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 종이 위에 유럽을 담다
리모 글.그림 / 재승출판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어릴때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중학교 2학년때는 담임을 맡았던 미술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전화까지 걸었더랬다. "얘는 꼭 미술을 가르치세요"라고. 그러나 어린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물감과 종이와 붓은 돈이 든다는 것을. 너무 조숙했던 내가 안타깝다. 그때 미술하고 싶어요, 라고 말했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잊고 있다가 고등학교 1학년때, 내가 그린 그림을 말리느라고 창가에 두었는데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물어봤었다. "저 그림은 대체 누가 그렸니?" 아이들이 입을 모아 "아무개요"라고 대답하면, 선생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림을 참 잘 그리는 구나!"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축제때는 미술부 아이들의 그림만 전시하는 교내 전시회에 유일하게 미술학원 근처에도 안 가본 문과생인 나의 그림이 전시되기도 했다. 미술 선생님의 강권이었다. 이 그림은 선생님 혼자 보고 채점하기는 너무 아깝다고 했던가. 그후로 2학년때부터는 미술시간은 거의 자습시간으로 이용되었고, 나에게 미술은 점점 남의 나라 이야기로 멀어져갔다. 대학교 4학년 여름. 처음으로 떠난 해외봉사활동에서 교안을 만들면서 잠깐 나의 미술실력이 다시 친구들의 도마에 올랐을 뿐. 그 후로는 나도 그림을 멀리하고 살았으니.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내 방 한구석에 뽀얗게 먼지를 받고 쳐박혀있는 그 옛날 내가 그린 그림(도무지 지금 내가 봐도, 이런 그림을 내가 어떻게 그린걸까. 놀랍기만한.)을 보면서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여전이 붓과 물감을 사기에는 아직 필요한 것들, 버리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얼마전 다녀온 전시회의 여류 작가는 이대로 살수는 없다는 생각에 40세 되던 어느 날, 남편이 타온 월급으로 모조리 그림도구를 사서 그 후로 틈날때마다 그림을 그렸다고 했었다. 그래야 할까. 아직 늦지 않은 걸까. 생각이 참 많아지게 만든 책이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여정이 끝난다고 해도, 다시 돌아간 일상에서 여행의 결과는 조금씩 나타나리라."(p.124)

 

여행 중에는 유난히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천천히 흘러간다는 것은 하루가 지루하게 지나간다는 게 아니라 하루의 기억이 굉장히 촘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p.132)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던 피렌체의 오후. 많은 비가 아니었기에 우산을 쓰기도 하고 말기도 하면서 리퍼블리카 광장 주변을 걸었다. 머리와 어깨가 살짝 젖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모든 하루를 여행자의 기분으로 살아간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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