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에 다녀왔다. 몇년 전 혼자 양구에 다녀왔던 남편이 나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단다. 여행은 주로 내가 옆구리 찔러서 다녀오는데 이번만은 남편이 친절하게도 내 옆구리를 찔러주었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는 법. 그간 열심히 찌른 보람이 있었다.
양구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남편이 주로 보는 텔레비전 당구 경기가 양구에서 많이 열린다는 정도쯤. 친구 남편의 고향이 양구라고도 했다. 내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동네가 양구였다. 인터넷 검색이 있지만 미리 알고 가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알고 가는 것보다 모르고 가야 더 생동감과 현장감이 있다. 동네가 크면 얼마나 크랴.
펀치볼.
남편 말에 따르면 거인이 땅바닥에 주먹으로 펀치를 해서 움푹 파인 모양으로 둥그런 분지형태를 띠고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과연 그랬다.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넓다. 한 바퀴 걸어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어서 놀랐다고나 할까.

을지전망대 가는 방법은 약간 복잡하다.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전망대는 없고 매표소 건물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전방 지역이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음..자세한 설명은 안 하고 싶다. 모르고 가야 재밌으니까. 다만, 인터넷 신청을 할 수도 있고 현장 접수도 할 수 있는데 성수기 때는 미리 알아봐야 할 듯하다.
두어 시간 기다림 끝에 선두 차량을 따라 출발했다. 탑승 인원 확인, 휴대폰 촬영 금지 스티커 부착, 경광등 부착, 네비게이션 가리개 장착, 출발 차량 번호 부착 등 삼엄한 준비 과정이 낯설지만 신선하다. 분단의 지난한 슬픔 앞에서 한낱 관광으로 전락한 이 상황을 신선하다고 느끼는 모순. 안보관광.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락된 곳에서 펀치볼을 피라미드 모드로 찍고 있는데 새하얀 얼굴의 앳된 병사가 다가와서 사진을 보여 달란다. 자, 봐요. 절대 함부로 찍지 않아요. 피라미드로 찍는 폼이 눈에 띄었나보다.
펀치볼. 알고보니 펀치볼은 화채그릇을 의미한단다. 인도 치토르가르를 치약가루, 바라나시를 비아그라로 명명해버리는 남편의 상상력과 엉뚱함이 참 사랑스럽다. 어쨌거나 주먹질도 펀치니까. 사전에서는 '산간 또는 산허리의 우묵한 곳'이라고도 나와 있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사과는 특히 일품이라고 한다.
박수근.
동네가 온통 박수근이다. 영국의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이 셰익스피어로 먹고 살듯 이곳 양구도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다만, 먹고 사는 것보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고 할까. 박수근 미술관 가는 길에 박수근 동상과 아파트 벽화를 한 컷으로 담을 수 있는 교차로가 있는데 사진에 담지 못해 내내 아쉽다.

박수근 미술관.
군립으로 운영하는 박수근 미술관은 내 상상보다 훨씬 훌륭하다. 미술관 부지와 건물에 생동감이 넘친다. 아무래도 소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박수근 화백상.
박수근의 특징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소박'. 생김새도 참 소박하게 생기셨다. 미술관에 있는 그의 말을 옮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전시물을 보다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 했다. 다음 사진을 먼저 보시라.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수근. 그가 감명깊게 보았던 밀레의 화집이 이런 것이었을까? 흑백사진으로 만든 스크랩북조차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를 둘러싼 세상이 온통 소박했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먹먹해짐.

그의 이력서. 양구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미술공부(독학). '독학'이란 한자에 유독 눈이 간다. 15세 때의 일이다. '소박함'으로 한 세계를 일군 분. 책으로는 봤으나 건성건성 읽었음이 틀림없는, 그의 진면목을 미술관에 와서야 확실하게 깨닫는다.
양구 9경
1경 양구수목원
2경 한반도섬
3경 두타연
4경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5경 양구백자박물관
6경 펀치볼
7경 양구봉화산
8경 상무룡출렁다리
9경 광치계곡
3경 두타연에도 갔는데.
을지전망대보다는 덜 까다롭지만 역시 안보관광지로 자차 없이는 접근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앳된 군인들의 차량 점검, 인원 파악 등도 비슷하다. 문화해설사의 너스레가 유쾌하고 명확한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다만 주의할 점은...

곳곳이 지뢰밭이란다. (근데 사진 올리기가 참으로 난해하다. 시간과 노력을 많이 잡아먹는구나.)
양구백자박물관.

예술은 때로 장난...
15~16세기 양구지역은 도자기 생산의 요지였다고 한다. 새로 알게 된 사실.
양구 9경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지만 내게는 새로운 구경거리였던 것은?

순환자원 회수로봇으로 캔이나 페트를 넣으면 한 개에 10포인트(10원)를 받는다고 한다. 디지털 폐지수집으로 불리는 앱테크보다 실용적이고 건강한 시스템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네가 크면 얼마나 크랴' 했던 내 어리석음. 1박 2일 동안 다섯 군데를 보았으니 네 곳은 다음으로 남겨둔다. 양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제에 자리한 서점 <책방나무야>를 들렀다. 인제 버스터미널에서 아주 가깝다. 이 동네에 자주 왔었지만 서점은 처음이다. 인터넷 검색이 필요한 순간.

주인분하고 몇마디 나누었는데 동네에 이런 책방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하면 안되니까 책 두 권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