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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ㅣ 어떤 날 1
김소연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2월
평점 :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그녀는 막 내 집 장만에 성공하고 매우 들떠있었다. 서울로 상경한 스무살 이후로 그녀는 2,3년에 한 번씩 총 14번의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집은 조금씩 좋아졌다.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자신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벌써 30대 초반인 나는 그간 무엇을 했는가.
메르스의 여파도 있지만, 돈을 절약하겠다는 이유로 요사이 나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만 해도 모처럼 돌아온 휴일에 나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나서 우쿨렐레를 연주했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서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더 우울해졌다.
20대의 나에게는 거의 집에 있는 시간이 없었다. 항상 어딘가를 돌아다녔고, 밖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밖에 나가는 게 꼭 돈이 드는 일은 아닐 수도 있지만) 덕분에 지금의 나는 추억은 남보다 많으나, 또래들보다 돈은 적게 모았다. 문득문득 이런 내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될 때면 또 다른 목소리가 말을 건다. 그래도 너, 지금보다 그 시절 행복했잖아. 지금의 넌 행복하니?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여행에 관한 책을 읽고,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을 듣는다.
사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에서 일을 하고서 몇 달 정도 잠시 내가 태어난 이곳으로 출장을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활비를 벌러. 어느새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곧 여행을 떠난다’는 표현보다는 ‘곧 출장을 마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p,49)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떠나지 않기도 좋은 계절이다. 나로부터 멀어지기에도 가까워지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나와 너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우리 사이의 계절이 가까웠으면 좋겠다. 다시 멀어질 수 있을 만큼.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 다시 제대로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다시 제대로 떠날 수 있을 만큼.(p.71)
자진해서 충만한 피로를 얻기 위해 우리는 걷고 걷는다. 묻고 묻는다. 질문을 하고 씨앗을 심고, 일상 속에서 또다들 일상 속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너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워질 때 나는 너에게도 가까워진다.
(중략)
지상의 곳곳에다 마음의 별점을 찍어나가는 것.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에 그것들이 하나의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별자리로 연결되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가 그리려 했던 별자리의 일부로 계획된 채로, 어떤 내면의 장소를, 마음의 성소를 내내 여행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 그 장소의 이미지가, 그 여행의 여정이 바로 자기 자신의 본질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 (p.86~87)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건만 여행잭자에 등장할 법한 인증사진 밖에 남은 것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다. 몇백만 원짜리 비행기 티켓을 끊고, 몇 마일씩 날아간 곳이라 하여도 나만의 심상(心狀) 하나 새기지 못했다면 ‘여행‘이 아니다. 일상으로 들여올 향기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 ’여행‘이 아니다. (p.116)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면 간절했던 것,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의외로 빛을 잃으며 허상처럼 흩어진다. 사소해서 버리고 싶다 여겼던 것들이 의외로 선명한 생명력으로 빛나기도 한다. ‘없어도 살아지는 것들’을 왜 그렇게 부여잡고 살았는지, ‘사소하다고 버리려 했던 것들’은 왜 이토록 소중한지 문득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여행이 끝나면 필요한 것들만 남는 법이다.
어떤 여행이든 아쉽지 않은 끝은 없다. 그래서인지 여행이 끝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은 ‘여행하는 동안 조금 더 잘 보낼걸.’ 여행이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예컨대 그런 것 아닐까. 인생이라는 여행에서만큼은 그러지 말기를. 인생이 끝나갈 때조차 내 인생과 좀더 잘 지낼걸. 나의 지난 시절에게, 내가 지나온 친구들과 그 모든 사람들과 조금 더 잘 지낼걸 하며 후회하지 않기를.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어렵게 떠난 여행의 빛나는 한 순간임을 알고, 내일보다 오늘을 더 부지런히 누리기를 마음에 새겨본다. (p.132~3)
나는, 길 위에서 태어났다.
물론 엄마의 뱃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얌전하게 태어나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런 태어남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나에게 있어 태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 이전의 나를 탈피하는 것. 어떤 다른 형태의 세계로 한 걸음 조심히 내딛는 것. 그리고 새로운 눈을 뜨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길 위에서 참 많이도 다시 태어났다. (p.137)
여행은 일상에서 알 수 없던 나, 라는 아이가 가진 복잡하고 알 수 없던 취향들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측정할 수 없던 내 안의 한계를 어느 정도 알게 했다. 마른 빵과 식은 커피에서 낭만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고, 때론 말보다 한 사람의 눈동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주었고, 낯선 도시의 야경 속에서 점점이 사라지는 불빛들을 보며 돌아가야 할 날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게 했다. 불행이라 생각했던 일들을 어느새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묘한 과정. 우여곡절이 많을수록 제대로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참 신기한 이름. 여행, 어찌 그 두 글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p.146)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조금 더 무거워졌거나, 혹은 훨씬 더 가벼워진 가방을 들고 여행의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 (p.147)
앞으로 내 삶을 또 견디게 해줄 수많은 순간들을 나는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게 될지…… 그 순간들을 얻기 위해 또 몇 번의 여행을 떠나게 될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매번 아득해지고 아늑해져서 이내 행복해진다. (p.148)
텅 빈 가방을 조금씩 채워넣으며 보내는 시간. 두고 가야 할 것들과 꼭 챙겨가야 할 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이 밝아오는 아침. 그리고 이윽고 눈앞에 서서히 펼쳐지는 낯선 풍경들. 낯선 타지의 돈을 세어보는 일과, 처음 이국의 언어로 표기된 물을 마실 때의 그 느낌들과 나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다른 색을 가진 그들과 처음 눈이 마주칠 때의 두려움, 그리고 설렘. 시차에 적응하느라 밤새 뒤척이는 피곤함이나, 갑자기 바뀐 잠자리에 어쩔 줄 모르는 내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시간들. 나는 그 모든 순간들과 사랑에 빠지며 나를 떠나오게 했던 이유들과 조금씩 화해한다. 결국 이렇게 하나하나 해결 되어가리라. 적응해가리라. 지나고보면 모두 행복한 일들이리라. 무심히 그렇게 느껴가는 사이 여행은 끝이 나고, 나는 어느덧 새살이 차오른 상처처럼 단단해져 있는 것이다. (p.154)
나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나는 결국 ‘잘, 살고 싶어서 정말 잘, 살고 싶어서’ 여행을 떠난다. 내가 결국 돌아와야 할 발 딛고 살아가야 할 현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아직 더 크기 위해서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 더 많은 기억들을 가지기 위해서, 풍부한 이야기를 가지고 그 이야기들 안에서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꿈꾸고, 여행을 통해 더 좋은, 내가 되어 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느 곳의 햇살을 받으며 어느 하늘의 비를 맞고 나는 또, 걷게 될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웃음과 눈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은 아직 깨뜨리지 않은 포춘쿠키처럼 나를 기다린다. 그 안에 담겨 있을 삶의 키워드를 하나하나 얻어가며 나는 살아갈 것이고, 분명 더 행복해질 것임을 나는, 믿는다. (p. 154~155)
여행은 낯선 장소에 가서 다른 일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여행은 순간순간이 선택의 과정이다. 어디에 가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묵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여행이라도 여행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p.182)
책을 다 읽고 나니 빼곡히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기 전보다 조금 더 행복해졌다. 가고 싶은 곳, 떠나야 할 이유가 잔뜩 늘어났다.
마스다미리의 책 속 수짱의 말처럼 자꾸만 먼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나 과연 먼 미래의 나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가고 싶어진 곳: 내장산, 우하 우동초밥집(종로구 누하동 7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