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행복 수업 - 왜 세계 최고 지성들은 행복 수업을 듣는가
유키 소노마 지음, 정은희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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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복을 손에 넣기는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해답지와도 같다. 20쪽


각종 시험을 앞두고 이론서를 제외하고는 기출문제를 가장 많이 보게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문제풀이를 꼼꼼하게 읽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시험합격이 최종목적이라면 문제와 답만을 외우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데 행복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만족 혹은 성공이 아니라 우리는 '행복하길'원한다. 그리고 그 답이 이 책에 있기에 저자가 저토록 당당하게 '해답지와 같다'라고 하는 것이 결코 교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은 실천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 크게 5가지 기술이 필요하고 마지막 행복을 위한 여섯가지 습관속에 1.감사일기, 2. 친절한 행동, 3.경청, 4좋은 일 세가지, 5. 마음 챙김 호흡법, 6.최고의 모습 상상하기 등이 포함된다. 우선 첫 번째 행복을 이끄는 '성공의 기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껴진 부분은 '행복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벌면, 결혼을 하면등의 조건행복으로 초반부터 마치 내 속마음을 들킨것 같은 기분이었다. 근래 6개월 동안 거의 감사하며 살았고, 나름 행복하게 산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결혼이, 직장생활에서 오는 피로로 인해 '불행'하다고 느꼈으며 그때마다 이 두가지가 해결되면 원이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복의 덫에 빠져있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타인과 비교하거나,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될 때 이런 상황에 빠진다. 이때 진정한 행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은 요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덴마크 사람들의 '휘게'스타일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꼈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으며, 이웃끼리 연대하는 문화를 지녔다. 48쪽


흔히들 성공과 행복을 이분화해서 양자택일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럴 수 없음을 탈 벤-샤하르의 행복과 성공의 순환 모델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공을 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고 더 크게 성공하기 위해 '행복'이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다일 수도 있고 결국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개인이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어 타인을 쫓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보이는 성공, 즉 부와 명예가 행복의 목적이 되는 까닭은 심리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가 정량화 되기 싶다는 벤-샤하르의 학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따금 얻어지는 커다란 즐거움보다 당장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중 하나가 현재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방법은 읽으면서도 적극 공감했다. 건강을 위해 사놓고는 먼지만 쌓이는 요가매트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건강을 위해 도서정가제 직전 구매했던 두꺼운 책들을 한 권 한 권 꺼내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행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런가하면 물건보다 경험에 투자하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들었는데 이 내용은 마이크 I. 노튼과 엘리자베스 던이 출간한 <당신이 지갑을 열기전에 알아야 할 것들>이란 책에서 나오는 것으로 얼핏 들으면 맞는 것 처럼 들린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는 경험대신 혼밥, 혼술이 대세인 요즘은 경험보다 '물건'이 큰 기쁨이 될 수 있고, 물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더 공감이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면 도울수록 행복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한다. 결국 친절은 연쇄적이고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발전한다. 230-231쪽


서두에 이 책을 행복한 삶을 위한 '답'이라고 소개했지만 기존에 나와있는 행복을 위한 기술을 총망라해 정리해 놓은 이론서라고 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 다른 책들에서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던 부분들마저 언급하며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실천'이었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믿는 사람들도, 정말 모르는 이들도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사례를 통해 자신이 정말 원하는 행복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이를 위해서 '이웃나눔'과 '목적의식' 그리고 '감사'와 '휴식'이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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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6-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ount your blessings..
어제 이 말을 몇번이나 되뇌였어요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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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초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어떤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집어든 책이 '오기와라 히로시'의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였다.  원래는 늦은 밤 잠이 안오거나 혹은 지방이다보니 배차시간이 간혹 길어질 때 한 편 한 편 읽을 요량이었는데 기차좌석이 뜻하지 않게 마주보는 곳이라 앉자마자 꺼내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작품은 <성인식>. 이미 죽은 딸아이의 성인식에 참가하게 된 부부의 이야기로 얼마전 읽었던 '가쿠다 미쓰요'의 단편집 [평범] 속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라는 작품과 비교되면서 당시 느꼈던 가슴아픔이 다시금 느껴지기도 했다. 두 작품모두 자식을 잃고 그리움과 죄책감에 허덕이는 부모의 이야기로 <성인식>의 경우는 눈물 뿐 아니라 '쿡쿡'하고 소리내어 웃을 수 있는 상황연출이 좋았고 특히나 딸을 잃은 부모에서 다시금 서로의 사랑과 소중함을 회복해가는 결말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자식을 잃은 어미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막연한 해피엔딩을 더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표제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는 읽다보면 어느 순간 손님과 이발사의 관계가 드러나지만 그것이 결코 뻔하거나 진부함으로 느껴지지 않고 영화 <국제시장>을 보는 듯한 감동과 긴 여운을 선사해주었다. 나이들고 이제 슬슬 뒷방 노인으로 물러나야 할 '사람'의 개인사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았던 부모님들을 아픔과 그 힘겨움 속에서도 잃지 않은 의지와 희망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장면 장면이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대로 떠오르는 매우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성인식 이야기를 하면서 <평범>소설집을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는 근래 일본문학이 보여주는 가족애, 상처받은 개인들 하나하나를 어루만져주는 듯한 따뜻함과 일상에서 잠시 잠깐이라도 스쳐가는 웃음을 잘 응축시킨 책이기도 하다. 이는 비슷한 소설집이라는 단점을 가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희노애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분노조절이 어려워 끔찍한 사건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런 때에 어쩌면 저쪽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누군가도 결국 어제 울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것이 가장 큰 위로며 희망이 되진 않을까 싶다. 여행길에 좋은 추억과 심리적 평안함을 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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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진 샤프 지음, 백지은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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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투쟁의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치적 저항, 즉 비폭력 투쟁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45쪽

 

독재, 투쟁, 비폭력 저항. 세 단어를 언급하면 마치 독립투사 혹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정당인 등으로 보이기 쉽다. 책 <독재에서 민주주의로>를 읽으면서 분단국, 휴전국가의 국민으로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오랜시간 ‘저항’ 혹은 ‘투쟁’이란 단어를 기피하고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떠올리면 제대로 정착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는 소극적 민주주의속에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다. 지난 날 한국에 있었던 저항은 비폭력 저항만은 아니었다. 어쩌다 던진 돌이 아닌 계획된 총알에 가족을 잃은 국민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가장 독한 무기를 가지고 거리로 나왔다. 박숙자 작가의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그들의 저항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진 샤프에 의하면 제대로된 계획없이 거리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노래한다는 시인들에게서 조차 공감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진 샤프의 비폭력 저항과 관련된 내용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협상’에 관한 부분이었다. 노사가 원만하게 극적으로 협상안 타결 등의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협상은 어찌보면 ‘비폭력’이란 단어에 가장 적합한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사합의와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것과는 애초에 갈등 배경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소 충격이었다. 뿐만아니라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배만 곯지 않으면 된다.’라는 식의 가정환경이 그런 사고를 더욱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전의 우리가 보여준 ‘폭력적 저항’은 진 샤프의 말처럼 또 다른 독재, 폭력을 키웠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또 다른 독재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마찬가지로 애초에 저항할 의지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 주어졌을 때뿐 아니라 전체적인 개념을 이해할 때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대전략에 대한 지식은 투쟁에 참여한 대중들의 사기와 적극성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적절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101쪽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책은 가볍다. 페이지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되고 동시에 우리가 전혀 모르던 이야기만을 설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이 담고있는 의미와 내용, 사례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비폭력 저항만이 휴유증을 최소한으로 하여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계획과 내부안에서 타오르는 저항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외부자극이나 영향이 큰 것은 분명하나 내부에서 타오르지 않고서는 결코 실질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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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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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공부하려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펼쳐보는 책은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일 것이다. 두꺼운 책에 보기만 해도 책 속에 있는 모든 내용이 읽기만 하면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완독 후 전시장을 방문하면 누구의 작품이라도 다 이해될 것만 같은 기대가 생기는 책.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여전히 그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덕분에 대략적으로 미술이란 어원의 시작과 변천사 혹은 현대이론에 가까운 이론이 정립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평가와 작가들의 명언은 덤으로 얻어가면서 말이다. 미술사 어느 책을 들여다보더라도 고대 비너스 작품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실 그 시대의 비너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체의 아름다움이나 작가 개인의 취향 혹은 창조성을 바탕으로 창조된 '예술' 혹은 미술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이것은 미술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고, 비너스의 풍만한 라인은 다산, 여성이라는 아름다움이 아닌 생존 혹은 번식력을 위한 바람을 담은 성물이라고 볼 수 있다. [스펙타클 사회]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경험을 온갖 형태의 '재현'이 대체하고, 그 이미지들은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 개입하며 시민들은 대중매체의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시킨다'란 말처럼 미술은 창조자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딘큐레는 작품 <모든 것은 재현이다>를 통해 미술 뿐 아니라 취미나 가치관 혹은 일생생활 전부를 재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거나 현재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까? 예술이라는 어원의 변천과정을 통해 이해해보자면, 처음 예술 혹은 미술은 일상예술까지 포함하거나 다빈치의 경우처럼 지식의 한 방향으로 보기도 했고 천체술, 광학술 등 기술적인 분야까지 순수예술항목에 포함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 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17세기 이전에는 예술가였던 셈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창조자가 예술가던, 기술자던 그들은 모두 '남성'에 한해 명명되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여성 화가가 유명했던 19세기조차 여성작가들에게는 누드가 금지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 차별이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누드화를 통해 전문 예술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과정이었음에도 그랬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여성예술가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창조자의 삶이 저런 과정을 거쳤다면 비평가 혹은 취미 또는 취향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아카데미 제도만 보더라도 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작품을 창작하는 것과는 달리 17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창작자들은 궁중 혹은 귀족의 요구대로 작품을 그렸다. 성화가 교회의 무대배경이자 장식이기에 미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뿐 아니라 자발적 창조품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미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요청에 의해 창작된 작품,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직업은 계급과 지위가 높은 이들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었고, 취미란 그 사람의 직업과 신분을 나타내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창작자들은 특별한 능력, 즉 천재성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인류의 절반인 여성 역시 천재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부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진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회화가 아닌 사진분야에 여성들의 참여가 높아졌는데 이는 차별적인 것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는 회화보다 화화적인 중간과정을 거치는 사진이 덜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여성작가들 스스로의 의사도 반영 된 셈이다.

과거에 이르러 현재까지 미술 혹은 예술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모든 작품을 '예술작품'이라는 장막으로 가린 뒤 무조건 신비롭고 고귀한 것으로만 바라보았던 내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무엇이 '미술'이며, 도대체 '미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조적인 고민을 던져준 책이다. 끝으로 책을 읽는 내내 왜인지 모르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던 피카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올려본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는 내게 약속했다.

"만약 네가 선원이 된다면 선장이 될 것이고, 정치가가 된다면

대통령이 될 것이고, 신부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난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결국 피카소가 되었다. -본문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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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강명순 옮김 / 메리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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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이 작품은 작품을 이야기 하기 전, 작가 이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역자 후기만 보더라도 20대 청년의 방황, 사랑 그리고 투쟁으로 보기 보다는 저자의 나치 선정성을 염두하고 읽으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출발은 그랬다. 저자의 말처럼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성장하고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면 그렇게 잔인한 학살에 가담 정도가 아니라 앞장설 수 있을까, 과연 그들도 '사람'이라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막상 <미하엘>을 읽다보니 과연 그런 선입견을 두고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드시 또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가장 쉬운 예로 내용이 정말 멋지고, 공감가는 내용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 작가가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다 못해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인이었다면? 심지어 수장이었다면 어떨까? 내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두고 그냥 소설로 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헤르타 홀크. 그녀의 노트에 적힌 이름이다. 이름 하나 알았을 뿐인데도 벌써 그녀와 아주 가까워진 기분이다. 말 한마디 나눠 보지 않았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21쪽


위의 문장만 보더라도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나약한 인간의 면모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친구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의 길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연인에게 실망하기도 하는 모습은 보통의 청년가 다를바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소설이 위험한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은 저자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자전소설을 탄광에서 사고사한 친구를 위해 장편소설로 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전소설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마치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감정적 호소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인간의 모습을 한 거짓이다. 유대인은 역사상 최초로 영원한 진실을 덮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았다. 126쪽


마치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탄압하고 살해했기 때문인것처럼 몰고가지만 사실상 자신(혹은 국가)의 나약함을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을 찬미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지극히 존경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미하엘'을 보고 있으면 역자의 말처럼 결코 친구를 '추모'하기 위한 소설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았다. 247쪽


'로랑비네'의 <HHhH>를 읽으면서도 느꼈고, 멀리서 찾지 않고 히틀러의 생애만 보더라도 나치당 중 유대인 학살에 앞장 섰던 인물들은 겉으로는 외향적이고 학업적 능력이 뛰어나며 심지어 '로맨티스트'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과 대화를 일단 시작하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마지막 문단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 마디. 불우한 가정 때문에 혹은 불구였던 신체 때문에, 이도 아니면 꺾인 꿈으로 인해 한 평생 열등감 속에 빠져 있었다고 결론짓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열등감을 이겨내기 위해 정말 '잘'사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흉내는 진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던 만큼 신의 탓이 아닌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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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3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소설이라기 보다는, 나치즘을 전파하기 위한 선전물이 아닐까 싶네요.

에디터D 2017-09-23 00:49   좋아요 0 | URL
그런듯 싶죠? 공감한다고 밑줄까지 그었던 부분도 있었는데;;; 흠흠;;;
(댓글을 6개월만에 달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