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 노르웨이의 한국인들이 말하는
박노자 외 지음 / 꾸리에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노르웨이에 사는 한국인들이 노르웨이의 복지에 대해 쓴 책이다. 필자가 다양한 만큼 색깔도 다양한데 역시 박노자의 총론이 책의 중심이 되는 것 같다.

 

노르웨이에서 복지국가의 기본적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기로,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소련처럼 체제를 전복시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팽배했는데 이에 보수정당들이 혁명에 대한 공포로 인한 하나의 양보로 복지개혁을 수용했다고 한다.

 

복지 지출의 상당 부분은 기업세나 주식 양도세, 배당금 과세 등이 아닌 개인소득세에 의존하며, 총국민생산 중 세금으로 인한 수입의 비중이 한국이 26퍼센트인데 비해 노르웨이는 43퍼센트, 스웨덴은 45퍼센트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경우 그 비중을 아주 크게 늘려야 완전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내실 있는 노후연금 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p.254..그런데 한국 언론들은 '세금폭탄'이라는 신조어를 제조했을 만큼, 부자나 준부자들의 납세 저항만을 선동할 뿐 진정한 의미의 '공공성 가치에 입각한 재분배'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적대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편적 복지의 도입으로 가장 이득을 볼 가난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비정규직들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255...마르크스의 말대로, 미조직 대중들이 가질 수 있는 사상은 바로 당대 지배계급의 어떤 사상적 틀일 뿐이여, 또 위기에 내몰릴수록 강경보수 내지는 극우 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지하고 보수당에 투표하는 이유이다. 혁명은 대중적 조직만이 할 수 있다.

 

박노자의 글에는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복지 정책을 그렇게 부러워만 할 것은 아니라고 정확히 못 박는다.

 

p,261...(노르웨이의) 대규모의 복지지출이 가능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복지국가의 국제적 '먹이사슬'에서의 비교적으로 높은 위치 때문이다. 지구인 전체가 노르웨이만큼의 소득 및 소비 수준을 누리자면 우리에게 약 세 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만큼 노르웨이의 특수한 경험을 무조건 보편화시켜서 다른 나라들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p.267  결국 우리에게 노르웨이는 과연 무엇인가? 일면으로는 근로대중들이 한 때 잘 조직돼서 복지개혁 등을 통해 그나마 인간다운 삶을 쟁취할 수 있었던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복지주의적, 사민주의적 프로젝트가 자본주의 틀에 갇히고 국민국가의 틀에 포획된 곳이기도 하며, 도 세계 자본주의의 질서의 맨꼭대기에 위치한, 바깥으로부터의 가난한 타자들의 유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안에서는 보이지 않게, 최고의 '선진적(?)' 방식으로 모든 것을 감시하며 관리하는 '최첨단' 자본주의의 보루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노르웨이를 참고모델로 하되 수정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이상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렇게 '높은 이상'을 말하는 사람이 있구나. 박노자의 글을 계속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게는.

 

p. 249 우리들의 생각은 각종 진보적 담론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의 방식은 극도로 자본주의적이다.

 

이건 또 어리석고 무지한 나에 대한 얘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듯이 공간 역시 그러하다. 내 몸 뉘일 방 한 칸으로만은 살 수 없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 공간이동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장실-주방-거실로의 작은 이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문을 나서면 승강기-아파트 단지-정류장-버스 혹은 승용차라는 공간의 이동을 거쳐 직장에 도착, 직장이라는 장소 역시 수많은 공간 이동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런 일상에 지치면 여행이라는 방법으로 기꺼이 낯선 공간으로 몸을 던진다. 가히 인간은 공간의 동물이다.  

 

게다가 이것도 모자라 사이버라는 가상의 공간도 있다. 이제는 인터넷 없는 세상을 꿈꿀 수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심지어.

 

어제는 옛친구들을 만나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하루를 보냈다. 서울역-남대문시장-서촌-북촌-인사동. 오늘은 가족과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하루를 보냈다. 한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어딘가로 계속 싸돌아다녀야만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두 권의 책이 공간이라는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시인 송재학의 <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는 시인의 시작노트의 글로 시작된다.

 

"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 한 황무지가 있기를 바란다. 한때 그곳은 왕국이었고, 드넓은 호수가 있었지만 지금 호수는 말라 소금기만 남아 있다. 가끔 사람의 뼈 같은 것이 허옇게 드러나서 완전히 쓸모없는 땅이기를, 그리하여 가도가도 인가는 없고 바람만이 드나들기를, 문득 신기루가 황무지의 꿈을 대신해 누각을 세워주기를, 몇 개의 희고 푸른 호수들이 별들을 잠재우다가 내 육신을 위한 거처도 마련해주리라. 누가 그곳을 황폐하다고만 말할 것인가. 황무지의 내면에 고인 것을 떠올린다. 정신의 샘이 마를 때마다 나는 황무지를 횡단하리라. 어쩌면 들짐승들을 만나게 되리라. 그들의 양식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탄생시키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걷다가 걷다가 잠이 들리라. 바람과 모래사막이 가장 깊은 심연으로 나를 데리고 가리라. 가장 스산한 것은 가장 빛나는 것의 속셈. 날마다 바람이 세우고 날마다 바람이 허무는 사원에 경배하리라. 신발을 벗고 종일 모래 위에서 결가부좌로 내 안에서 시작하는 몸의 계단으로 내려가리라. 깊은 곳에 닿으면 내 몸에도 우주의 장엄이 있다는 것을 소스라치도록 느끼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리라.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한 황무지가 있기를 바란다. 다만 인간이 거쳐서 폐허가 된 곳을 황무지라 부르지 않겠다. 그곳에 내 생각의 대부분이 헌정된 것을 어떡 하랴. 현실의 황무지뿐 아니라 상상의 황무지조차 그 몽리 면적을 넓히기란 쉽지 않다. 느리게, 스멀거리며, 자꾸 움푹 패이는 내 정신의 황무지는 헤아릴 수 없는 무효용성으로 인해 나에게는 삶의 반대쪽이면서 가장 빛나는 영토이기도 하고, 그 원시성으로 인해 영혼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것이 말로 설명해보는 황무지의 얼개이다."...참으로 오랫동안 실크로드에 몰두해왔다. 

 

'유용하지 않은 넓이도 필요하다는 각성'과 '황량한 풍경은 인간 정신의 고양체일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계속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책을 읽는 오전 내내 연전에 가본 라다크의 황량한 풍경이 떠올랐다. 행복했다.

 

시인 반칠환의 시집을 신간코너에서 발견(신간은 아님), 장난꾸러기 같은 시를 읽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본다.

 

전쟁광 보호구역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 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나랏일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위정자들을 위한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줄세워 등급을 매기건 말건, 모래성 쌓듯 4대강을 쌓든 말든 내버려두고, 핵발전소를 지어 송전탑을 세우건 말건(아차, 이건 아니다. 황무지에서도 핵발전소는 안된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놀이터 같은 보호구역 하나 만들어서 맘껏 주물러보라고 던져주면 좋으련만...

 

 

시인을 위해, 위정자를 위해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 한 황무지가 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67  간디의 말씀...끝내 나라가 망하는 일곱 가지 경고

 

첫째, 원칙 없는 정부는 망한다.

둘깨, 노동 없이 취하는 부는 망한다.

셋째, 양심 없는 쾌락을 취하는 자는 망한다.

넷째, 인격 없는 교육은 망한다.

다섯째, 희생 없는 신앙은 망한다.

여섯째, 도덕 없는 경제는 망한다.

일곱째, 인간성 없는 과학은 망한다.

 

p.209  ...부처님 경전에 보면 비구로서 제일 큰 공덕행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비구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p.217

"정의란 남의 것을 전부 돌려주는 것이며, 사랑이란 내 것을 전부 이웃에게 주는 것이다."

 

p.224 .지금 티베트의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민족 말살 교육은 도를 넘어서 있다. 숙제 하나를 봐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무슨 곤충채집이라고 하면서 벌레가 아닌 큰 동물을 잡아오게 하는데, 쥐나 고양이 등 몸집이 큰 것을 잡아서 가져올수록 점수를 많이 주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티베트인의 혼을 없애가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의 정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중화의식을 심어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겨레신문에서 읽은 서평 한 토막을 옮겨본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43525.html

 

 

문제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은 “세계 5위”의 입양국이라는 점이다. 지은이는 그 이유로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더불어 한국 정부의 이상한 지원정책을 이유로 든다. “미혼모가 아이를 기를 경우 어머니의 나이에 따라 매달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를 지원받지만, 아이를 임시로 양육하는 가정위탁의 경우 매달 40만~50만원을 지원금으로 받고 고아원은 아동 1인당 105만원을 지원받는다.”(실제로 2013년 현재 만 24살 이하 한부모 가족에게 지원하는 금액은 월 15만원으로 분유값과 기저귀값도 안 되는 수준이다.) 정부마저도 미혼모에게 입양이나 고아원 위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abina 2014-06-2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가막히게(?) 불합리하네요. 이런거 널리 알리는 방법 뭘까요. 국회의원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뭐하는 겁니까? 도데체...
억대를 넘는 국회의원 연봉이 또 분개스럽네요.

nama 2014-06-30 08:58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널리 알리는 방법이 뭘까요?

아무래도 고아원보다 미혼모가 자식을 기르는 게 합당하고 아이한테도 더 나을텐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중학교때 보육원에서 살던 친구는 세자매 모두 보육원에서 생활했는데, 차라리 보육원에 지원할 돈을 그 부모에게 주었더라면 이산가족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그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거예요.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당백의 소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단연 최고! 단, 현대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좀 있어야 할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