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듯이 공간 역시 그러하다. 내 몸 뉘일 방 한 칸으로만은 살 수 없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 공간이동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화장실-주방-거실로의 작은 이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문을 나서면 승강기-아파트 단지-정류장-버스 혹은 승용차라는 공간의 이동을 거쳐 직장에 도착, 직장이라는 장소 역시 수많은 공간 이동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런 일상에 지치면 여행이라는 방법으로 기꺼이 낯선 공간으로 몸을 던진다. 가히 인간은 공간의 동물이다.  

 

게다가 이것도 모자라 사이버라는 가상의 공간도 있다. 이제는 인터넷 없는 세상을 꿈꿀 수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심지어.

 

어제는 옛친구들을 만나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하루를 보냈다. 서울역-남대문시장-서촌-북촌-인사동. 오늘은 가족과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하루를 보냈다. 한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어딘가로 계속 싸돌아다녀야만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두 권의 책이 공간이라는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시인 송재학의 <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는 시인의 시작노트의 글로 시작된다.

 

"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 한 황무지가 있기를 바란다. 한때 그곳은 왕국이었고, 드넓은 호수가 있었지만 지금 호수는 말라 소금기만 남아 있다. 가끔 사람의 뼈 같은 것이 허옇게 드러나서 완전히 쓸모없는 땅이기를, 그리하여 가도가도 인가는 없고 바람만이 드나들기를, 문득 신기루가 황무지의 꿈을 대신해 누각을 세워주기를, 몇 개의 희고 푸른 호수들이 별들을 잠재우다가 내 육신을 위한 거처도 마련해주리라. 누가 그곳을 황폐하다고만 말할 것인가. 황무지의 내면에 고인 것을 떠올린다. 정신의 샘이 마를 때마다 나는 황무지를 횡단하리라. 어쩌면 들짐승들을 만나게 되리라. 그들의 양식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탄생시키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걷다가 걷다가 잠이 들리라. 바람과 모래사막이 가장 깊은 심연으로 나를 데리고 가리라. 가장 스산한 것은 가장 빛나는 것의 속셈. 날마다 바람이 세우고 날마다 바람이 허무는 사원에 경배하리라. 신발을 벗고 종일 모래 위에서 결가부좌로 내 안에서 시작하는 몸의 계단으로 내려가리라. 깊은 곳에 닿으면 내 몸에도 우주의 장엄이 있다는 것을 소스라치도록 느끼면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리라.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한 황무지가 있기를 바란다. 다만 인간이 거쳐서 폐허가 된 곳을 황무지라 부르지 않겠다. 그곳에 내 생각의 대부분이 헌정된 것을 어떡 하랴. 현실의 황무지뿐 아니라 상상의 황무지조차 그 몽리 면적을 넓히기란 쉽지 않다. 느리게, 스멀거리며, 자꾸 움푹 패이는 내 정신의 황무지는 헤아릴 수 없는 무효용성으로 인해 나에게는 삶의 반대쪽이면서 가장 빛나는 영토이기도 하고, 그 원시성으로 인해 영혼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것이 말로 설명해보는 황무지의 얼개이다."...참으로 오랫동안 실크로드에 몰두해왔다. 

 

'유용하지 않은 넓이도 필요하다는 각성'과 '황량한 풍경은 인간 정신의 고양체일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계속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책을 읽는 오전 내내 연전에 가본 라다크의 황량한 풍경이 떠올랐다. 행복했다.

 

시인 반칠환의 시집을 신간코너에서 발견(신간은 아님), 장난꾸러기 같은 시를 읽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본다.

 

전쟁광 보호구역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 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나랏일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위정자들을 위한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줄세워 등급을 매기건 말건, 모래성 쌓듯 4대강을 쌓든 말든 내버려두고, 핵발전소를 지어 송전탑을 세우건 말건(아차, 이건 아니다. 황무지에서도 핵발전소는 안된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놀이터 같은 보호구역 하나 만들어서 맘껏 주물러보라고 던져주면 좋으련만...

 

 

시인을 위해, 위정자를 위해 이 땅에 이 나라 넓이만 한 황무지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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