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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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1>을 읽다가 하마터면 <발원2>를 안 읽을 뻔했다. 1권 끝 부분에서 잠시 첨성대 설명이 나오는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서 이내 시큰둥해지고  정신도 약간 다른 곳에 쏠려 있어서 읽을까 말까를 망설였었다.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로 이 책을 계속 읽어야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2권을 집어들었다.

 

1권을 지지부진하게 읽었다면 2권은 단숨에 읽었다. 그러면서 나의 좁았던 시야가 확대되는 기분이 들었다. 제목 '발원'이 의미하는 바가 확실하게 다가왔다.

 

발원:원(願)은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하나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기어코 달성하겠다고 하는 서약적인 결의를 말한다. 발원은 어리석고 나쁜 마음을 모두 버리고 부처님처럼 크고 넓고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다짐하는 불자의 바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자에게는 누구나 원이 있다. 원은 우리의 삶에 목표를 두고 중심을 이루며, 지혜와 용기가 나오는 것이다. 먼저 불자가 갖는 대표적인 근본 원이 4가지 있다. 그것은 "첫째, 가엾은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둘째, 끝없는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셋째, 한없는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넷째, 위없는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라고 하는 사호서원(四弘誓願)이 그것이다. 불자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이 원을 여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온갖 어리석음 속에서 한없이 어려운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맑고 밝은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이 서원력으로 인하여 모든 불자는 번뇌에서 벗어나며 악도를 벗어나고 중생을 제도하며 불국 정토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원은 자신의 이익만을 얻으려는 욕심이 아니라, 남도 이롭게 하려는 생활 태도다. 원(願)은 곧 희망(希望)이며 이상이다. 사람이란 참된 희망과 영원한 이상을 지님으로써 전진이 있고 향상이 있게 된다. 참된 보리 열반의 불과(佛果)를 성취하려는 불자로서 어찌 넓고 큰 희망과 이상을 지니지 않겠는가. 그 이상과 희망이 크면 클수록 그 활동과 노력도 큰 것이요, 그 노력이 클수록 그 결과도 클 것이니 불자로서 넓고 큰 서원을 세워 굳게 그 원을 닦아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행이라고 하겠다. 우리 불자들은 이 땅에 태어난 다행스러움과 부처님 법문을 만난 경사스러움에 큰 감사와 용기를 일으켜 발원을 하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굳게 맹세하여야 겠다. 원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십년, 이십 년은 자기가 세운 원대로 행할 수 있는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세운 원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그 원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출처: Daum 백과사전)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원효일까? '발원'이 뜻하는 바를 곰곰 생각해보면 인간사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늘 '발원'할 수밖에 없고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인물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 인물이 있어 위로가 되고 다시 삶을 새롭게 정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작가가 살려낸 원효를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괜찮지 않은가?

 

작가가 자신의 언어로 빚어낸 불교의 세계에 깊이 빠져보는 것도 이 책의 묘미다. 눈 앞이 환해지는 느낌에 자족적인 미소가 떠오를지도...내가 그랬다.

 

밑줄긋기에 어울릴 부분이 많은데 딱 하나만 골랐다. 이 시대의 누군가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원효를 만나고 싶다.

"잘 들어라, 원효! 정치란 백성의 삶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백성이란 그냥 있는 것이다. 누가 백성의 지배자가 되는가. 이것이 중요할 뿐, 백성에겐 정의가 없다. 백성에겐 국가가 없다. 그들은 어디에서건 목숨만 부지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너희들의 그 한심한 아미타림처럼 말이다."(김춘추의 말.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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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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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올곧으며 단정하다. 내가 느끼는 김선우의 글이 이렇다. 그중 나는 그의 '올곧음'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도 나는 단연 그의 올곧은 모습을 보고 그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면모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물론 독자로서 이 책의 단점 같은 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밥 먹다가 입가에 밥풀이 붙었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정도라고나 할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 여기면서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날이 밝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라. 이 새벽을 나는 견디지 못하겠으나, 너는 반드시 견뎌 내겨라."(19쪽)

조국, 충, 용맹. 임전무퇴. 이 모든 관념은 한 줌 지배 귀족의 권력 욕망에 소모되는 가여운 희생을 낳을 뿐이다. 헛된 망상을 조장할 뿐이다. 어떤 것도 생명 앞에서는 모두 삿되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 있는 그대로 고통의 실상과 대면하겠다. 신라는 보이지 않으나, 저 소년은 보인다. 신라의 맥박은 뛰지 않으나, 저 소년의 맥박은 뛰고 있다. 내게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경꼐 지어 놓은 삿된 국경보다 더 큰 조국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아낼 것이다. 조국의 이름으로 살생하지 않아도 되는 조국을.(115)

"탁류 속에서 승자가 된들, 탁류를 맑게 만들 수 없습니다. 어찌해야 탁류를 다시금 본래의 감로수로 되돌릴 수 있을지, 소승이 궁구하는 바는 그것입니다."(157)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길을 찾는지도요."(336)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부처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 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먹장구름을 쪼개는 뇌우처럼 들이닥쳤다. 부처를 사랑하는 것과 부처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일불이로 현현하고 종내는 서로 통하여 어우러질 것이라는 생각 역시 순식간에 지나갔다. 부처가 돼야 한다는 일념이 집착에 기인한 허욕임을 인정하자 마음의 안팎을 연결하는 굴 같은 것이 삽시간에 뻥 뚫리는 듯했다. 순수한 공기의 파동이 쏴아 밀려들면서 가슴속이 시원해지고 너털웃음이 터졌다.(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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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써먹을 한마디를 발견했다. 차마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ㅋ

 

 요령을 피우면 결국 손해를 본다. 남의 숙제를 베끼는 아이들은 끝내 스스로 문제를 풀 능력을 얻지 못한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실력을 키우지 못하면 점점 더 뒤로 처지고, 요령을 편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우직하고 무식하게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내는 사람만큼  건실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

  능력 대신 요령을 익히면, 그만큼 손해를 본다. 손해를 보는 듯싶지만 남의 일까지 대신 다 하는 사람은 능력 또한 남의 몫까지 얻는다. 그러니까 손해를 봐야 손해를 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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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영어교과서에는 유독 favorite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툭하면 favorite movie, favorite sport, favorite food, favorite country, favorite subject, favorite star...반드시 무엇인가 좋아하지 않으면 대화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나온다. 왜일까? 왜 편견을 조장하고 강화시키는 걸까? 왜 자신의 속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하는 걸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밝혀야만 서로 소통이 가능한가?

 

소설가 윤후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걸 단박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망설이던 참에 favorite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80~90년대는 나에게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와 윤후명의 시대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첫사랑의 아련함 같은 게 배어있고, 윤후명은 그의 어떤 특정한 소설보다 그냥 윤후명 자체로 남아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윤후명스러움', '윤후명체'라고나 할까.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윤후명의 책을 만나면 무심결에 손이 간다. 눈인사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잡게 된 책이 다음 책이다.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사랑의 방법>, <원숭이는 없다>와 몇몇 작가의 감상평, 그리고 말미에는 작가가 쓴 '문학적 자전'.

 

<원숭이는 없다>는 분명 예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마치 처음 읽는 듯했다. 윤후명이란 소설가의 소설이 대개 그런 것 같다. 새 소설을 읽어도 언젠가 읽었던 것 같고, 다시 읽어도 마치 처음 읽는 것 같다. 소설 속 문장들이 때로 시와 같아서 운문과 산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문장도 그렇고 소설 속 분위기도 그렇다. 뭐가 시적이냐? 라고 뭉는다면 딱히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윤후명의 소설을 접할 때면 늘 느끼는 기분이다. 한때는 그의 소설을 필사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생각으로 그쳤지만.

 

분명 읽은 소설인데 새롭게 다가온 구절을 옮긴다.

 

그 뒤 나는 원숭이 꿈을 여러 번 꾸었는데 나타난 것은 어김없이 그 원숭이였다. 그리고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한 마리의 원숭이를 두고두고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외로운 상태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 속내를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고 함께 나누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서의 원숭이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소설속 원숭이는 다의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위의 문장을 보고 원숭이의 의미를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만약 이 소설을 지문으로 해서 문제를 내게 된다면, 예를 들어 '작가의 의도는?', 혹은 '이 소설에서 원숭이가 상징하는 바는?' 같은 걸 묻는다면 분명 작가조차도 정답을 맞힐 확률이 그리 높지 않으리라. 얼마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에서 안도현 시인이 그랬다. "내 시가 실린 문제를 풀었는데 다섯 문제 중 하나가 틀렸다. '작가의 의도는?'이라는 문제였다.'

 

 

오늘도 내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윤후명의 소설을 빌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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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favorite 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편인가요. 읽다보니 그냥 궁금해서요. ^^;
오늘 눈이 참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면서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nama 2015-12-03 12:32   좋아요 1 | URL
그거야 모르지요. 실제 어떤지는...
눈이 펑펑 쏟아지다가 해가 반짝나고, 참 황홀한 날이네요.
 
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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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치밀하고 격조있는 소설가의 장인정신. 소설을 제대로 읽는다는 의미를 되새기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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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책도 괜찮다고 하시니, 저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요,
nama님, 편안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

nama 2015-12-02 07:18   좋아요 1 | URL
이 책 읽고나면 소설 읽는 맛이 달라질 것 같아요. 의미가 증폭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