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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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들은 어떻게 10곡이 넘는 트랙의 곡 중에 메인곡을 정할까. 신기한건 메인곡이 첫번째 트랙곡은 아니라는 것. 매번 중간쯤 나오는 곡이 메인곡이 되고, 그 곡과 한두곡쯤 더 활동하다가 음반활동을 접는다. 콘서트에 가도 음반의 모든 곡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니, 어떤 곡들은 영영 앨범 속에 남아있기도 한다.

 

소설이야 제목이 그럭저럭 공감이 되지만, 시집의 제목만은 항상 참 알쏭달쏭하다. 어떻게 해서 이 제목을 붙이게 되었을까. 시인의 입김이 더 컸을지. 편집자의 입김이 더 강했을지.

 

역시나 이번 시집에도 제목으로 쓰인 시는 중간쯤에 살짝 나왔다. 마치 자신이 제목이 아니라는 듯. 무심히.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자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p.55)

 

간밤에도 역시나 나는 울다가 잠이 들었고, 오늘도 낮에 엄마랑 이야기하다가 울다가 까무룩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내 인생은 똥이야. 똥'이라고 툴툴거리면서 걸어가도 될 길을 괜시리 마을버스를 타고 한바퀴 돌았다. 문득 고흐와 윤동주를 생각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가난에 시달렸던 고흐. 자신의 작품이 훗날 전세계 인들의 사랑을 받고, 고가에 거래될 것을 그시절엔 꿈에도 몰랐겠지. 그저 그는 외롭고 배고프고 추웠을 것이다.

 

윤동주는 어떤가. 일제치하에 끌려간 감옥에서 생채실험 대상이 되어 각종 주사를 맞으면서 슬프게 아프게 어머니와 고국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그토록 꿈꾸던 고국의 독립은 보지도 못한채.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엄마랑 같이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었고, 그래서 배도 부르고, 슬프긴 하지만 이 슬픔이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아니까.

 

힘을 내야겠다.

 

내가 맥이 영 빠져있으니까 엄마가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릴 적 엄마 이야기. 한번도 들은 적 없는 엄마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맥이 빠져있지 않았음 아마도 엄마가 과연 내게 털어놓았을까 싶은 엄마의 아픔들.

밥을 먹고 내가 설거지를 하니까, 엄마가 말했다. "아 행복해. 엄마는 참 행복하다. 딸내미가 설거지도 해주고, 그래서 엄마는 이렇게 따뜻한 차 마시면서 앉아있을 수 있고"

 

그래. 우리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내 인생 똥은 아니다.

 

눈을 감고 앓다 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읽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p.82~83)

 

박준 시인. 한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시를 읽는 내내 생각했다. 아픔이 있어야 슬픔이 있어야 시가 더 깊어지는 지도 모르겠으나, 다음번 시에는 아픔이나 슬픔대신에는 그의 행복이 조금 더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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