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디시에서 만든 컨텐츠들, 생산물은 교환을 유발하는 매개 형식이 아니라, 그의 닉네임, 그의 존재 자체가 되며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집단인 갤러리의 이름으로 변화되고, 최종적으로는 '메이드 인 디시'가 됩니다. 디시에서 이름은 현실과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사쿠라를 빠는 누구누구', '개념글 조작하는 누구누구'와 같은 컨셉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 사람의 이름이 결정됩니다. 갤러들은 오직 갤러리에서 활동한 것만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갤러리에 대한 귀속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토의식은 이른바 전쟁, 다른 갤러리를 터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타 사이트와의 분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언론에도 보도된 2ch과의 사이버전 같은 사례입니다.

다른 갤러리와의 전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디시인들이 가진 갤러리의 죽음이라는 형태인데, 전쟁에서 글쓰기 버튼이 사라지는것은 곧 갤러리 자체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즉 갤러리라는 공간이 오래 존속하려면 끊임없는 재생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재생산은 갤러리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이른바 뉴비들의 유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디시는 갤러리의 폐쇄화를 가속하는 모든 요소를 처단해야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성 갤러에 대한 배척, 내부의 친목 행위 금지와 같은 것이였습니다. 여성갤러의 존재는 집단을 극도의 폐쇄성과 고착성 속으로 몰아넣었고, 가장 큰 부패의 상징으로 지목하는 친목 행위는 뉴비의 유입을 막아 집단의 붕괴를 초래했기 때문에 갤러리에서 어떤 친목 행위도 최악의 범죄로 여겨져 배척되며, 사람들은 언제나 친목 종자 들을 처단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생존의 필요성으로 인해 갤러리는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유연해야 하고, 어떤 차별도, 어떤 수직적 분화도 있어서는 안 되는, 흔히 말하는 '디시 스타일'이라는 모든 사람은 서로 완벽하게 평등하다는 극단적 평등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디시의 형태는 현실과 관련된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던 초기 인터넷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디시는 대표자를 거부하며,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제도화된 정치 체계를 거부했습니다. 디시는 초창기 시절부터 씨벌교황으로 대표되는 허세종자, 외부의 수직적 사회관계를 긍정하는 사람들을 부정하며 발전했고 집단의 평등 속에서 개별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디시는 민주적 양식을 거부하면서 민주주의적인 속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디시는 '민주주의적 혼돈의 수호자들'과 같은 행동을 보입니다. 이런 성향은 다른 사이버스페이스의 체계, 카페로 대표되는 계급주의와 위키로 대표되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으며, 다른 사이트에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디시는 여갤러, 허세종자 등의 악과 싸우고자 했고, 운영자와 사람들 사이에 체결되는 수직적 사회관계라는 악과 싸우고자 했으며, 이를 모두 거부함으로서 자신들이 악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뛰어난 전쟁 능력과 떡밥 창출 능력을 가진 유명닉들은 디시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결국 내부의 친목질로 인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내부의 적은 꾸준히 등장하고, 디시인들은 이에 대항해 꾸준히 싸우고, 끝없이 싸웁니다. '형제'들의 평등한 '공화국'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저자는 이러한 디시의 증여와 전쟁에 관한 모습을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사이버스페이스, 그중에서도 디시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가능케 해 줍니다. 이러한 접근은 필연적으로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앙리 르페브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공간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이며, 그러므로 공간을 형성해온 그 오랜 전략들의 자취를 다시 찾아냄으로써 결국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한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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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연구
이복규 지음 / 박이정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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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책이 발견됩니다.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묵재공파 문중에서 소장해 온《묵재일기》에서 찾아낸 이 책은 채수(1449~1515)가 쓴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이자 최초의 한글소설,《설공찬전》이였습니다. 설공찬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혼이 돌아와 남의 몸을 빌어 이승에 머물면서 자신의 원한과 저승의 일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전기물(傳奇物)로서《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할 정도로 큰 사회적 충격을 가져온 작품입니다.

전북 순창을 배경으로 하는《설공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금오신화》이후《기재기이》가 나오기까지 80년에 이르는 한국 소설사의 공백을 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설공찬전》의 원본은 한문이였지만, 한글로 번역되어 유통되었기 때문에 한문본밖에 없었던 이전의 책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서 공식적으로 '설공찬전'이라고 불렀던 것과 달리 발견된 것은 제목이 '설공찬이'라고 써져 있었는데, 이는 한문학의 관습에 따라 전으로 끝나지 않고 한글의 인칭접미사 이를 붙이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설공찬전》이 최초의 한글소설인지는 약간 논란이 있습니다. 이는 한글소설의 정의에 따라 다른 것으로, 창작 당시에 작가가 한글로 지은 소설인 창작한글소설을 한글소설로 볼 수도 있고, 원작은 한문이지만 한글로 번역, 유통한 경우 한글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엔 한문과 한글이 같이 사용되었고, 같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쉽게 내리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복규 교수는 비록 원작이 한문이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에게 한글로 읽히고 들려진 최초의 소설이라는 데서 의미가 깊기 때문에《설공찬전》한글본은 엄연히 한국 문학사에서 한글로 유통, 수용된 최초의 한글소설임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이 작품은, 중종때 왕명으로 수거돼 불태워졌고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 이유로 불교의 가르침인 윤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유교를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에 맞지 않았고, 소설을 쓴 채수는 대사헌과 호조참판까지 역임한 고위층 인사라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왕권모독죄와 풍기문란죄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왕은 저승에 가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가 하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유교와 반대되는 여성평등사상을 내비쳤습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중종에게 있어서 이러한 내용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읽을 수 있는 한글본이였기 때문에 이 책의 파급력은《조선왕조실록》에서 우려할 정도가 되었고, 결국 금서로 지정되고 맙니다.

이 소설이 당시 여성평등과 같은 사상을 말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인 이복규 교수는《설공찬전》의 또다른 의의로 이 책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인《문화류씨세보》와 조종운(1607~1683)이 540여 문중의 보계를 수집하여 정리한《씨족원류》를 살펴본 결과, 이 책은 가장 먼저 대중들에게 한글로 배포된 영향력있는 책이였을뿐 아니라 최초의 실명소설이자 실화에서 유래한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 초기소설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입니다.

혼령이 등장하고, 이를 막는 퇴마사가 등장하는 등《설공찬전》은 현대 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플롯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 소설의 카테고리로 말하자면 판타지소설이나 라이트노벨과 같은 부류에서 많이 보이는 내용일 것입니다. 유령 이야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 불교적 메시지, 여성차별을 비판하는 사회적 메시지, 중국과 천자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메시지 등이 내포되어있는 아주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의 발견을 바라보면서 현대인의 생각이 근세 사회의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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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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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왜 맛있는 음식은 다 살찌는 음식일까?"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이어트가 괴로운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을 빼기 위해 생야채를 씹는 것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리처드 랭엄에 의하면, 인간은 생야채를 씹지 않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입니다. 진화를 하면서 생야채를 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야채를 씹지 않게 됨으로써 인간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진화의 기원에 무엇이 있었느냐고 물을 때 기독교인이라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대답했겠지만, 리처드 랭엄은 '태초에 음식이 있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찰스 다윈이 세계를 뒤흔든 저작《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후 어떻게 우리 인간이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직립원인의 출현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전통적인 이론은 '사냥꾼 인간 가설' 혹은 '육식 가설' 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인간이 점점 사냥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면서 육식의 비중을 높였고 육식으로 인한 많은 담백질 섭취가 뇌의 발달을 가져와 현재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 리처드 랭엄은 이 책《요리 본능》을 통해 다른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기존의 가설로는 인간이 다른 영장류에 비해 치아와 턱이 약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랭엄은 '화식(火食)가설'을 주장합니다.

기존의 진화론에서 불은 진화를 이룬 후 얻은 업적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랭엄은 음식을 불을 이용해 먹기 시작함으로써 진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익힌 음식의 장점은 그것이 맛있다는 것 외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음식은 익혀서 먹을 때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음식에 든 에너지를 소화할 수 있는 양이 더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같은 양의 음식이면 더 많은 에너지를, 적은 음식이라도 같은 에너지를 얻게 됨으로써 인간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익힌 음식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만은 아닙니다. 연구 결과는 침팬지부터 시작해서 곤충들까지도 익힌 음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익힌 음식의 장점은 현대의 생식주의자나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생식을 하면 가장 확실한 것은 체중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연구 결과 평균적으로 여성은 12킬로그램, 남성은 10킬로그램의 체중감소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체중감소는 현대사회의 미의식에는 부합할 지 모르나, 만성적 에너지 결핍 상태에 해당합니다. 과학자들은 엄격한 생식을 하면 적절한 에너지 공급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생식을 할 경우 인간은 번식 기능이 저하됩니다. 남성의 경우 성 기능이 줄어들었고, 여성의 경우 50퍼센트는 생리가 끊겼고 10퍼센트는 생리 불순을 겪었습니다. 생식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번식 능력의 저하는 진화의 측면에서 볼때 종의 전멸을 의미합니다.

익힌 음식이 날것보다 좋은 이유는 생명체의 삶이 주로 에너지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음식을 불로 익히는 조리가 가져오는 비타민 파괴나 독성이 있는 화합물의 생성이라는 부정적인 변화는 더 많은 열량을 얻을 수 있다는 효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 조상들이 처음으로 익힌 음식을 먹어 더 많은 열량을 얻었을 때, 그들과 그 후손들은 날것을 먹는 같은 종의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하는 데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 p.112 

인간은 침팬지 등에 비교했을때 입이 작고, 턱이 약하고, 어금니가 작은 등 소화기관이 모든 면에서 왜소합니다. 이런 신체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익힌 음식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익힌 음식은 더 높은 에너지와 더 빠른 소화속도를 제공함으로써 높은 지능을 가진 두뇌나 작은 창자 등 인간의 몸을 합리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익힌 음식은 식사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여줌으로써 인류에게 여유시간을 제공했습니다. 익힌음식이 제공해준 여유시간은 문화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사회적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현대 사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더 맛있고, 더 부드럽고, 더 높은 열량을 지닌 음식을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그렇게 진화해온 인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발전으로 인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고운 가루, 더 부드러운 음식, 더 높게 농축된 열량을 지닌 음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류는 익힌 음식을 먹음으로써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데 성공했지만, 현대의 음식문화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합니다. 리처드 랭엄은 우리 조상이 익힌 음식을 선택함으로써 진화에 성공했음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익힌 음식을 보다 건강한 방향으로 개선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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