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연구
이복규 지음 / 박이정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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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책이 발견됩니다.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묵재공파 문중에서 소장해 온《묵재일기》에서 찾아낸 이 책은 채수(1449~1515)가 쓴 조선 최초의 금서(禁書)이자 최초의 한글소설,《설공찬전》이였습니다. 설공찬이 죽어 저승에 갔다가 혼이 돌아와 남의 몸을 빌어 이승에 머물면서 자신의 원한과 저승의 일을 기록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전기물(傳奇物)로서《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할 정도로 큰 사회적 충격을 가져온 작품입니다.

전북 순창을 배경으로 하는《설공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금오신화》이후《기재기이》가 나오기까지 80년에 이르는 한국 소설사의 공백을 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설공찬전》의 원본은 한문이였지만, 한글로 번역되어 유통되었기 때문에 한문본밖에 없었던 이전의 책들과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서 공식적으로 '설공찬전'이라고 불렀던 것과 달리 발견된 것은 제목이 '설공찬이'라고 써져 있었는데, 이는 한문학의 관습에 따라 전으로 끝나지 않고 한글의 인칭접미사 이를 붙이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설공찬전》이 최초의 한글소설인지는 약간 논란이 있습니다. 이는 한글소설의 정의에 따라 다른 것으로, 창작 당시에 작가가 한글로 지은 소설인 창작한글소설을 한글소설로 볼 수도 있고, 원작은 한문이지만 한글로 번역, 유통한 경우 한글소설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엔 한문과 한글이 같이 사용되었고, 같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는 쉽게 내리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복규 교수는 비록 원작이 한문이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조선 백성들에게 한글로 읽히고 들려진 최초의 소설이라는 데서 의미가 깊기 때문에《설공찬전》한글본은 엄연히 한국 문학사에서 한글로 유통, 수용된 최초의 한글소설임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이 작품은, 중종때 왕명으로 수거돼 불태워졌고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 이유로 불교의 가르침인 윤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유교를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에 맞지 않았고, 소설을 쓴 채수는 대사헌과 호조참판까지 역임한 고위층 인사라 대중들에게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왕권모독죄와 풍기문란죄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왕은 저승에 가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가 하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유교와 반대되는 여성평등사상을 내비쳤습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중종에게 있어서 이러한 내용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읽을 수 있는 한글본이였기 때문에 이 책의 파급력은《조선왕조실록》에서 우려할 정도가 되었고, 결국 금서로 지정되고 맙니다.

이 소설이 당시 여성평등과 같은 사상을 말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인 이복규 교수는《설공찬전》의 또다른 의의로 이 책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인《문화류씨세보》와 조종운(1607~1683)이 540여 문중의 보계를 수집하여 정리한《씨족원류》를 살펴본 결과, 이 책은 가장 먼저 대중들에게 한글로 배포된 영향력있는 책이였을뿐 아니라 최초의 실명소설이자 실화에서 유래한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국 초기소설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보입니다.

혼령이 등장하고, 이를 막는 퇴마사가 등장하는 등《설공찬전》은 현대 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플롯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 소설의 카테고리로 말하자면 판타지소설이나 라이트노벨과 같은 부류에서 많이 보이는 내용일 것입니다. 유령 이야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 불교적 메시지, 여성차별을 비판하는 사회적 메시지, 중국과 천자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는 메시지 등이 내포되어있는 아주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이런 소설의 발견을 바라보면서 현대인의 생각이 근세 사회의 사람들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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