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디씨 - 디시, 잉여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의 인류학
이길호 지음 / 이매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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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기술에 불과했던 인터넷은, 이제는 현대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기초생활 수급자도 인터넷요금 감면 혜택을 받으며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표현하는 단어들, 정보고속도로, 지구촌, 디지털 도시 등과 같은 네트공간의 은유는 모두 공간지향의 은유입니다. 공간은 그 자체로, 또 그 자체를 위하여 구상됩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바깥에서 공간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함을 나타냅니다. 인터넷이 단순히 디지털 기술이 아닌 공간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인터넷을 공간으로 이해하고, 인터넷을 공간으로 꾸미려고 시도합니다.

인터넷을 표현하는 가장 영향력이 큰 은유는 '정보의 바다'라는 은유입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뒤에 붙은 첨가어 스페이스의 경우 무한 너비의 공간, 한때 모험가와 발견가가 늘상 즐겨 선택하던 영역이던 실재의 바다처럼 아직은 발견하고 탐구해야 하는 공간과 상관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이버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다의 은유와 결합시키고, 그리하여 우리는 정보의 바다와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현실공간과는 전적으로 다른 가능성의 공간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가상 세계,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는 실재의 삶이 제공해주는 것을 넘어서야 했던 것입니다.

인터넷 열광자들은 초기 인터넷을 만들면서 인터넷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임을 제창했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는 실제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했던 적이 없는 자유가 존재해야 했습니다. 이 세계 속에서는 강제와 사회적 통제는 낯선 외국이어야만 했고, 전 세계의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했으며, 평범한 생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하며, 성차가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자의적으로 정체성을 가졌다가 또 그로부터 다시 벗어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출신이 중요해서도 안 되고, 주변적으로 밀려난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이 세계에서는 펼칠 수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국가의 간섭과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이 기여한 바는 우리가 더 이상 공간을 주어진 절대항으로, 그 속에서 사회적인 것이 벌어지는 용기나 테두리로 이해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 비로소 생산된 것으로서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의사소통을 통하여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공간 이해는 모든 사회적 단계에서 대단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여기서 정치적 공간 역시 제외되지 않는 바, 이런 새로운 공간관은 적어도 하나의 동일한 장소에서 참으로 다양한 공간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공간, 장소, 경계》p.312 

그러나 처음에는 경계가 없던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점차 많은 경계가 생겨났고, 하나의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다중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가상화된 공간은 곧바로 공동체를 찾으며, 각각의 공동체들은 서로 외재적이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동질화된 거대 구조물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볼 때, 가상 세계는 실제 세계의 대안은 아니였습니다. 분명 실제의 세계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질적 실제와 네트의 가상 세계는 이제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이버스페이스는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무수히 다양하고 특별한 공간의 집합체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최근의 저서《어제까지의 세계》에서 전통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하면서 그러한 인류학적 접근이 가치 있다고 말하듯이, 이 책의 저자 이길호 역시 독특한 사회,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하며 그곳이 가진 의미를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국내 최대 커뮤니티 포털이라 불리우는, 디시 입니다.

디시의 기본적 의미는, 다른 사이버스페이스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 표출은 소통과 다른데, 디시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일방적 증여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디시에서 만든 컨텐츠들, 생산물은 교환을 유발하는 매개 형식이 아니라, 그의 닉네임, 그의 존재 자체가 되며 더 나아가 그가 속한 집단인 갤러리의 이름으로 변화되고, 최종적으로는 '메이드 인 디시'가 됩니다. 디시에서 이름은 현실과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사쿠라를 빠는 누구누구', '개념글 조작하는 누구누구'와 같은 컨셉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 사람의 이름이 결정됩니다. 갤러들은 오직 갤러리에서 활동한 것만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갤러리에 대한 귀속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토의식은 이른바 전쟁, 다른 갤러리를 터는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타 사이트와의 분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언론에도 보도된 2ch과의 사이버전 같은 사례입니다.

다른 갤러리와의 전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디시인들이 가진 갤러리의 죽음이라는 형태인데, 전쟁에서 글쓰기 버튼이 사라지는것은 곧 갤러리 자체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즉 갤러리라는 공간이 오래 존속하려면 끊임없는 재생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재생산은 갤러리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이른바 뉴비들의 유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디시는 갤러리의 폐쇄화를 가속하는 모든 요소를 처단해야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성 갤러에 대한 배척, 내부의 친목 행위 금지와 같은 것이였습니다. 여성갤러의 존재는 집단을 극도의 폐쇄성과 고착성 속으로 몰아넣었고, 가장 큰 부패의 상징으로 지목하는 친목 행위는 뉴비의 유입을 막아 집단의 붕괴를 초래했기 때문에 갤러리에서 어떤 친목 행위도 최악의 범죄로 여겨져 배척되며, 사람들은 언제나 친목 종자 들을 처단하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생존의 필요성으로 인해 갤러리는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유연해야 하고, 어떤 차별도, 어떤 수직적 분화도 있어서는 안 되는, 흔히 말하는 '디시 스타일'이라는 모든 사람은 서로 완벽하게 평등하다는 극단적 평등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디시의 형태는 현실과 관련된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던 초기 인터넷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디시는 대표자를 거부하며,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제도화된 정치 체계를 거부했습니다. 디시는 초창기 시절부터 씨벌교황으로 대표되는 허세종자, 외부의 수직적 사회관계를 긍정하는 사람들을 부정하며 발전했고 집단의 평등 속에서 개별성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디시는 민주적 양식을 거부하면서 민주주의적인 속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디시는 '민주주의적 혼돈의 수호자들'과 같은 행동을 보입니다. 이런 성향은 다른 사이버스페이스의 체계, 카페로 대표되는 계급주의와 위키로 대표되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으며, 다른 사이트에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디시는 여갤러, 허세종자 등의 악과 싸우고자 했고, 운영자와 사람들 사이에 체결되는 수직적 사회관계라는 악과 싸우고자 했으며, 이를 모두 거부함으로서 자신들이 악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뛰어난 전쟁 능력과 떡밥 창출 능력을 가진 유명닉들은 디시의 부흥을 이끌었지만, 결국 내부의 친목질로 인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내부의 적은 꾸준히 등장하고, 디시인들은 이에 대항해 꾸준히 싸우고, 끝없이 싸웁니다. '형제'들의 평등한 '공화국'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저자는 이러한 디시의 증여와 전쟁에 관한 모습을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사이버스페이스, 그중에서도 디시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가능케 해 줍니다. 이러한 접근은 필연적으로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앙리 르페브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공간은 정치적이고 전략적이며, 그러므로 공간을 형성해온 그 오랜 전략들의 자취를 다시 찾아냄으로써 결국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한 발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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