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생에 관한 책이어서 반갑다. 세상엔 우등생보다 열등생이 더 많지 않을까. 1등을 제외한 대다수가 스스로를 열등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막연한 늪지에서 질척거리'게 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글을 보고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부진아수업을 해보면 안다. 다음 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이들은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라는 사실을 순간순간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내가 그들의 학교생활을 망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의감에 사로잡힌다는 것도. 물론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p.81~82 우리의 '공부 못하는 학생들'(앞날이 없다고 여겨진 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 저기 다가오는 학생들을 보라. 성장해가는 그들의 몸과 책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수업은 그 짐이 땅바닥에 내려지고 양파 껍질이 벗겨져야만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마디, 분명하고 안정직인 그 한마디면 충분히 그들의 슬픔을 녹여내고 마음을 가볍게 하여, 그들을 직설법 현재에 빈틈없이 정착시킬 수 있다.
물론 그런 호의는 일시적이며, 양파는 밖으로 나서는 순간 다시 겹을 두를 것이고, 당연히 내일 또다시 시작해야먄 할 것이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선생이라는 직업이 필연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다시 시작하는 일. 만일 우리가 한 명의 학생을 우리 수업의 직설법 현재에 정착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의 앎과 그것의 활용에 대한 안목이 이 아이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실존은 식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막연한 늪지에서 질척거릴 것이다. 물론 우리 선생들만이 그런 갱도를 파낸 것도 아니고, 그걸 메울 줄 몰랐던 것도 우리 책임만은 아니지만, 그때 그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 혹은 몇 년의 어린 시절을 우리 앞에 마주앉아 함께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망쳐버린 학교생활 일 년은 하찮은 게 아니다. 어항 속에서는 영겁의 세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