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넌트 (하숙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 로만 폴란스키 외 출연 / 예중미디어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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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프랑스 거주 기간 동안 연출하고 직접 주연까지 맡은 1976년작 [테넌트]는 한마디로 사람이 과대망상으로 분열되며 침몰하는 과정을 섬뜩하게 표현한 영화다. 1965년작 [혐오], 1968년작 [로즈마리의 아기]와 '아파트 3부작'으로 엮이곤 하는데 감독 자신이 트릴로지를 염두에 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 작품 모두 '대도시 아파트'라는 공간성을 활용, 일관되게 음침한 시선으로 폐소공포와 광장공포가 뒤섞인 악몽적인 기조를 자아내며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소외되어 허물어지는 인물의 심리 양상을 치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인 연작으로 봐도 무방할 성싶다. [혐오]의 경우 런던 배경으로 미혼녀 캐롤(카트린느 드뇌브)의 광기와 그 원인으로 작용한 트라우마를, [로즈마리의 아기]는 뉴욕 중산층 임산부 로즈마리(미아 패로우)가 겪는 일련의 지옥도를 그렸다면 [테넌트]는 프랑스 시민으로 파리에 살고 있는 동구권 출신 변방인이자 제목 그대로 세입자인 중년 독신남 트렐코프스키(로만 폴란스키)의 불안을 쫓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주요 배경을 이룰 파리 시내 노후한 맨션 건물 면면을 왜곡된 비대칭 앵글로 몇 분이고 훑는다. 폴란드계 회사원 트렐코프스키가 관리소를 찾아 빈 방을 문의하고 집주인 무슈 지(멜빈 더글라스)와 지난한 흥정 및 협상 끝에 입주하게 된다.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이전 세입자였던 '슐르'라는 여성은 원인 모를 투신 자살을 시도, 치명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이다. 모두 그녀가 곧 죽을 거라 입을 모으지만 혹시 회복돼 돌아오면 트렐코프스키 입장에선 불리한 조건으로 방을 빼줘야 한다. 생사 여부 확인차 찾은 병실에서 트렐코프스키는 슐르의 오랜 친구라는 스텔라(이자벨 아자니)를 만나게 되고 왠지 불길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의 그녀와 어정쩡한 상태로 브루스 리의 [용쟁호투] 관람 뒤 귀가한 트렐코프스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의 슐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허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정작 그때부터 괴이쩍은 사건·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민감하거나 괴팍한 이웃들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렇잖아도 소심한 성격이던 트렐코프스키는 점점 위축되면서 신경쇠약 및 환각에 시달리다 입주민들은 물론 스텔라와 그외 인물들까지 도시 전체가 자신을 짓누르며 죽은 슐르를 대체할 희생양으로 낙점, 죽음으로 몰고가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여장까지 해가면서 불가항력으로 슐르의 페르소나에 몰입하는가 하면 괴물로만 비치는 타인들 틈에 살아남으려 필사적이던 트렐코프스키는 결국 정신줄을 놓고 연거푸 투신 자살을 감행한다. 슐르가 죽어간 병실 18번 침대에 그대로 누워 온통 붕대를 휘감은 트렐코프스키가 자신이 바로 다름 아닌 슐르였다고 믿으면서 카메라를 향해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편의상 '환각'이니 '과대망상', '미쳐간다' 등의 어휘를 썼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모든 현상과 사건 및 행적의 진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정상과 비정상 여부를 쉽게 단정지을 수 없도록 불확실하게 연출된 점이야말로 [테넌트]의 미덕이고 로만 폴란스키의 거장다운 면모다. 시신경 자극만으로 축축한 악취까지 화면 밖으로 진동케 만드는 폴란스키의 카메라에 빠져들다 보면 신경증적인 강박과 불안에 삼켜진 트렐코프스키에 그대로 전이되면서 갖은 현실 균열의 징후와 그 인지에서 비롯한 고립감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여전히 내게 있어 로만 폴란스키 최고작은 [로즈마리의 아기]다. 허나 [로즈마리의 아기] 속 로즈마리는 자신을 지탱하는 끈을 놓지 않았고  [혐오]의 캐롤에게선 그 끈의 마디와 매듭이 제시된 데에 반해 [테넌트]의 끈은 밑없는 나락으로 빨려든다. 그에 매달린 트렐코프스키는 영화 진행과 함께 점점 분계선을 넘어 임계치에 달하고, 그 차이가 [테넌트]의 맨션을 도시 문명의 축소판으로, 트렐코프스키란 인물을 난파된 현대인 또는 박해받는 이방인의 표상으로 보이게 한다. 한편으론 폴란스키 본인이 직접 겪은 고충들 - [로즈마리의 아기] 개봉 뒤 사이비 종교 집단의 테러로 인한 아내 피살, 성추행 혐의로 유배되다시피 프랑스로 떠나온 일 - 과 맞물려 자전적 요인에 기인한 압박감과 죄의식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본작을 통해서 로만 폴란스키가 진정 포착하고자 한 건 무슨 거창한 메시지나 세계의 반영이라기보다 진짜 위협과 공포를 마주한 인간의 민낯이다. 원인과 대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오감에 각인되는 그 생생하도록 역겹고도 황홀하기까지 한 불측지연의 통각이 [테넌트]를 수작의 반열에 놓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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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2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제가 아파트 3부작을 좋아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시각적 공포보다는 정신병리학작 공포가 영화 전체를 사로잡는데 이 맛이 꽤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풀무 2016-03-14 06:10   좋아요 0 | URL
로만 폴란스키의 천재성을 새삼, 재차 확인했달까요. 아파트 삼부작은 정말이지 쫄깃쫄깃합니다.
 
[수입] Macbeth (맥베스)(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Alpha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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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짧고 굵다 할 [맥베스]는 TV용까지 포함, 수십 차례 영화화된 소재다(IMDB 링크 참조). 그중 필견작을 꼽자면 세 버전을 들 수 있다. 나로선 가장 먼저 접한 맥베스 영화로, 원작에 충실하면서 표현주의 양식에 입각하여 욕망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맥베스의 불안 및 공포를 강렬하고도 묵직하게 눌러 담은 오손 웰즈 감독의 흑백 1948년작. 중세 스코틀랜드에서 일본으로 배경을 옮겨 대담하게 잔가지들을 쳐내고 굵고 큰 붓으로 일필휘지 그려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흑백 1957년작 [거미숲의 성]. 가장 어둡고 잔혹한 셰익스피어극으로 악명 높은, 인간 비판을 넘어선 혐오를 드러내며 폭력의 전시로 고어물에 진배 없었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색채 1971년작. 아직 못 본 작품이지만 한 편 더 보태자면 21세기 최고의 시네아스트라 할 헝가리 출신 벨라 타르 감독의 색채 1982년작까지. 그리고 개인적인 결론부터 적자면 이번 저스틴 커젤 감독의 색채 2015년작 [맥베스]의 경우 전술한 걸작들과 나란히 놓기가 망설여짐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눈여겨 볼 각색이란 생각이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에서 내게 가장 강렬하게 와닿은 요소라면 공들인 화면 구성과 색채 감각이다. 셰익스피어극을 영화화할 때 아무리 서사 골격과 내용에 충실하고 그 현란한 수사로 점철된 대사와 방백을 모두 옮긴다 하더라도 원전 이상으로 다층적인 뉘앙스를 품은 세계를 재현할 수 없다. 영화 작가라면 마땅히 극 해석을 가장 잘 드러내 전달할 표현 양식을 찾아야 하고, 전술한 세 거장 - 오손 웰즈, 구로사와 아키라, 로만 폴란스키 - 버전 모두 그에 성공한 경우다. 이에 저스틴 커젤 감독이 찾은 묘안은 스코틀랜드의 자연을 십분 활용하면서 핏빛과 잿빛을 번갈아 주조로 내세우는 모노톤 화면인 것으로 보인다. 광활하고도 다채로운 풍광과 대비되면서 왜소한 인간과 그 내면의 불안, 혼돈, 공허가 더욱 도드라진다. 화려함보다 강렬함에 방점을 찍은 단색 기조 색감은 광기와 죄책감을 오가며 갈등하는 맥베스의 심경을 효과적으로 대변하면서 극 중에 마치 한 편의 광시곡과도 같은 시정을 불어 넣는다. 다만, 절제된 정갈함이나 묵직함과는 동덜어져 보이는 시정의 과잉, 도취가 아쉽다. 온통 붉게 채색되는 유혈낭자 학살 현장과 황폐한 광야의 묘사가 기계적으로 나열되면서 때로 본연의 목표인 잔인한 욕망의 비주얼을 벗어나 이미지 때문에 서사 흐름 및 정서가 훼손되는가 하면, 의당 강조됐어야 할 대목들이 감지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흐트러지는 사단을 빚기도 한다.

 

 

관건은 이렇게 강렬한 영상으로 얼마나 탁월하고 차별화된 비전의 '맥베스'를 보여줬느냐일 것이다. 맹목적인 충심으로 반란을 제압한 스코틀랜드 글래미스의 영주 맥베스(마이클 패스벤더)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세 마녀의 예언과 아내의 부추김으로 자기 암시라도 받은 양 왕권을 향한 망집에 홀려 덩컨 왕(데이빗 듈리스)을 시해한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뒤 폭주하는 야심과 제동을 거는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으면서 옥좌를 지키기 위한 살육을 이어간다. 즉, 2015년 [맥베스] 역시 초라한 개인의 덧없는 욕망과 중독에 관한 드라마, 야욕이 파행을 부르고 그에서 비롯된 가책과 불안, 긴장과 우울이 인간을 잠식하며 자멸로 이끄는 이야기다. 다만 원작 및 고전 각색작들과 비교할 때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발견된다. 첫째, 맥베스 부부의 자기파괴적 야망, 왕위 찬탈 동기를 권력욕보다는 자식 잃은(후사가 없는) 아비와 어미의 고통, 트라우마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원작과 기존 맥베스 영화들은 전투 장면으로 서두를 열었던데 반해 본작은 맥베스 부부가 전쟁 내지 병고나 자연재해로 잃었을 아이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그 작의(作意)를 드러낸다.

 

 

이후 앨론 전투에 임박, 맥베스는 마치 죽은 아이의 투사체라도 되는 양 어린 소년병의 팔에 아대를 감고 얼굴에 전사의 표식을 그려주며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허나 그 소년을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하고 이때부터 맥베스의 무의식이 빚어낸 소년병의 혼령 내지 허상이 그 자신을 시종 따라 붙게 된다. 덩컨 왕 암살을 망설일 때 홀연히 나타난 소년의 환영이 단검을 들고 맥베스를 인도하는가 하면 마지막 맥더프(숀 해리스)와 결전을 벌일 때도 맥베스의 최후를 묵묵히 지켜본다. 즉, 본작은 맥베스가 전쟁통에 아이를 잃은, 상처받은 아버지라는 설정으로 재해석을 시도한다. 맥베스 부부의 야망이 권력에 대한 굶주림보다 상실감에서 비롯됐으며 삶의 의미가 퇴색된 허전함, 막막함을 채우려는 대리 충족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는 감독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다. 허나 '스스로는 왕이 되지 못하지만 대대손손 왕을 낳으리라'는 마녀들 예언이 바쳐진 뱅코우(패디 콘시딘)와 플리언스(로클란 해리스) 부자를 대하는 맥베스의 태도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함과 동시에 '젖을 먹여봐서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알지만 거사 앞이라면 젖꼭지를 빼고 머리통을 박살낼 것'이라든지 '내게서 여성을 거둬가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복수심으로 채워달라, 내 안에 들어와 여자의 젖을 담즙과 바꿔달라'는 맥베스 부인(마리옹 꼬띠아르)의 절규에 가까운 독백들이 예전과 다른 고통의 색을 띠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만들기도 한다.

 

 

두 번째 차이점은 본작의 카메라가 맥베스의 내면 이상으로 그 외연에도 초점을 맞춤으로써 구조적인 권력 동학에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맥베스는 뱅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가 자객의 손을 벗어나 도주했다는 소식에 이성을 잃고 발작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며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범행을 토해낸다. 이후 실성하다시피한 맥베스에 의해 표출되는 온갖 징후는 한 인간을 통째로 집어 삼켜버린 권력의 위세와 자장, 그것이 훑고 지난 자리에 남겨지는 폐허란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후 결말부에 이르면 '버넘 숲이 던시네인 성을 향해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 한 패하지 않으며 여자의 몸에서 난 자는 멕베스를 해하지 못한다'는 마녀들의 두 번째 예언이 숲을 타고 오는 화염과 '나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제왕절개로) 나왔다'는 맥더프의 칼날에 의해 실현되고 부질없는 욕망을 끝까지 불태우던 맥베스는 재만 남긴 채 회한에 싸여 스스로 목숨을 내려 놓는다. 암살당한 덩컨의 아들 멜컴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동안에 붉은 안개를 헤치고 등장, 맥베스의 진검을 집어들고 다시 핏빛 광야로 향하는 어린 플리언스의 결기 서린 모습이 아직 예언은 열려있으며 전쟁의 폭력과 고통, 권력 찬탈의 아귀다툼은 끊이지 않고 영겁으로 반복되리란 자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결국 저스틴 커젤 감독은 새로운 [맥베스]의 비전으로 성찰적인 현대 반전(反戰)영화의 장르성을 내세운 셈이다. 어린 소녀를 더불어 갓난아기까지 안고서 붉은 안개 틈새로 출몰하는 마녀들은 마치 전쟁 사상자들의 혼백처럼 묘사되면서 한편으로 자손이 없는 맥베스 부부의 결핍을 강조하는 극적 장치로도 보여진다. 원전과 달리 공개 화형 당하는 맥더프의 아내와 아이들을 통해 잔혹한 전쟁의 희생양은 정작 군인들(남성들)이기보다 무고한 여성과 아동들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맥베스의 욕망을 부추겨온 맥베스 부인조차 맥더프 가족을 화형식에 처하는 맥베스에게서 광기에 갇힌 괴물을 목도하고 허물어진다. 매 전투 씬마다 뚜렷한 액션 동선을 지워낸 혼전 양상으로 장르에 도사린 스펙터클의 함정을 지양(止揚)한다. 도입부에서 맥베스가 반역자 맥도널드를 처단하는 앨론 전투는 새벽녘 담청색 주조의 잿빛 안개가 서린 가운데 치러지는 반면 그가 전사하는 최후의 던시네인 결전은 핏빛 석양 속에 펼쳐지면서 색감 변화로 점점 더 진한 피를 흩뿌리는 전쟁의 참상, 그 생리를 형상화한다. 저스틴 커절 감독은 원전의 폭을 줄여가며 가장 명료하면서 동시대적인, 어찌 보면 교훈적이고 계몽적이면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맥베스'를 내놓았다. 여러 시도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선 그만큼 고전 본유의 매력이 반감됐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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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하진 않지만 선호하는 몇몇 인사들 트윗을 즐겨찾기 등록해 놓고 가끔 둘러 본다. 다음은 원혜영 의원 트윗 중에서. '집 안에 쥐가 있으면 고양이를 길러야 하죠. 그런데 고양이로는 안된다며 호랑이를 풀어 놓겠다고 합니다. 쥐가 죽을까요, 사람이 죽을까요? 테러방지법이 이와 같습니다. 테러방지법은 사실상 국정원 권한 강화법이며 현행법에 이미 테러대책은 들어있습니다.' 연이어 황현산 교수 트윗을 접했다. '윤리는 지치지 않아야 윤리다.'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말이다.


- 잇따라 공감되는 군가산점 사안 관련 멘션을 읽었다. 그대로 옮겨 둔다. '군가산점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것은 군대에서의 고생을 여성들이 몰라준다는 것이다. 가산점은 그 고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고생한 나에게 밥 한 그릇 더 준다고 남의 밥그릇 밀어준다면 그건 고생을 높이 평가하는 게 아니라 모욕하는 것이다. 군대 갔다온 남자에겐 편법으로 군대를 면제 받은 남자들에 대한 분노가 있다. 그는 이 나라가 내세운 명분과 함께 모욕을 받은 것이다. 허나 그 명분이 분노를 여자들에게 돌릴 이유가 되지 않을 뿐더러 그런 분노의 전가는 자기를 이중으로 모욕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허풍 섞어 하는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남성성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상처를 달래는 방식일 뿐이다. 그게 상처가 아니라고 고집부리다 보면 이상한 괴물이 탄생한다.'


- 정성일 평론가는 대부분 영화계 작가감독이나 그에 준하는 비평가들의 명문, 어록을 트윗한다. 본인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몰라도 그래서 더욱 좋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지 마세요. 반복해서 볼수록 처음 본 인상이 점점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번 볼 때 온 힘을 다해서 보세요. 다시 볼 때는 그 영화를 거의 잊어버렸을 때입니다. (모리스 피알라)' '영화를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화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어떤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일 나쁜 것은 하지도 않으면서 하겠다고 말만 하는 것입니다. (허우샤오시엔)' '작품이 타오르는 장작이라면 이론가들은 장작과 타고 남은 재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겠지만 비평가는 불꽃 자체가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발터 벤야민)' '영화학교 졸업 작품에서조차 눈치를 보면서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놈들은 평생 그런 영화나 찍을 것이다.' '당신이 말한 그게 정말 거기 있습니까? 그게 정말 보입니까?' 하스미 시게히코가 비평수업시간에 영화평을 발표한 학생하게 자주 하던 반문이라고 한다.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들지 못하는 비평은 실패한 거죠. 우리들은 다시 한번 영화를 마주보게 만들어야만 해요.' 그러므로 이 공간에 쌓아놓는 영화 포스트들은 99% 실패한 리뷰들이다. 아무리 나 자신을 위한 글들이라 자위한다 해도. '위협적일만큼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 감탄을 하면 시네필이고 질투를 느끼면 시네아스트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때 시네아스트이(고 싶)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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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2009년 8월 31일 월요일은 내 개인사에 있어 매우 뜻깊은 날이다. 당일 이사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그중 뼈아픈 것 하나가 예전 살던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수백 권의 소설을 분서(焚書)한 사건이다. 중2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해문출판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중엔 추후 아이들이 추리소설 입문할 때 필독서라고 판단되는 세 권만을 남겨뒀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애독자들이 뽑은 베스트 10', '평론가 선정 베스트 10' 등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리스트야 워낙에 여러 버전이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말년에 작가 본인이 직접 선정했다는 베스트 10 목록이다.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 (1939) / 워그레이브 판사 外 9인
2.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The Murder of Roger Ackroyd (1926) / 에르큘 포와로
3. 예고살인 Murder Is Announced, A (1950) / 미스 마플
4. 오리엔트 특급살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34) / 에르큘 포와로
5. 화요일 클럽의 살인 Thirteen Problems, The (1932) / 미스 마플
6. 0시를 향하여 Towards Zero (1944) / 베틀 총경
7. 끝없는 밤 Endless Night (1967) / 마이클 로저스
8. 비뚤어진 집 Crooked House (1949) / 찰스 헤이워드
9. 누명 Ordeal by Innocence (1958) / 아서 캘거리 박사
10. 움직이는 손가락 Moving Finger, The (1942) / 미스 마플


다만 저 리스트에 살짝 내 개인적인 취향을 얹자면 산만한 구성에 과도한 로맨스 풍이던 [움직이는 손가락]을 빼고 애거서 크리스티가 전속 계약 출판사에 다짐 받아둔대로 본인 작고 후에야 발표된 에르큘 포와로 탐정 마지막 사건 해결 파일 [커튼]을 넣고 싶다.

 

 

 

 

아, 바로 이 제목이다. [세계의 명탐정 44인]과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 초등학생 때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당시 아르센 루팡과 셜록 홈즈 등에 푹 빠져있던 나로선 너무나 재밌어서 읽고 또 읽고 했지만 훗날 읽게 될 추리 명작들의 스포일러가 작렬하는 악서(?)이기도 했다. 추리소설 강국인 이웃나라 책을 무단으로 번역했다고 하는데, 원래 '명탐정 50인'이었던 걸 일본 탐정 여섯 명을 빼고 '44인'으로 줄였다고 전해진다.

 

 

 


1986년 초가을 즈음이었나. MBC 주말의 명화 시간 방영분으로 감상한 마이클 앱티드 감독,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1979년 영화 [아가사 실종사건]이 여지껏 인상 깊게 남아있다. 검색하다 보니 1년 전 같은 내용의 뮤지컬도 공연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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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19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억의 해문 출판사...
저도 장르소설 입문을 한 계기가 바로 해문 출판사 책 모으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해서 한 권 한 권 모았죠. 모으는 재미가...
뭐, 책 디자인이 후지다, 중역이다, 번역 개판이다 말이 많으나
저는 개인적으로 해문 출판사 욕할 생각이 1%도 없습니다.

해문 하니 갑자기 내 옛 친구 새끼 생각나네요..
내가 해문 책 읽자 ˝ 뭐 그런 책을 읽냐 ? ˝ 라고 말해서
저랑 대판 싸웠던 놈.. ㅎㅎ

그나저나 새벽 님 요세 웰케 소식이 뜸하십니까..

풀무 2016-02-19 22:32   좋아요 0 | URL
진짜 두세 달에 한번씩 다음 작품 나오길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의식있는 독자라면 하면 안 될 얘기겠지만, 사실 저 시절 저작권 제도 빈틈으로 해문출판사에서 책을 내줬기에 한창 목마르던 때 추리소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죠. 저로선 고마운 마음까지 듭니다. 당시 어렸던 제 눈엔 착착 감기는 무리없는 문장들이었고, 표지 디자인도 아마 영국판을 그대로 따온 것 같은데 저로선 더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0시를 향하여]나 [누명] 표지 같은 경우는 거의 예술 아니겠습니까..

몇 달 해보니 알라딘 서재가 포털 블로그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뭐랄까, 각자 거점을 지니고 상호 교류하는 커뮤니티 느낌이랄까요. 눈치없이 굴기 싫어서 어찌 처신해야 좋을지 가끔 맘 동할 때 본거지 포스트들 옮겨 두고 혼자 소일하며 자숙하고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3-12 09:19   좋아요 0 | URL
제가 네버와 알라딘 두 곳에 동시에 글을 올리잖습니까..
댓글 반응이 사뭇 다릅니다. 고게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면 특정 글에 알라딘에 댓글이 많이 달리면
반대로 같은 글이 실린 네이버에는 댓글이 안 달리더라고요..
관심사가 서로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게 무척 재미있더라고요...

풀무 2016-03-14 06:1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야 요즘 네버 쪽에도 별 반응 없고 알라딘이야 워낙 덧글 안 달리고 하지만 곰발님 공간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실 네버 쪽은 다른 공간들 둘러 봐도 이제 진솔한 소통이 거의 멸종된 듯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순수의 전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탄생 125주년을 맞아 영국 국영방송 BBC에서 그녀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를 3부작 드라마로 제작·방영 중이다. 오웬이라는 익명의 인사에 의해 '인디언 섬'에 있는 외딴 별장에 초대된 각계 여덟 손님과 집사 부부의 연이은 죽음을 다룬 미스터리로, 1945년에 만들어진 영화 속 설정을 차용해서 원작에 나오는 열 개의 인디언 인형 대신 꼬마 병정 인형으로만 바뀌고 그 특유의 을씨년스런 기조와 법조망의 한계를 비튼 내용은 그대로라고 한다. 소설 속 중요 모티브인 마더 구즈(Mother Goose)의 동요는 원래 '검둥이' 이야기였는데 초판 발행후 인권 문제로 항의가 빗발치자 출판사와 협의 하에 인디언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 열 꼬마 검둥이  Ten Little Nigger Boys -


열 꼬마 검둥이가 밥을 먹으러 나갔네 Ten little nigger boys went out to dine;

하나가 사레들려 아홉이 남았네  One choked his little self, and then there were nine.


아홉 꼬마 검둥이가 밤이 늦도록 자지 않았네  Nine little nigger boys sat up very late;

하나가 늦잠에 깨지 않아 여덟이 남았네  One overslept himself, and then there were eight.


여덟 꼬마 검둥이가 데븐에 여행을 갔네  Eight little nigger boys traveling in Deven;

하나가 거기 남아 일곱이 남았네  One said he'd stay there, and then there were seven.


일곱 꼬마 검둥이가 도끼로 장작을 팼네  Seven little nigger boys chopping up sticks;
하나가 두 동강 나서 여섯이 남았네  One copped himself in helf, and then there were six.


여섯 꼬마 검둥이가 벌통을 갖고 놀았네  Six little nigger boys playing with a hive;

하나가 벌에 쏘여 다섯이 남았네  A bumble-bee stung one, and then there were five.


다섯 꼬마 검둥이가 법률 공부를 했다네  Five little nigger boys going in for law;

하나가 법정 소송에 걸려 넷이 남았네  One got in chancery, and then there were four.


네 꼬마 검둥이가 바다 향해를 나갔네  Four little nigger boys going out to see;

하나가 청어에게 먹혀 셋이 남았네 A red herring swallowed one, and then there were three.


세 꼬마 검둥이가 동물원 산책을 나섰네  Three little nigger boys walking in Zoo;

하나가 큰 곰에게 짓눌려 둘이 남았네  A big bear hugged one, and then there were two.


두 꼬마 검둥이가 볕을 쬐고 있었네  Two little nigger boys sitting in the sun;

하나가 홀랑 타버려 한 명이 남았네  One got frizzled up, and then there were one.


한 꼬마 검둥이가 외롭게 남았다네  One little nigger boy living all aline;

그가 목을 매어 아무도 남지 않았네  He got hanged, and then there were none.

​사실 마더 구즈 동요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일려진 작품은 아마도 [노간주 나무] 이야기 중에 나오는, 의붓어머니에게 학대 당하다 죽어 새가 된 소년의 한맺힌 노래 '내 어머니 날 죽이고(My Mother Has Killed Me)'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 그녀는 나를 죽였고  My mother she killed me,

나의 아버지, 그는 나를 먹었다.  My father he ate me.

꼬마 마를렌, 나의 여동생은  My sister, little marlinchen

나의 모든 뼈를 한 데 모으고  Gathered together all my bones,

그것들을 비단 손수건에 묶어  Tied them in a silken handkerchief, 

노간주 나무 아래 묻어버렸다.  Laid them beneath the juniper tree,

아아,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새인가.  Kywitt, kywitt, what a beautiful bird am I.

 

 

그리고 나는 저 마더 구즈의 '검둥이' 동요를 접할 때마다 한창 나이에 요절한 빌리 홀리데이의 절창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가 떠오른다.


남쪽 지방 나무들은 이상한 열매를 맺네  Southern trees bear stange fruit
피로 물든 나뭇잎들, 뿌리에 흥건한 피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남풍에 흔들리는 검은 몸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포플러 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훌륭한 남부 전원 정경에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부풀어 오른 눈과 뒤틀린 입  The bulging eyes and the twisted mouth
목련의 부드럽고 신선한 향기  Scent of magnolias, sweet and fresh 
그때, 불현듯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g flesh
 

여기 열매가 있네, 뜯어먹을 까마귀를 위한  Here is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거둬들일 피, 피를 빨아들일 바람,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부패시킬 태양, 쓰러뜨릴 나무들을 위한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s to drop
여기 이상하고 쓰디쓴 수확물이 있네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 얘기로 돌아와서, 소설 자체가 동서고금을 통해 워낙에 인기있는 텍스트인 만큼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그중에 필견작으로 르네 클레르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연출한 1945년작 흑백영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꼽힌다. 원작의 음습한 완전범죄 결말과 무겁고도 과격한 문제 의식을 포기하고 해피엔딩을 택한 대신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와중에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인간군상을 치밀하게 묘사, 그들 각자가 지닌 범죄와 양심의 긴 꼬리을 집요하게 응시함으로써 완성도를 인정받아 여지껏 수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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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거서 크리스티
    from 잿불의 기억 2016-02-19 13:25 
    2009년 8월 31일 월요일은 내 개인사에 있어 매우 뜻깊은 날이다. 당일 이사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벌였는데 그중 뼈아픈 것 하나가 예전 살던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수백 권의 소설을 분서(焚書)한 사건이다. 중2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해문출판사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중엔 추후 아이들이 추리소설 입문할 때 필독서라고 판단되는 세 권만을 남겨뒀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애독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