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토요일.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는 날. 우리가 발길을 옮기는 서울역-시청-종로 일대는 온통 경찰 무리만 보인다. 숫적으로 엄청나다. 밋밋하고 무의미하던 일상이 이곳에 오면 삶에 대한 의지로 팽팽해진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며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친구들과 희희낙낙하는 게 좀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지만...

 

오가는 전철에서 펼쳐본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p.58  이창근: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긴 해요. 파란 잔디 위에서 5,000명이 모여서 조용히 책을 읽는 거예요. 주제가 만일 '삼성 비판'이라면 삼성 문제와 관련한 모든 책과 자료를 다 모아서 앰프나 확성기는 일절 쓰지 않고 조용히 그걸 읽는 거죠. 저놈들이 정말 아파하는 일을 함께 해보는 거죠.

 

시청 앞 서울광장 잔디밭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거다. 햇볕이 따가운 사람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돗자리를 펴놓고 앉고,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들은 덕수궁이나 창덕궁의 나무 그늘에 앉아 스마트폰 대신 책이나 자료를 펼쳐보는 거다. 평소 어린 자녀를 도서관이나 서점에 데리고 다니는 젊은 부모들은 그냥 도서관 대신 풀밭으로 나오는 거다. 김밥 싸들고. 곳곳에 위치한 잔디구장에서도 축구 대신 책을 들고 끼리끼리 앉아 있는 거다. 시위 저지에 나선 경찰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서 꾸벅꾸벅 졸며 고개를 떨군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몇 시간의 독서와 정보 공유로 갑자기 똑똑해지면서 '저놈들'의 속셈을 낱낱이 깨닫게 되는 거다. 주제를 정해 하나씩 격파해나가는 거다. 삼성 문제, 사교육 문제, 대통령의 권한, 세금 문제, 비정규직 문제....주제는 끝이 없을 테고. 덕분에 책도 많이 팔리고....

이런 시위 소식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전세계 사람들이 파란 풀밭만 보면 날을 정하고 주제를 정해 책에 빠져드는 거다. 그래서 사악한 무리들의 속을 꿰뚫어보는 거다. 생각이 모이면서 행동이 변하는 거다.

 

이런 시위 해보고 싶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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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a 2014-10-1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동화같은 시위가 되겠네요. `으뜸헤엄이`라는 동화가 생가납니다.
작은물고기를 잡아 먹는 아주 커다란 물고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으뜸헤엄이가
이렇게 말하지요.
˝좋은 방법이 있어, 우리 작은 물고기들이 서로 몸을 붙이고 자기자리에서 헤엄을
쳐서 바다에서 제일 큰 물고기 모양을 만드는 거야. 나는 눈이 될게.˝
기득권의 불평등과 횡포에 대항할 큰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가야 겠지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결정적인 으뜸헤엄이. 빌게이츠보다 탄생되기 힘든 존재임엔
틀림없나 봅니다...

nama 2014-10-12 16:09   좋아요 0 | URL
`으뜸헤엄이`...멋진 동화입니다.
빌 게이츠보다 탄생되기 어렵지만은, 아닌 것 같군요. 잘 살펴보면 세상에 `으뜸헤엄이`같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많아요.
아래 사진은 홍콩판 으뜸헤엄이쯤 될까요?

http://img.hani.co.kr/imgdb/resize/2014/1011/00515407301_20141011.JPG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59248.html?_fr=mt2

sabina 2014-10-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하! 그렇네요. 정말 절실함이 묻어나는 인상적인 사진입니다.
각 분야마다 많을 거예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소녀도 그런 살아있는 존재중의 한사람이겠죠
그런데... 빌게이츠(사실은 요즘 자본주의 비관론에 관심이 있어서)를 비교한 것은
그런 사례가 나오기 힘들다가 아니라, 자본주의 긍정(?)의 힘을 보여주는 빌게이츠
보다 그분들의 투지, 신념을 관철시키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데,표현이 부족했네요.


 

30대부터 쓰던 299리터 냉장고는, 지금은 LG의 G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예전의 금성제품이다.

23년간이나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이 냉장고가 드디어 수명을 다했다. 동백꽃 떨어지듯 아무 예고없이 어느 한순간에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그저께였다.

 

새 냉장고가 집으로 들어오기 전 급하게 마지막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그린 토끼그림, 묵나물 해먹는 방법을 알려주는 종이, 신문에서 오린 간단한 레시피, 세계사 연표 등이 안쓰럽게 붙어 있다. 이 냉장고는 가족이었다. 냉동, 냉장 보관 기능에다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 딸아이의 재롱까지 모두 담고 있는 듬직한 가족이었다. 23년 동안이나.

 

결혼 전 한때는, 내가 출근한 사이 새언니가 와서 냉장고 청소와 더불어 밑반찬을 해놓고 간 적도 있었다. 결혼 후, 시어머님과 함께 살 때는 시어머님의 고된 손길이 많이 닿았었다.

 

300리터에서 1리터가 모자라는 이 냉장고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김치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김장김치도 다 수용했었으니, 김치냉장고를 사용한 후부터는 공간이 여유로울 때가 많았다.

 

80년대 초반 무렵, 그때는 전자제품하면 금성을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다. 수명이 제일 오래간다고 해서 우리집에서는 무조건 금성제품만 사용했었다. 부모님 생각이 난다.....

 

 

잘가라. Gold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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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9-26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저까지 서운한 마음이 들죠? 저도 친정에 가면 아직 GoldStar 로고가 있는 선풍기가 있어요. 엄마 말씀에 의하면 제 나이와 동갑이라더군요.
냉장고, 그만하면 오랜 동안 제 임무를 충실히 다 했네요.

nama 2014-09-27 08:16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배운 <조침문>이 내내 떠올랐어요. 바늘 하나 가지고도 사람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이상했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게 이제는 이해가 되네요.

sabina 2014-09-2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GoldStar...오랫만에 보는 로고가 정겹게 느껴지네요.
올해 초, 저도 23살 딸아이와 동갑인 삼성 세탁기와 이별했죠. 기사분이 그러더군요.
부속을 구할 수 없고 더구나 삭아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상태라고.
이정도면 환갑 진갑 아니, 백수를 다한 셈이겠죠?
사람만큼은 아니래도 내곁에서 오래지낸 물건에게도 일말의 애정이 생기나 봅니다.
가끔은 못쓰게되어, 버린 물건들이 생각날 때가 있으니...

nama 2014-09-27 08:21   좋아요 0 | URL
삼성도 오래가네요. 어제 새것을 들여놓으면서 기사분에게 물었더니 요즘것은 수명이 7~8년이라고 하네요. 가격이 많이 내려간 대신 부품을 그에 맞게 저렴한 걸 사용한다나요.
사람은 살다보면 미울 때도 있는데,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이런 물건이 더 듬직할 때가 있어요. 늘 묵묵하게 인간한테 헌신하고 있으니까요.

qualia 2014-09-27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 아프셨겠어요. 〈23년간이나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이 냉장고가 드디어 수명을 다했다. 동백꽃 떨어지듯 아무 예고없이 어느 한순간에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23년 동안이면 사람 마음이 깃들어서 냉장고도 사람이 다 되었을 텐데요. 사람한테 마음껏 베풀어주고 떠나가네요. 귀여운 토끼 그림도 넘 안타까워하는 듯해요.

저도 금성 GoldStar 전기밥솥을 한 20여년째 쓰고 있답니다. 보온이 안 돼 찬밥 먹을 때가 있긴 하지만 아직도 밥은 잘 돼요. 20여년 동안 쌀이 저 전기밥솥 몸속을 거쳐, 밥으로 제 몸속을 지나 에너지나 의식으로 연소되고, 다시 다른 물질이나 흙으로 돌아간 것이죠. 저 전기밥솥이 저한테 언제까지 밥을 해줄 수 있을지 살살 걱정돼요. 그렇지만, 동생이 사다준 새 전기밥솥 박스를 몇 년째 뜯지 않고/못하고 있어요.

nama 님 〈잘가라. Goldstar!〉 마지막 작별인사 때문에 마음 짠해지네요.

nama 2014-09-27 08:29   좋아요 0 | URL
GoldSta라는 단어를 들으니 왜 이렇게 정겨운지요...님의 전기밥솥도 장수하기를 빌어요^^ 물건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아직도 현관문을 번호키가 아닌 예전 열쇠를 쓰고 있어요. 간혹 열쇠를 챙기지 못해 사단이 일어나기도 해서 늘 딸아이의 원성을 사고 있어요. 그럴 땐 제가 그러지요. ˝아직 열쇠가 살아있잖아.˝

수양 2014-09-27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냉장고란 이런 존재로군요! 이제 막 하나둘 살림 장만하기 시작한 예비새댁인데요 새삼 냉장고의 의미에 대해 곱씹다가 갑니다. 냉장고... 이거이거 함부로 살게 아니네요^^ 냉장고 사진 보며 아우라를 느껴보기는 첨입니다 *_*

nama 2014-09-27 08:38   좋아요 0 | URL
냉장고 아우라...이렇게나 감동적인 표현을...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제 생애 처음으로 구입한 냉장고여서 더욱 애정이 깊었었지요.
새 냉장고를 구입하려고 매장에 갔는데, 글쎄 모두 크고 비싼 냉장고만 진열되어 있었어요. 결국 저는 카타로그를 보고 주문해야 했어요. 작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매장에 진열 조차 되지 않는 냉장고지만, 우리집에서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hwan 2014-10-06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계는 안써도 오래되면 고장이 쉽게 나더군요 qualia님! 새 전기밥솥 아끼지 말고 사용하세요

nama 2014-10-06 16:12   좋아요 0 | URL
쓰지 않고 모셔둔 새우산을 몇 년 지나 쓰려고 꺼내보았더니 만지는 순간 플라스틱부분이 부스러지던 경험이 있어요. 책을 며칠만 안 읽어도 문자에 낯설어지고, 영어발음을 며칠만 쉬어도 입안이 깔깔해져요. 하물며 기계야...
 

다음은 박노해의 시.

 

나 거기 서 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아 레바논이여!

팔레스타인이여!

바그다드여!

홀로 화염 속에 떨고 너

 

국경과 종교와 인종을 넘어

피에 젖은 그대 곁에

지금 나 여기 서 있다

지금 나 거기 서 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이 구절에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했다. 우리 가족이 그랬으니까. 우리 나라의 중심, 지금은 세월호 유가족이다. 명심하시라, 제발.

 

위 시는, 도서관에서 찾은 박노해의 아래 책에 실려 있다. 절판된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직도 판매중이다.

 

 

 

 

 

 

 

 

 

 

 

 

 

 

 

침묵의 나라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할 때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 성취한

자랑스런 나의 조국은 침묵했다

 

까나 마을에 폭격이 퍼부어지고

36명의 아이들이 학살당할 때

말 잘하는 나의 정부는 침묵했다

 

많은 나라들이 가장 강력한 말로

이스라엘의 학살을 규탄할 때

싸움 잘하는 나의 국회는 침묵했다

 

민주와 개혁을 거침없이 외치던

나의 대통령과 지도자들은

금처럼 찬란하게 침묵했다

 

코리아는 침묵의 나라

불의와 학살 앞에서는

금처럼 침묵하는 나라

 

일본이 독도를 건드릴 때마다

국제 심판이 오심을 내릴 때마다

노조가 파업을 벌일 때마다

즉각 애국투사로 소리치면서도

 

학교에서 내 아이가 무시당하고

밥집에서 내 순서가 뒤로 밀리고

거리에서 내 차가 추월당하면

즉각 정의의 투사로 돌변하면서도

 

대낮에 남의 영토를 침략하고

아이들과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야만 앞에서는

금빛 침묵으로 동조하는 나라

 

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코리아여

국익 앞에서만 다이내믹한 나라여

네가 짓밟히고 피에 젖어 울부짖을 때

세계는 너의 침묵을 찬란히 돌려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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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기의 책은....요약과 쉬운 설명이 대단한 장점이자 매력이지만 깊이는 좀 아쉽다. 리스트에 넣다가 읽은 책도 별로 없고 앞으로 얼마나 더 읽을까 싶어, 넣다가 만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
최진기 지음 / 스마트북스 / 2012년 10월
17,500원 → 15,750원(10%할인) / 마일리지 8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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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간단 명료한 해설에 혹해서 책에 빠져드나 물이 너무 얕아서 그만 걸어나오게 되는 책.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 2- 서양미술사
최진기 지음 / 스마트북스 / 2014년 1월
18,500원 → 16,650원(10%할인) / 마일리지 920원(5% 적립)
2014년 09월 24일에 저장
절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열흘에 걸쳐 읽었었는데 이 책을 보니 명쾌한 정답을 보는 기분이 든다. 요약정리의 힘이다. 2014.9.24.
일생에 한 번은 체 게바라처럼- '인문학 특강''생존경제학' 최진기의 리얼 인생 특강
최진기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2년 6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14년 09월 24일에 저장
절판

동양고전의 바다에 빠져라 (특강DVD 포함)
최진기 지음 / 스마트북스 / 2013년 3월
18,500원 → 16,650원(10%할인) / 마일리지 920원(5% 적립)
2014년 09월 24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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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말 그대로 하루종일 근 8시간을 컴퓨터 작업하던 시험출제원안지를, 오늘 수정작업하는 중 3/5이 날아가버렸다. 순간 자신감 급추락을 동반한 두뇌의 백지화 현상이 창졸간에 일어났다. 잠시후, 다행스럽게도 외장하드에 백업해놓은 게 떠올랐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일은 마무리했으나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책 한 줄 못 읽은 것에 대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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