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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스포일러 있음!
재고조사 기간이 막 끝난 도서실은 신나게도 제법 인기있는 도서들이 서가에 그대로 꽂혀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빌리기 쉽지 않을 도서들이 꽂혀 있는 도서실을 신나서 휙휙 거닐다가, 이 책과 만났다. 출간된지 조금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재고조사 덕을 본 것인지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에.
다음날 출근길에 가방에 이 책을 챙겼다. 요새는 책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데, 이 책은 출근하고 퇴근 하는 전철안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가독율이 좋고, 읽으면서 장면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화도 나와있다고 하니, 보고 싶어졌다. 엘메스가 죽는 장면은 차마 못 볼 것 같아 겁이 나긴 하지만.)
스물다섯살, 링고는 어느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가 깜짝 놀라고 만다. 집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텅-. 오랜시간 함께 살던 남자친구와 함께 집안의 모든 가구며, 물건들이 뿅 하고 사라져 버린것. 몹쓸사람. 아니 갈 거면 돈이나 갖고 갈 것이지, 왜 가구며 옷이며 그런 물건을 죄다 갖고 가 버린 건지. 내가 링고라면 정말 막막했을 거다. 링고에게 남은건 딱 하나. 외할머니가 물려주신 겨된장절임 항아리 뿐이었다. 링고는 할 수 없이, 그 길로 10여년 만에 고향집으로 향한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오히려 링고는 고향집에 돌아간 덕분에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고, 꿈에 그리던 자신의 가게, 달팽이 식당을 오픈하게 되었지만)
나는 조금은 링고가 부러웠다. 고향집이 있다는 것이. 물론, 아직도 집에서 통근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기쁜 일이지만, 가끔은 시골에 본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
그 곳에서 링고는 매달 일정한 생활비를 내고, 엄마의 애완 돼지 엘메스를 돌보는 조건으로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시골에 취직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직접 가게를 오픈하게 된다. 이름하여 달팽이 식당! 하루에 한 테이블만 받는 식당이 과연 돈을 벌 수있을까 싶지만,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던 듯하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정해진 메뉴도 없이 예약한 손님과 미리 메일이나 팩스로 인터뷰를 해서, 한 명(혹은 한 팀)의 손님만을 위해 준비한 메뉴를 선보이는 달팽이 식당은, 그후 사람들을 음식으로 울리고 웃기며 식사를 하는 동안만은 손님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게 된다.
작가가 음식만들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니만, 모든 음식에 대한 설명이 어쩌면 그리도 자세한지, 읽으면서 생전 먹어본 적도 없는, 그래서 감히 맛을 상상할 수도 없는 요리들에 배가 고프고 입에 침이 고여서 혼났다.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온 여고생, 처음 맞선을 보게 된 커플, 남편이 죽은 뒤 내내 상복만 입고 생활하는 할머니, 거식증 걸린 고양이를 데려온 소녀, 양로원에 가게 될 치매걸린 할아버지와 마지막 식사를 하러 온 가족 등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링고와 엄마, 할머니의 이야기.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은 아니지만, 가볍게 읽으면서 미소짓기에 좋은 책이다. 다만, 엘메스가 죽는 장면은 너무 묘사가 자세하여 읽기가 좀 버겁긴 했다.
+사족
오래전 학교앞에서 미술치료를 공부한다는 대학원생에게 붙들려 친구와 그림을 한장씩 그린 적이 있다. 눈을 감고 선을 그은 뒤, 눈을 뜨고, 그 선이 뭘로 보이는 지 말하는 거였다. 나는 내 그림이 닭 같아 보여서, 그렇게 말했고 그러자 이번엔 그걸로 이야기를 지어 보라고 했다. 나는 내 친구 닭인데, 어느날 잡아먹게 되어서 작별인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술술 말했고, 그러자 그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아마도 이야기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한 듯 했다.) 나에게 미술치료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로 잔인한 본성을 갖고 있나? 닭고기를 이제 먹지 말아야 하나? 내심 심각하게 고민했었던 것 같다. 물론 잠깐. 그 후로는 곧 잊어버리고, 여태 닭고기를 아주 잘 먹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 속에서 엘메스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미술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그저 상상력이 조금 풍부한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