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춘의 문장들 ㅣ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워낙 주변에서 권해주는 이들이 많아서 진즉부터 궁금했던 책 중 하나.
오랜만에 전철에서 책을 읽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때보다 눈도 덜 아프고, 시간도 잘 갔다. 덕분에 몇 번 내리는 역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 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라고 작가는 말했다. 문득 스물둘에 만났던 j란 친구가 떠올랐다. j는 입버릇처럼 자기는 서른 살까지만 살 거라고 말했다. 지금은 연락이 끊겨버린 j는 과연 아직 살아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졌고, 아직은 혼자서도 제대로 타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내 자전거에 누군가를 태워주고 싶어졌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고, 시집을 읽고 싶어졌고,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가 문득 떠올랐다.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달빛이 새파랗게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점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사려 소리에
눈을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되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에 터지는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매번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는 한국에 태어나길 참 잘했구나, 라는 생각.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로 쓰인 글을 읽으며 느끼는 이런 충만한 감상은, 도저히 느껴보지 못했을 테니까.
가장 낮은 곳에 이르렀을 때, 산 봉우리는 가장 높게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다. 지금이 겨울이라면, 당신의 마음마저도 겨울이라면 그 겨울을 온전히 누리기를. 이제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깜깜한 것을 싫어하지만 같은 연유로 때로는 하지보다 동지가 더 반갑다. 하지에 이르면 앞으로는 계속 해가 짧아지겠구나 싶어 우울해 지지만 동지에는 앞으로는 해가 점점 길어지겠구나 싶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하지는 대체 언제지 라는 생각에 내내 우울함을 얼굴에 써붙이고 다닌 지난 한해였다. 잊고 있었다. 동지가 깊어질 수록 하지가 가까이오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