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의 여행, 여행 - 풍경, 사람, 기억에 관한 오키나와 여행 이야기
고현정 지음 / 꿈의지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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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연예인이 쓴 책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장수를 메우기 위해 글은 되도록 적고, 사진만 가득이라는 것이 그간 보아온 연예인이 쓴 책의 공통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글은 운문처럼 문장마다 엔터키를 친 경우가 대부분. 한권을 다 읽는데 보통 한두 시간이면 족하는.

 

이 책도 다 읽는데 서너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글이 적어서 빨리 읽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글이 술술 읽힐 만큼 재미나게 쓰여서 평소보다 읽는데 가속이 붙었다는 표현이 아마 더 맞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번 누군가 대필자가 있지 않나 의심했다. 연예인이 이렇게 글까지 잘 쓰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으니까. 나 같은 독자가 있을 걸 미리 예상이라도 한 걸까.

 

연기에 임하는 동안 사람이나 작품을 의심을 하거나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의심이 들면 감독에게 직접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나를 의심한다.”(p.213)

 

그래, 더 이상 의심하지 말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는 편이 내 속도 편하고, 무엇보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가 진심으로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여느 여행관련 서적과는 달리 이 책은, 소개된 장소를 찾아가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지도 않고, 묘사한 풍경에 대한 사진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작가 본인을 찍은 사진은 매우 많지만) 대부분의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아야 했지만 그편이 오히려 좋았다. 설령 사진이 실렸다 해도 실제로 직접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겠지만, 그저 상상해본 풍경을 눈앞에 마주하면 과연 어떤 기분일지……. 이런 마음을 남겨준 작가에게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책을 읽다 보면 중간 중간 챕터를 나누는 장이나 빈 공간에, 편집자가 채워 넣었음직한 시와 노랫말 등이 있다. 처음에는 백퍼센트 편집자가 메웠으리라 여기고, 이 책의 편집자는 안목이 참 탁월하군, 감탄했는데 읽다보니 점점 어쩌면, 작가가 직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평소 정말 많은 시를 읽고, 음악을 듣는 듯하다. 맘에 드는 구절을 옮겨 적느라 몇 번이나 읽기를 잠시 멈춰야 했을 정도이니.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난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장석남 <새로 생긴 저녁>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고현정이란 배우에 대해 잘 몰랐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 중 전편을 모두 시청한 작품은 <모래시계>-아주 어릴 때라 전편을 다 보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당시 시청률로 보아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해본다-<봄날> 정도. 그러면서 나는 가장 최근 작품인 <여왕의 교실>속 그녀를 몇 번 보고는 여배우가 저리 관리를 안 해도 되나멋대로 생각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또 하나 있다. ‘그녀를 기다리는 소나무.’ 그 나무 그늘에 나의 팬들이 모여 있다. 지난 번 인성이 팬미팅을 구경 갔다가 무작정 울컥. 그 시간에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이 떠올라 미안했다. 팬이라는 사람들이 본래 좋아하는 별을 무한정 바라봐주는 법이라지만 자주 내비치지도 않는 나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이들은 대체 뭔 손해인가, 싶어 조용히 물어봤다. 마음을 좀 갚고 싶은데,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고 그랬더니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으면 괜찮다는 답이 왔다. 연기로 박살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심지어 뚱뚱해지는 것도 상관없다고 했다. 너무 미안해서 그날 많이 울었다.”(p.36)

 

나는 물론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녀의 팬은 아니었지만, 위 구절을 읽으면서 그녀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나도 그녀의 팬이 되기로 했다. 아니, 이미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팬이 되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녀의 다음 작품보다 다음 책이 더 기다려지지만.

 

책을 보고 이들을 만나러 오면서 반가웠지만 울렁증이 또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또 헤어지기 싫고 짧은 만남이 아쉬워 슬퍼지면 어떡할까. 그러나 다무라 공방 부부가 좋다고 그곳에서만 있었다면 이페 코페 식빵 부부는 못 만났을 거다. (중략) 삶이 순환하고 흐르지 않으면 썩고 염증이 생기고 부패가 된다는 것을 나는 지금껏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길은 잠시 다른 길과 만나도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맞다. 서로 스치는 듯 만나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해야 하는데 난 좋은 길과 만나면 헤어지기가 싫었다. 반갑고 헤어지고 해야 다음에 또 만나고 다른 사람도 만나볼 수 있는 법인데 그걸 잘 알면서도 그동안 그렇게 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헤어지는 것이 싫어서 정체하다보면 나 때문에 또 불필요한 정체가 시작된다. 사람에 대한 체기가 다른 무엇보다도 제일 크다. 헤어질 생각만 하면 속이 울렁거리고 머무르고만 싶고. 그러나 음식이 속을 타고 내려가면서 소화가 되듯 사람도 지나가며 통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p.226)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올수록 벌써 끝인 건가 싶어 몹시 아쉬웠다. 부러 뒷부분은 천천히 음미하듯 읽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페이지가 오고 말았다. 작품도 많이 하지 않는 그녀가 다음번 책은 과연 언제쯤 내줄지……. 아쉬운 마음과 함께 위 구절이 생각났다. 그래,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다시 반갑게 그녀의 신간을 마주할 날이 오겠지. 우선은 이 책을 들고 오키나와 여행부터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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