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았으면, 후지와라 신야의 이런 책은 출간되자마자 무조건 구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렸다. 도서관에 왔다갔다 해보면 언젠가는 만나리라. 나보다 발 빠른 누군가가 분명 신간구입을 신청했을테니 나는 그저 몇개월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남보다 먼저 구입하고 서평 대강 올리면 Thanks to 같은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으나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흠, 내가 어쩌다 이런 살림꾼이 되었나 모르겠다.

 

 

 

각각 1993년, 1994년에 출간된 초판본이다. 영혼으로 읽었다면 과장이려나. 이 책 이후로 인도에 관한 책을 백여 권 넘게 읽었으나 '언제나 마음은 고향' 같은 책은 바로 이 두 책이다. 누구에게도 빌려줄 수 없는, 고이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지금도 저 <인도방랑>을 펼치면 마음이 저릿저릿해진다. 그러니 저 책을 쓴 후지와라 신야는 내게는 여행의 스승과 같은 사람이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고. 나도 변했다. 절대적인 스승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다니...기껏 빌려서는 꼼꼼하게 읽지도 않다니. 그러나 단 몇쪽만 읽어도 기분이 충만해지는 책도 있는 법. 이 책 또한 그러하다.

 

노승의 입에서 두 번째 도주승의 이름을 듣고 나는 조금 놀랐다. 산사에서 도망치는 승려가 많으리라는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물었다.

"달아난 사람이 더 있었군요. 그런데 스님께서는 이 절에서 40년 가까이 사셨는데, 그동안 달아난 스님들의 얼굴을 기억하세요?"

노승은 눈을 감았다. 조금 있다가 왼손에 쥔 염주를 돌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을 외는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사람의 이름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주승의 이름을 기억해낼 때마다 염주 알을 하나씩 돌렸다.

노승은 무서울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과거 40년 동안 이 절에서 도망친 승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이름을 빌린 훈계의 독경처럼 들렸다.

도주승의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노승은 내 눈앞에서 염주 알을 다시 헤아려보였다. 염주 알은 전부 서른여섯 개였다. (287쪽)

 

인도의 북부, 히말라야에 있는 라다크 지방. 그곳에서도 외지인이 쉽게 갈 수 없는 깊은 산사에서의 일화 부분이다. 여행사를 통해 라다크를 다녀와도 제법 우쭐해지는데 이 양반은 홀로 여행의 끝까지 파고들어간다. 그의 여행 방식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여행. 그리고 떡하니 풀어놓는 위와 같은 글.

 

마음이 어지러울 때, 책이 손에 안 잡힐 때, 마중물로 읽기에 좋은 글이다. 조금만 맛을 봐도 정신이 맑아진다. 나에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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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5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6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론가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추천한 책을 몇 권 내리 읽었다.

그 중 노벨라 베스트 6.

추천 기준은 1. 소설일 것, 2. 시적일 것, 3. 짧을 것.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고 한 작품들이다.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배수아 <철수>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황정은  <백의 그림자>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은 '하는 법' 말고 '하지 않는 법'을 아는 작가들이다. 말하지 않고, 쓰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최대한의 것을 이뤄내는 이들이다.'

 

 

 

 

 

 

 

 

 

 

 

 

 

 

 

 

 

 

 

 

 

 

 

 

 

 

 

 

 

 

 

 

 

 

 

 

 

 

 

 

 

 

 

 

 

 

이 세 권을 도서관에서 빌린 후 배수아의 <철수>부터 읽기 시작해서 <다다를 수 없는 나라>로 끝을 맺었다.

 

우선 이런 책을 이제야 읽는구나, 하는 후회 비슷한 원망의 감정이 일었다. 그간 돈 버느냐고 바쁘게 살긴 했지만 책을 아주 안 읽은 것도 아닌데...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책을 선택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짧은 건 확실하니까.

 

세 권 모두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길이여서 좋았다. 게다가 낭비없는 간결한 문장이 눈에 잘 들어왔다. 가장 시적인 작품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작품 분위기가 시적이다. 이야기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은 단연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철수>는 좀 난해한 느낌.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어렵게 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달에 울다>는 언젠가 다시 읽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두 번은 읽어야 할 것 같은 작품이다. 제목이 너무 시적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엔 읽을 것도 많은데 때로 길잡이가 되어 주는 책이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역시 신형철이 추천한 소설이다.

 

 

 

 

 

 

 

 

 

 

 

 

 

 

 

신형철이 평하기를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읽는 중에 이미 다시 읽고 싶어지는 그런 이야기다.'라고 한 소설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소설, 즉 읽을거리가 많다는 얘기다. 읽다보면 가슴이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재기발랄하다고 해야 할까, 엉뚱하다고 할까. 이런 저런 황당한 얘기에 빠져 키득거리다 보면 어느새 추리소설의 반전 같은 웅덩이에 빠진 느낌도 들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기발함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읽게 되는 소설이다. 혹여 소설을 쓰겠다고 벼르고 있다면 이 책 한번 읽어보시라. 이 책을 읽고 기가 꺾이지 않는다면 그대는 소설을 써도 된다, 라고 말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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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센터에서 6살 된 시츄 믹스견을 입양했다.

 

 

 

 

이 녀석은 살아온 내력이 만만찮다. 태생이 불투명하고 여러 해에 걸쳐 이곳저곳에서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듯하다. 순하디 순해서 힘센 개들한테 집단 폭력 대상이 되기도 했단다. 표정도 뭔가 억울하게 생겼다. 겁이 많아서 늘 긴장하고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식구들이 외출해서 돌아와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행동 따위는 아직 기대하기 힘들다. 다만 인형처럼 조용하고 소란 피우지 않고 짓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게다가 입도 짧아서 사료에는 입도 대지 않는다. 조금씩 마음을 열긴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순하게 생긴 건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 마트의 시식코너에서 뭐라도 얻어 먹게 되면 그 얻어 먹은 게 마음에 걸려 웬만하면 그 상품을 사들고 올 때가 많다. 여행가서는 사기 당하기 일쑤. 저 녀석처럼 억울하게 생겼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식구들. 인생역전이 아닌 견생역전이라며 먼저 말을 걸고 쓰다듬어주는 남편, 애지중지 자식 키우듯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딸아이, 툴툴거리며 짜증을 내기도 하는 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 생명을 거두어 보살피는 엄중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 생각해보면 큰 일을 저지른 것 같다. 함께 잘 살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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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30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30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곤 실례 2018-11-30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큰일 저지른겁니다. ㅎ
개도 사랑받으면 표정도 달라지고 억울한 생김새도 예쁜모양으로 바뀐답니다.
저도 시츄믹스견을 17년째 키우는 사람으로서 한가지 다행인 점은 믹스견들이
오히려 질병에 강해서 지가 좋아하는 걸 아무거나 먹여도 피부병 잘 안생겨요.
배변훈련만 잘 되있다면 같이 사는데 문제가 많진 않을것 같습니다.
얘들이 순하고 좀 내성적이거든요. 한생명을 책임진다는것은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걔가 같이 있는 풍경은 하우스를 홈으로 바꿔놓는 기적도 생긴답니다.

nama 2018-11-30 20:16   좋아요 0 | URL
17년쩨 키우신다고요? 우와....
진짜 순하고 내성적인 것 같아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네요.
예전에 개 키우던 방식과 많이 달라서 공부하고 있어요.^^
걱정이 앞섭니다.

서니데이 2018-11-3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댁에 새 식구 생겼네요.
말씀 듣고 보니 많이 순한 강아지인 것 같아요.
nama님도 말씀하시는 것보다 예뻐하실 것 같고,
새 식구가 왔으니, nama님의 가정에 즐거운 일과 웃을 일, 그리고 기분 좋은 일들이 더 많아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11월 마지막 날이라 인사드리러 왔어요.
11월에 좋은 일들 많으셨나요.
내일부터 12월입니다. 주말부터 추운 날씨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마음은 더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nama 2018-11-30 20:24   좋아요 1 | URL
순둥이에요. 아주 내성적이구요.
그래도 녀석 덕분에 가족간에 대화의 주제가 다양해졌어요.
뭔가 변화가 생겼다고나 할까요.

늘 한결같으신 서니데이님의 관심, 감사드려요.
늘 즐거운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hnine 2018-11-30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도 지어주셨나요?
저희 집도 지금 엄마네 있던 개를 잠시 데리고와있는지라 원래 있던 우리 개랑 손님개가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가는지 지켜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찌나 성격이 다른지.
집에 개가 있으면 식구끼리도 화제가 두배로 늘어요 ^^

nama 2018-12-01 19:52   좋아요 0 | URL
네 이름도 지었어요.
개들 성격이 제각각이라는 걸 알게 되네요.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아요.

spo 2018-12-0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큰 일 하셨습니다.
하나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지
강아지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하늘로 보내보며 배웠습니다.
6살이라는 나이, 믹스견, 이곳 저곳을 떠돈 아이는
입양이 쉽지 않은데 좋은 분을 만나 가족이 되었으니
이 아이가 중년(?)부터 복이 있나봅니다^^.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지 모르지만
마음의 문을 열면 그 아이가 주는 행복도 많을 것 입니다.
그러기까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응원하겠습니다.

nama 2018-12-04 15:09   좋아요 0 | URL
큰 일을 저질렀지요.^^
강아지가 순하긴 한데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어선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군요.
예전에 마당에 묶어놓고 키웠던 경험 때문에 실내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이 영 낯설기만 합니다. 그래도 강아지 덕분에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니 이제 게으르게 살기는 힘들 것 같구요.^^
응원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 - 콩나물 팔다 세상을 뜬 경제학사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3
최영숙 지음 / 가갸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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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

1906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21년 이화여자고보 졸업

1922년 중국 유학

1924년 흥사단 입단

1926년 6월 남경 회문여학교 졸업

         스웨덴행

1931년 스톡홀름 대학 졸업(경제학사)

         세계만유

         인도인 미스터 로와 결혼

         귀국

1932년 4월 23일 사망

 

 

여기에 실린 최영숙에 대한 글은 1930년대 초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기사와 최영숙의 일기가 주를 이룬다. 지금 읽어보면 다소 투박하고 세련미도 없지만 시대를 감안해서 읽는다면 나름 읽는 맛도 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어떤 한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보다 '스캔들'에 쏠려있어 읽어나가기에 민망한 부분도 적지 않다. <최영숙 지하 방문기, 명부행 열차를 추격하면서>는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희화화하는 과정이 잔인하고도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최영숙의 이력만보아도 시대를 많이 앞서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고학을 하며 스웨덴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 뭇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텐데 아깝게도 뜻을 펴보기도 전에 젊은 나이에 태아를 사산하고 그 여파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귀국한 이후 제대로 뜻을 펼치기는커녕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하는 과정도 눈물겹다.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조그마한 상점을 빌려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배추포기, 감자, 마른 미역줄기, 미나리단,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 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이름없이 스러져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후대에 이름이 불리워지고 그 짧은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 해도 그 사람의 삶을 헛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겠다. 좀 더 오래살아 자신의 뜻을 펼쳤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스웨덴은 예나 지금이나 부러운 나라임에 틀림없다. 최영숙의 글에도 부러움이 잔뜩 묻어있다.

 

물론 남녀는 절대평등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차별이 없습니다. (중략)

무슨 직업에고 조합이 있어서 노동시간 제한과 최저임금 제한이 있는 고로 공장주도 그 세력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스웨덴 가정의 특색으로 말하면 자유 평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구속하지도 않고, 또 자녀 교육은 일종의 의무로 알아서 교육을 시키지만 그 대가를 얘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자녀를 다 길러서 성인이 되면 분가시켜 독립생활을 하도록 하되, 자녀에게 붙어서 얻어먹겠다는 관념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 자식 간에나 부부 간에 절대로 평등입니다.

 

 

자식을 노후보험쯤으로 여기는 시대에 이쯤되면 불온(?)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분이 오래오래 살았더라면 세상이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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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6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6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러 해 전 이야기이다. 나는 당시 남녀공학의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3월의 어느 평일 3교시 수업시간. 늘 하던 대로 교탁에 있는 컴퓨터 본체에 cd를 넣으며 출석부에 사인을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Alt, Ctrl 과 Delete를 동시에 눌러 강제로 컴퓨터를 끈다. 전원이 꺼지자마자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른다. 역시 묵묵부답, 되살아날 기미조차 없다. 다급해진다. 컴퓨터가 없으면 수업하기가 몹시 힘들어지는데, 곤란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언제부터 그랬니?”

  “1교시 때부터 그랬어요. 다른 시간에도 컴퓨터 사용하지 못했어요.”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되겠군.”

점심시간에 겨우 짬을 내어 컴퓨터 담당자를 불러 원인을 물어본다.

  “아예 작동을 안 하는데요. 아무래도 cpu 쿨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cpu 쿨러? 그게 무엇인가요?”

  “컴퓨터 보조 장치인데 그게 없으면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왜 없을까요?”

   종례시간.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했다며 담임인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무래도 학생 중에 누군가 cpu 쿨러를 빼갔을 것 같다. 교사보다 컴퓨터에 해박한 게 요즘 아이들이다. 게다가 개교한지 얼마 안 된 신설학교여서 교실, 책상, 교탁, 칠판, 컴퓨터 등 모든 것이 새것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컴퓨터에 손을 댄 사람은 양심껏 내일까지 원상 복구해놓기 바라. 그러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할게. 부탁이야.”

   다음 날. 컴퓨터는 그대로 먹통 상태. 전날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달라진 건 없었다.

종례시간. A4 용지 여러 장을 4등분하여 45명의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우리 반 컴퓨터 cpu 쿨러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본 게 있으면 지금 나누어준 종이에 간단하게 적어. 아는 사실이 없으면 그냥 모르겠다라고 써도 돼. 이름은 안 써도 되니까 솔직하게 적어줘. 자수하면 더 좋고.“

급조한 설문지를 두 번 접게 한 후 뒤에서 걷어오게 한다. 설문지를 다 모은 후 짧게 종례를 마무리 짓고 아이들을 귀가시킨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다 빠져나간 후 좀 전에 걷은 설문지를 하나씩 펴본다. 대부분 귀찮다는 듯 모름혹은 모르겠다라고 성의 없이 크게 끄적여놓았는데 작은 글씨가 촘촘히 적힌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

곧바로 확인해보니 역시 17번 사물함에 기계뭉치 같은 게 들어있다.

  “이게 cpu 쿨러라는 거군.”

   다음 날 아침. 컴퓨터 담당자에게 되찾은 cpu 쿨러 장착을 부탁한 후 전원을 켠다. 먹통이다. 고장난 cpu 쿨러였다. 원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 새 컴퓨터에 있는 cpu 쿨러와 고장난 cpu 쿨러를 바꿔치기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누굴까? 어제 돌렸던 설문지 뭉치를 꺼내본다. 45. 45명이 한 장씩 써낸 것이다. 교탁 위에 45장의 작은 설문지를 넓게 펼쳐놓고 앞 줄 부터 한 사람씩 나오게 하고는 본인이 쓴 설문지를 고르게 한다. 다들 자기가 쓴 것을 알아본다. ‘모르겠음’, ‘모름’, ‘몰라요등 글자는 몇 자 되지 않아도 자신이 쓴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마지막 세 장이 남고 자기 것을 아직 고르지 않은 아이도 세 명이 남았다. 마지막 세 장 중에는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 가 있는데 마지막 남은 세 명 중 아무도 자기 것이라고 나서지 않는다. 이들을 제외한 42명의 친구들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얼굴 붉히고 닦달할 수는 없는 노릇. 조용히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교무실로 향한다.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솔직하게 말해줘. 그러면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할게.”

순간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이들 세 명 중 덩치가 제일 작은 아이는 매우 초조한 표정에 사색이 되어가고 있고, 두 번째로 키가 큰 아이는 무표정, 이들 중 덩치와 키가 제일 큰 아이는 무표정에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누굴까? 세 장을 동시에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것을 고르게 한다. 먼저 모르겠음이라고 쓰인 종이를 두 번째로 키가 큰 무표정의 아이가 냉큼 고른다. 다음 순간 모름이라고 쓰인 종이를 집으려고 초조한 표정의 작은 아이와 덩치 큰 당당한 아이가 동시에 손을 내민다. 잠시 두 아이와 번갈아가며 눈을 맞춘 채 가만히 기다린다. 콩당콩당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세라 얼굴에 힘을 준다.

   잠시 후, 초조한 표정의 아이에게 묻는다.

  “이거 네가 쓴 거 맞아?”

  “.”

눈빛이 간절하다. 휙 고개를 돌려 무표정의 당당한 아이에게 ‘17번 사물함에 cpu 쿨러가 들어있어요.’라고 적힌 마지막 종이를 들이민다.

  “이거 네 꺼지?”

  “.......”

  “네가 그랬구나.”

마지못해, 그러나 무표정하고 당당하게,

  “.”

범인을 밝힌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비애감에 젖어들었다. 이 무표정하고 당당한 태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왜 그랬니? 집에 있는 컴퓨터가 낡고 고장나서 그랬었노라고.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발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이 아이가 생각난다. 그 무표정하고 당당한 시선으로 허탈감에 쪼그라든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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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1-22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사이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어요.
오늘 아침에는 0도였다고 하는데, 이제 진짜 겨울인가봐요.
이 글은 오전에 한번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이 생각나서 다시 한 번 더 읽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

nama 2018-11-22 19:59   좋아요 1 | URL
늘 한결같은 서니데이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즐거운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oren 2018-11-2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희귀한 경험을 하셨네요.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도중에,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자꾸만 겹쳐 떠오르는 건 ‘혜경궁 김씨 사건‘이네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증거가 차고 넘쳐서 더 이상 부인하기가 민망할 지경인데, 과연 언제까지, 어디까지, 어디가 끝인지는 몰라도 정말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인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네요. 거짓말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꾸만 몽테뉴가 했던 기막힌 말들도 생각나고요.

* * *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크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http://blog.aladin.co.kr/oren/9165803

nama 2018-11-22 20:15   좋아요 1 | URL
거짓말에 대한 기막힌 표현이네요. 거짓말은 천한 악덕...맞습니다.
끝까지 부인하는 모습이 보기에 딱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화도 나지요.
끝까지 우기는 모습이 참 초라합니다. 그걸 모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