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 1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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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고 올곧으며 단정하다. 내가 느끼는 김선우의 글이 이렇다. 그중 나는 그의 '올곧음'을 좋아한다. 이 책에서도 나는 단연 그의 올곧은 모습을 보고 그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면모에 자주 마음이 머문다.

 

물론 독자로서 이 책의 단점 같은 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밥 먹다가 입가에 밥풀이 붙었는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정도라고나 할까.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 여기면서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날이 밝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라. 이 새벽을 나는 견디지 못하겠으나, 너는 반드시 견뎌 내겨라."(19쪽)

조국, 충, 용맹. 임전무퇴. 이 모든 관념은 한 줌 지배 귀족의 권력 욕망에 소모되는 가여운 희생을 낳을 뿐이다. 헛된 망상을 조장할 뿐이다. 어떤 것도 생명 앞에서는 모두 삿되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겠다. 있는 그대로 고통의 실상과 대면하겠다. 신라는 보이지 않으나, 저 소년은 보인다. 신라의 맥박은 뛰지 않으나, 저 소년의 맥박은 뛰고 있다. 내게 조국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경꼐 지어 놓은 삿된 국경보다 더 큰 조국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아낼 것이다. 조국의 이름으로 살생하지 않아도 되는 조국을.(115)

"탁류 속에서 승자가 된들, 탁류를 맑게 만들 수 없습니다. 어찌해야 탁류를 다시금 본래의 감로수로 되돌릴 수 있을지, 소승이 궁구하는 바는 그것입니다."(157)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길을 찾는지도요."(336)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부처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라 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먹장구름을 쪼개는 뇌우처럼 들이닥쳤다. 부처를 사랑하는 것과 부처가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불일불이로 현현하고 종내는 서로 통하여 어우러질 것이라는 생각 역시 순식간에 지나갔다. 부처가 돼야 한다는 일념이 집착에 기인한 허욕임을 인정하자 마음의 안팎을 연결하는 굴 같은 것이 삽시간에 뻥 뚫리는 듯했다. 순수한 공기의 파동이 쏴아 밀려들면서 가슴속이 시원해지고 너털웃음이 터졌다.(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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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써먹을 한마디를 발견했다. 차마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ㅋ

 

 요령을 피우면 결국 손해를 본다. 남의 숙제를 베끼는 아이들은 끝내 스스로 문제를 풀 능력을 얻지 못한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실력을 키우지 못하면 점점 더 뒤로 처지고, 요령을 편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우직하고 무식하게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내는 사람만큼  건실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

  능력 대신 요령을 익히면, 그만큼 손해를 본다. 손해를 보는 듯싶지만 남의 일까지 대신 다 하는 사람은 능력 또한 남의 몫까지 얻는다. 그러니까 손해를 봐야 손해를 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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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영어교과서에는 유독 favorite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툭하면 favorite movie, favorite sport, favorite food, favorite country, favorite subject, favorite star...반드시 무엇인가 좋아하지 않으면 대화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나온다. 왜일까? 왜 편견을 조장하고 강화시키는 걸까? 왜 자신의 속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하는 걸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밝혀야만 서로 소통이 가능한가?

 

소설가 윤후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걸 단박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망설이던 참에 favorite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80~90년대는 나에게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와 윤후명의 시대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첫사랑의 아련함 같은 게 배어있고, 윤후명은 그의 어떤 특정한 소설보다 그냥 윤후명 자체로 남아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윤후명스러움', '윤후명체'라고나 할까.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윤후명의 책을 만나면 무심결에 손이 간다. 눈인사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잡게 된 책이 다음 책이다.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사랑의 방법>, <원숭이는 없다>와 몇몇 작가의 감상평, 그리고 말미에는 작가가 쓴 '문학적 자전'.

 

<원숭이는 없다>는 분명 예전에 읽은 소설인데도 마치 처음 읽는 듯했다. 윤후명이란 소설가의 소설이 대개 그런 것 같다. 새 소설을 읽어도 언젠가 읽었던 것 같고, 다시 읽어도 마치 처음 읽는 것 같다. 소설 속 문장들이 때로 시와 같아서 운문과 산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문장도 그렇고 소설 속 분위기도 그렇다. 뭐가 시적이냐? 라고 뭉는다면 딱히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윤후명의 소설을 접할 때면 늘 느끼는 기분이다. 한때는 그의 소설을 필사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생각으로 그쳤지만.

 

분명 읽은 소설인데 새롭게 다가온 구절을 옮긴다.

 

그 뒤 나는 원숭이 꿈을 여러 번 꾸었는데 나타난 것은 어김없이 그 원숭이였다. 그리고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한 마리의 원숭이를 두고두고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외로운 상태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 속내를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고 함께 나누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서의 원숭이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 소설속 원숭이는 다의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위의 문장을 보고 원숭이의 의미를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만약 이 소설을 지문으로 해서 문제를 내게 된다면, 예를 들어 '작가의 의도는?', 혹은 '이 소설에서 원숭이가 상징하는 바는?' 같은 걸 묻는다면 분명 작가조차도 정답을 맞힐 확률이 그리 높지 않으리라. 얼마전 안도현 시인의 강연에서 안도현 시인이 그랬다. "내 시가 실린 문제를 풀었는데 다섯 문제 중 하나가 틀렸다. '작가의 의도는?'이라는 문제였다.'

 

 

오늘도 내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윤후명의 소설을 빌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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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3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favorite 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편인가요. 읽다보니 그냥 궁금해서요. ^^;
오늘 눈이 참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불면서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nama 2015-12-03 12:32   좋아요 1 | URL
그거야 모르지요. 실제 어떤지는...
눈이 펑펑 쏟아지다가 해가 반짝나고, 참 황홀한 날이네요.
 
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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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아하고 치밀하고 격조있는 소설가의 장인정신. 소설을 제대로 읽는다는 의미를 되새기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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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책도 괜찮다고 하시니, 저도 한 번 읽어보고 싶어요,
nama님, 편안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

nama 2015-12-02 07:18   좋아요 1 | URL
이 책 읽고나면 소설 읽는 맛이 달라질 것 같아요. 의미가 증폭되지 않을까 싶어요.
 

신문도 겨우 읽고 있는 요즘.  한겨레신문 정문태기자의 칼럼에 나온 숫자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719417.html

 

일부를 발췌하면,

 

'파리 희생자는 130명으로 늘었고 부상자만도 4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이 사건을 통해 그동안 폭력에 감춰져온 평등의 문제를 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

.

.

.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테러에 맞선 전쟁을 선포한 미국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부터 살해당한 민간인이 1만8000여명에 이른다. 지난 한 해만도 어린이 714명에다 여성 298명을 포함해 시민 3699명이 희생당했고 6849명이 중상을 입었다. 테러와의 전쟁에 휘말린 이웃 파키스탄에서는 같은 기간 시민 2만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과 캐나다와 이라크 보건부 공동조사단에 따르면 2003년 미군의 제2차 이라크 침공 뒤 2015년까지 50만명을 웃도는 시민이 희생당했다. 리비아 보건부는 2011년 미군과 나토군의 리비아 공습 뒤부터 시민 3만여명이 살해당했다고 밝혔다. 시리아인권감시소(SOHR)는 미군과 그 동맹군이 시리아 전쟁에 개입하고부터 올 10월까지 4년 동안 최대 34만여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미국-사우디아라비아 다국적군이 8개월째 소리 없는 학살전을 벌여온 예멘에서는 시민 2700여명이 살해당했다. 이 모든 희생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이 그 동맹국들과 손잡고 저질러온 21세기 학살극의 결과였다. 그렇게 100만 시민이 학살당하는 동안에도 이 세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100만 희생자들이 파리 시민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 100만 희생자들이 무슬림 시민이었고, 가난한 시민이었던 탓이다. 그 100만 희생자는 미국의 동맹국 시민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리하여 그 100만 시민 죽음들 앞에선 추모도 묵념도 없었다. 날뛰던 언론도 몸을 사렸다. 이게 정치, 경제, 종교, 인종적 차별로 일그러진 21세기판 평등의 실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이런 기사를 옮기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안녕하시냐, 는 안부인사 받는 것도 달갑지 않은 요즘이다. 한 게 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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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1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2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