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 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 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 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오늘, 쉰이 되었다' 중에서 - 




5년 전 늦여름, 동망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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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못을 빼내려다 못대가리가 떨어졌다
남은 못 몸뚱아리 붉게 녹슬어 있다
못을 박은 벽지 가장자리가 벌겋게 물들어 있다


지나버린 시간들이 있다
탱탱하게 녹이 슨 대못처럼 어쩔 수 없이 길들어진
내 가슴 가운데를 물들여놓은 시간들이 있다


더는 박을 수도 뽑을 수도 없는
더는 아무것도 아닌 무엇도 되지 못하는
그렇게 주저앉은 시간의 궁지窮地


- 홍경나, '녹(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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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중 담은 사진에 제목을 '봄밤'으로 붙일까 싶어 시들을 뒤졌다. 노릇하게 데워진 바람의 무릎이 세상 모든 창을 타넘는다는 류경무. 앞산을 바라보다 눈물이 나오기 전 아는 시인에게 쓸데없이 전화를 걸었다는 최병무. 그대가 이 봄밤 어느 마당가에 한 그루 살구나무로 서서 꽃을 피워내고 있다는 안도현. 봄밤엔 볕을 보지 않아도 되건만 네 얼굴이 더욱 빛나 아프다는 이성복.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이라는 김수영. 굴러다니는 빈 바람 소리 싣고서 겨우내 말라붙은 꿈을 적시며 떠도는 발들의 아픔이라는 최승자.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다는 변영로. 그러나 내게 가장 사무치는 봄밤 정취라면, 김윤아의 야상곡이다. 사진은 폐기한다.

 

 

 

 

바람이 부는 것은
더운 내 맘 삭여주려
계절이 다 가도록
나는 애만 태우네

 

꽃잎 흩날리던 늦봄의 밤
아직 남은 님의 향기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애달피 지는 저 꽃잎처럼
속절없는 늦봄의 밤
이제나 오시려나
나는 애만 태우네

 

구름이 애써 전하는 말
그 사람은 널 잊었다
살아서 맺은 사람의 연
실낱 같아 부질없다

 

꽃 지네 꽃이 지네
부는 바람에 꽃 지네
이제 님 오시려나
나는 그저 애만 태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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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 2019-05-24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맙습니다. 순수의 전조 번역자를 찾아 왔다가 김윤아까지 듣네요. 고맙습니다.

풀무 2019-08-31 19:21   좋아요 0 | URL
제가 고맙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다시 한번 보리라 했으나 게으름 탓인지 생활에 묻혔단 핑계로 넘기고 넘겨 지금까지 왔다. 3년 전, [사요나라 이츠카]를 보면서 가장 밀접하게 연상되던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연출작 [순수의 시대]였다. 당시 작성한 리뷰를 들춰보면, '관습과 제도의 울타리를 이용해 사랑을 지켜내는 미츠코와 타인들의 편견 앞에 애석한 마음을 꺾어 묻어버린 토우코, 그녀들 사이에서 세간의 시선을 방패막 삼지만 뒤늦게 본심을 깨닫는 유타카의 삼각 관계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를 그대로 연상시킨다'라고 적혀 있다. 그 때의 내겐 유타카(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츠코(이시다 유리코), 토우코(니카야마 미호)가 그대로 뉴랜드(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메이(위노나 라이더), 엘렌(미셸 파이퍼)에 겹쳐졌던 셈이다. 허나 다시금 돌이킬 때, 전자가 탈역사화된 시공간을 무대로 동시대와는 철저히 분리된 해방구를 그리며 로맨틱한 감정 및 회한에 방점을 찍었다면, 후자는 인물과 관계 자체에 시대 및 구조가 땀땀이 새겨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1994년 가을, 동숭동에 있던 개봉관에서 봤으니 벌써 20년 넘게 흘렀다. 어제 관련 네이버 캐스트를 접하고 오늘은 알라딘 도서 정보에서 주요 문구들을 찾아 읽는데, 문장마다 콕콕 박히면서 23년 전 본 뒤로 큰 줄기 외엔 모두 기억에서 유실됐다 여겼던 영화 속 장면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얼마나 가슴을 뒤흔드는지 모르겠다. 요참에 영화 말고 아예 원작 소설을 읽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진다.

 

 

  

 

 

 

 

 

 

 

뉴랜드는 진지하지만 차분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약혼녀의 환하게 빛나는 미모, 건강, 우아한 태도와 민첩한 머리 회전, 책과 사상에 대한 수줍은 관심에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솔직하고 충실하며 용감했고, 그의 농담에 웃어 주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유머 감각도 있었다. 순진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쾌락에 눈뜨게 될 강렬한 열정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한번 슬쩍 훑어 보면 이 모든 솔직함과 순진함이 단지 인공적으로 꾸며진 데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낙담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본능적으로 뒤틀린 교활함에 가득 차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순수가 어머니, 숙모, 할머니들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선조들의 음모로 교묘하게 조작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왕처럼 마음껏 부술 수 있는 눈으로 빚은 조각인 양 그가 원하고 가질 관리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강요되어 왔다는 점 때문에, 이 순수에 억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p.62 -

 

"함께 떠나고 싶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 그 밖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그런 곳으로." 웃던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당신.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요? 그런 곳에 가 본적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곳을 찾으려 시도한 이들이 한둘 아니에요. 내 말을 들어요. 그들은 모두 잘못된 역에서 내렸어요. 볼로뉴, 몬테카를로 같은 곳 말이죠. 그곳은 그들이 뒤에 두고 떠나온 세계와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더 작고 음침하고 난잡하다는 것만 빼고 말이죠."  - p.356 -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이제 자신이 관습 속으로 얼마나 깊이 가라앉아 버렸는가를 절감했다. 의무를 다한다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그 밖의 다른 일을 하는 데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놓친 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 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복권에는 셀수도 없는 많은 표가 있었지만 상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기회를 잡는다는 건 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 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라는 평을 받았고 메이가 막내를 간호하다가 옮은 폐렴으로 갑자기 죽었을 때에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들이 함께한 긴 세월을 통해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즁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 p.425~426 -

 

"아버지, 올렌스카 부인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랑 그분은 보통사이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었나요?" "아름답다고? 모르겠다. 그녀는 달랐어." "아 바로 그거였군요!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랑이 시작되기 마련이죠."  - p.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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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순,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 고성·화진포·속초 등지로 휴가를 다녀왔다. 가장 몰입된 순간은 숙소 바로 앞에 펼쳐진 동해 바다 일출을 보던 여행 이틀째 아침이었다.

 

 

이른 새벽 잠이 깬 둘째와 해맞이 준비

 

 

곧 첫째도 합류

 

 

날씨 탓인지 동명일기 식의 극적인 장관은 없었다.

 

 

일출인지 낙조인지 모를. 헌데 나는 그래서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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