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 4권째 읽고 있는데 서서히 끝자락이 보인다. 흥미진진하긴 한데 신물이 올라오려고 한다. 이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입술에 물집도 생겼다. 마음껏 쉬려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는데 이건 쉬는 게 아니다. 게을러지고 싶은데 도대체 이 책 때문에 게을러질 수가 없다. 차라리 빨리 읽고 쉬는 게 나으려나.

 

30여 년 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열흘 동안 읽은 적이 있다. 책에 등장하는 온갖 사람들을 각주를 달아가면서까지 읽었다. 물론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면 자신이 없다. 이젠 기억에 남는 것도 거의 없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그 당시 곰브리치 대신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단지 어려운 책을 읽어냈다는 쓸데없는 자만심 대신 좀 더 내실있는 지식의 기초를 닦지 않았을까 싶다. 소화도 제대로 시키지 못할 책에 집착하느니 기초부터 차근히 다져주는 것이 훨씬 빠른 길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에겐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 있었다. 남들 다 하니까, 그래도 명문 축에 들어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나 역시 <수학의 정석>을 끼고 끙끙거렸다. 게다가 되지도 않을 미술대학에 간다고 2년 간 헛된 일에 빠져 있었다. 고3이 되어 미술을 접고 공부에 전념하고보니 수학이 문제였다. 한번도 제대로 풀어보지 못한 수학의 정석을 과감히 버렸다. 우선 수학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보았다. 성적이 올랐다. 이번엔 <기초해법수학>을 집어들었다. 두 번을 풀었다. '기초'를 접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성적도 많이 올랐다. 예비고사에서 수학이 50점 만정이었는데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본고사에서도 수학의 덕이 컸다. 기초의 힘이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 <미술이야기>가 기초를 다져주는데 그만이다. 역사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쉬운 말로. 예를 들면,

 

사실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세 뒤에 이어지는 유럽의 근대를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시기로 포장하려는 역사 서술 방식 때문입니다. 서양의 근대는 르네상스로 시작하죠. 르네상스를 빛과 영광의 시대로 강조하기 위해 비교 대상이 되는 직전 시기를 낮춰 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빛과 이성으로 대표되는 근대와 어둡고 무지몽매한 중세를 대조하면 이해하기가 훨씬 쉽지 않겠어요? 사람들도 이런 선명한 비교를 좋아하고요.

 

앞서 설명했듯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에 참가한 영주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얻어서 나라를 세우고 싶어 했고요. 함게 나선 농노들 역시 이 기회에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다채로운 욕망이 뒤엉킨 가운데 상인 계층의 이윤 추구는 단연 노골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을 새로운 장사의 기회로 보았어요. 1202년에 출정한 4차 십자군은 그 욕망이 가장 숨김없이 드러난 원정이었습니다. 이때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가서 같은 기독교도를 잔인하게 학살했거든요. 수많은 사람이 죽고 콘스탄티노플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5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3만 명으로 줄고 하기아 소피아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요. 4차 십자군의 약탈은 기독교도가 자행한 역대 최악의 노략질일 겁니다.

 

..고딕 성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중세에는 하늘 높이 솟은 고딕 성당이 신과 통하는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고딕 성당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거나 발상의 전환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조너스 소크 박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의학자였던 소크 박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전 세계에 무료로 배포해서 소아마비를 퇴치하는 데 앞장선 인물입니다. 이 덕분에 그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을 선정되기도 했지요.

소크 박사는 언젠가 연구 도중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딪혀 교착 상태에 바졌다고 합니다. 그때 우연찮게 13세기에 지어진 한 성당을 찾아가게 되었죠. 그리고 바로 그 성당 안에서 실험실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답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높은 천장 덕분에 꽉 막혔던 자신의 생각이 갑자기 트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크 박사는 훗날 자신의 이를을 딴 연구소를 지을 때 건축가에게 연구소의 천장을 높여 달라고 주문했다고 해요. 마치 고딕 성당처럼 말이죠. 이 덕분일까요? 이후 조너스 소크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여러 차례 노벨상을 타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소크 박사가 찾아간 성당은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라고 함.

 

 

읽다보면 작은 감탄이 절로 나오곤 한다. '그랬었구나' 하는 깨달음에 책 읽는 기쁨이 배가된다. 책이 좀 두껍다는 것만 빼면. 4권 끝부분이 고딕미술인데 르네상스는 또 언제쯤 출간되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