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 계신 엄마한테 다녀왔다. 오고 가는 차 안에서는 연신 차창에 머리를 부딪쳐가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달콤한 선잠 사이로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라 마음을 붉혔다.

 

엄마는 남들 앞에서 딸자랑을 무척 많이 하셨다. 초등학교 때 6년간 우등상 탄 것 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때 어떻고,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고, 대학은 어디 나왔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까지 자랑으로 시작해서 자랑으로 끝났다.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그런 엄마의 자랑을 먹고 컸으나 나는 결코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다. 엄마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겨우 내 앞가림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쩌면 이제껏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는 생각이 오늘 갑자기 들었다.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반면에 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한 적이 있었던가를 떠올려 보았다. 있었던가?

 

엄마가 병실을 옮기게 되어 자연히 간병도우미분들도 바뀌었는데, 오늘 처음 뵌 간병도우미분이 엄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손이 고우신 걸 보니 농사 지은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을 하셨느냐고 물어왔다.

 

엄마의 손은 원래 마디가 짧고 뭉툭하고 일을 많이 해서 손톱이 거칠고 지문이 거의 닳아 있었다. 엄마 손은 원래 이런 모양인 줄 알고 있었는데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 온몸의 살이 다 빠지고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게 되자 손의 본모습이 돌아왔는데, 엄마의 손이 아주 예쁘고 손톱도 맑은 색채를 띠고 있었다. 엄마의 손이 이런 예쁜 모습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본 순간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었다.

 

엄마가 과거에 하신 일을 묻는 간병인의 물음에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40대에 조기퇴직하신 아버지 대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억척스럽게 하셨던 일수놀이를 나는 한번도 자랑스럽게 남들에게 떳떳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일수놀이는 온 힘과 온 정성을 다바쳐서 하신 일이건만 자식들로서는 결코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못되었다. 일수놀이...'놀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이 일은 결코 놀이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밤마다 엄마가 걸어다녀야 했던 길은 아마도 지구 몇 바퀴에 해당하는 거리였으리라. 온 몸을 다 바쳐서 하신 일이어서 엄마의 몸은 이제 성한 곳이 없다. 왼쪽 다리는 90도 각도로 휘어진 상태로 굳어져버렸고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휠대로 휘어서 등나무처럼 둘째 발가락을 휘감고 있다.

 

한번도 자식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직업이 아니었지만 엄마의 삶은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웠다는 것을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끝내 부끄럽다.

 

자식 자랑하는 부모와 부모 자랑에 인색한 자식, 이것도 내리 사랑의 일종인가. 그래도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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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나쁜 애다.
    from I'm in ORDER. 2014-11-17 14:47 
    나는 정말 나쁜 애다.(먼 댓글로 이런 글을 쓰는 게 과연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과 내가 요 며칠 느끼는 감정이 같다고 생각한다.)지난 주부터 자꾸 치아를 뽑히는 꿈을 꿨다. 벌써 세 번째. 혐오스럽거나 섬뜩하거나 고통스러운 꿈은 아니지만, 그런 꿈은 대체로 흉몽으로 분류되기에 꿈을 꾸고 나서도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개인적으로 내가 인지하는 가족의 범위는 할머니까지이고 - 나머지는 혈연관계...? - 근 1년 사이에는 엄마에게 무지하게
 
 
 

딸아이를 수능시험장에 데려다주고 출근했는데 오늘도 1등 도착이다. 9시 50분까지 출근하면 되는데, 만날 어떻게 하면 학교를 그만둘까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일찍 출근하니 이건 내 의지라기 보다는 그냥 습관이다, 습관.

 

수능 이전에 학력고사라는 시험제도가 있었고, 학력고사 이전에는 예비고사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 예비고사 세대이다. 소위 지역별 커트라인이라는 것이 있어서 보통 서울은 200점이상, 충남 같은 지방의 경우 180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36년 전 예비고사 보던 날. 그 당시만 해도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아서, 곳곳에 고사장이 마련된 지금과는 달리 도청소재지인 수원에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지금처럼 자가용 승용차가 없던 시절이라 부모들은 서로서로 모여서 아이들을 택시로 고사장까지 실어나르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우리 부모님 얘기다.

 

그렇게 모의 끝에 동네 삼형제쌀집 딸과 내가 함께 묶였는데 다음 날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쌀집 딸내미가 말도 없이 약속을 저버리고 혼자 가버린 상태였다. 그것도 한참을 기다린 끝에 알게 되었다.(사실 그게 한참인지는 모를 일이다. 마음이 조급하니 그렇게 느꼈을 게다.) 하는 수 없이 그냥 혼자서 버스를 타고 가는 수 밖에.

 

당시 나는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사실 버스 타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고사장은 비교적 수원역에서 가까운 나의 모교보다도 훨씬 거리가 먼 수원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학교여서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들이 택시까지 대령한 것이다.

 

그래도 버스로 어떻게든 시간내에 고사장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시험을 치렀다. 1교시 과목은 국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잘~치렀다.

 

시험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내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쌀집딸의 약속파기로 혹시나 고사장에 못갔을까 노심초사하시던 아버지가 택시로 내 뒤를 쫓아 수원까지 갔다오셨다고 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버스로 가고, 아버지는 걱정과 불안으로 택시 타고 따라가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수원까지는 기차로 30분 걸리는 거리였다.

 

그로부터 36년이 흐른 오늘, 딸아이를 고사장에 데려다주는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와 아버지의 나이 차와 나와 딸아이의 나이 차가 같다. 나는 사남매의 막내고 딸아이는 외동이다. 청심환 한쪽을 베어물고 집을 나선 딸아이가 애처롭다. 집에서 20여 분 걸어가면 되는 곳을 승용차로 모셔다주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과잉보호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딸아이도 부모가 되어 오늘의 내 심정을 겪을 날이 올 터이다. 다만 36년 후가 아니길 바랄 뿐이며, 청심환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자녀를 두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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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1-1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은 최선을 다해 잘 볼 거예요 ^^

nama 2014-11-13 16:05   좋아요 0 | URL
고3 과정이 참 장난이 아니네요.
(부모가)젊을 때 겪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nama 2014-11-1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은 딸아이가 발끈했다. 저는 걸어간다고 했는데 억지로 태워주고 이런 말 한다고. 평소에도 30여 분씩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인데...미안,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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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갑자기 오늘 암수술 받는다고 전해온 친구의 전화.

내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그 친구가 알려준 노래를 듣는 일 뿐.

 

http://youtu.be/wrMT226Ox98

 

(동영상 올리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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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2014.10.17에 찍음.

 

아래 사진들은 오늘.

꽃도 예쁘더니 열매도 예쁜 찔레꽃 나무

 

 

민들레는 아닌데 그럼 누구?

 

 

면접 대기 중...수능 앞 둔 딸내미의 관점

 

 

갈대

 

 

소금창고

 

 

족제비싸리나무...까맣게 타들어가듯 엉킨 게 꼭 내 마음일세.

 

 

과거의 염전- 햇빛에 반짝이는 타일조각이 압권인데 기계가 사람 눈만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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