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가 고단하다. 남이 해주는 밥 한 끼(점심)가 좋아서, 퇴근길이 좋아서, 출근한다고 말하지만 돈을 번다는 건 결국 내 시간과 내 육체를 헌납하는 일이다.

 

버스를 두 번 타야하는 출근을 앞두고 나는 늘 아침마다 내 뱃속의 신호를 고대한다. 내 용변 습관은 참으로 속전속결이라서 변의가 오면 단 몇 분 내에 화장실로 달려가야 한다. 좀처럼 기다려주지 않는다. 차라리 변비를 부러워할 정도이다. 혹여 버스를 타고가다 신호가 올까 내내 두렵기까지 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침에 밥을 먹고 화장 비슷한 걸 하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일을 보고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하루치의 행복이 이것 뿐이라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흐뭇하다.

 

이렇게 소박한 일상이지만 밥벌이는 역시 고된 일이다. 틈틈이 온라인 연수까지 한 강좌 해치우자니 책 한 권 읽기가 빠듯하다. 겨우 읽기를 마친 책 한 권, 제목이라도 기억하고자 작은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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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이주은의 글은 읽기 편하고 가슴에도 적절히 와닿아서 즐겨 읽게 된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화가들의 일화가 특히 재밌다. 재밌다? 불우한 일생을 보낸 화가들의 이야기가 재밌다니...인상적이라고 해두자. 그 중 조반니 세간티니. (Giovanni Segantini 1858~99)

 

국적이 없어지던 때는 일곱 살 무렵이었는데, 그 무렵에 그는 부모도 잃었다. 어릴 적 그의 삶은 외롭고 처참했다. 아버지의 세번째 부인으로 들어간 그의 어머니는 남편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어렸다. 세간티니가 태어나던 해에 그의 형은 화재로 인해 숨지고, 그 일로 어머니는 쇠약한 몸에 우울증까지 겹쳐 세간티니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죽고 말았고, 자기를 이복 누나에게 잠시 맡기면서 봄이 되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던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도 이듬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겨울만 잘 견디면 봄이 오고, 아버지도 오리라 믿었던 어린 세간티니에게 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곡절 많은 타인의 일생은 때로 내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도 살아냈구나.' 하는.

 

 

세간티니는 오직 한 여인만을 평생토록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그녀에게 반하여 청혼도 했고, 아이도 넷이나 두었지만, 정식 부부로 살지는 못했다. 이유는 세간티니의 국적이 분명치 않아 행정상 혼인신고가 보류되었기 때문이다. 세간티니가 살던 집은 지금은 이탈리아 땅이지만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던 아르코에 있었다. 전 생애에 걸쳐 그는 자신이 이탈리아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나 국적의 문제는 살면서 몇 번이나 그를 자잘하게 괴롭혔다. 화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1890년 무렵에는 국제전시회에 출품하기로 했는데, 행사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참가신청서가 통과되지 않았던 일도 있다. 세간티티는 이탈리아 국적을 끝내 취득하지 못했고, 사후에 그에게 국적을 부여한 나라는 결국 스위스였다

 

 

가정사에 국적 문제까지...

 

 

이런 세간티니을 맡게 된 이복 누나는 일을 하려면 이탈리아 국적으로 옮겨두는 편이 낫겠다 싶어 세간티니와 함께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하는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국적은 허공에 뜨고 만 것이다. 일곱 살에 누나의 집에서 나와 떠돌이가 된 세간티니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 상태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글쓰기를 제대로 익혔다. 그가 글쓰기를 배워야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멋진 편지를 쓰기 위해서.

 

 

세간티니는 그래서 봄이 되면 제비꽃을 연인에게 보내며 이런 편지를 쓰곤 했단다.

 

 

눈에 잘 안 띄는 꽃이지만 받으세요. 내 사랑의 상징입니다. 봄이 와도 당신에게 배달되지 않는다면, 아마 그건 내가 살아 있는 것들 사이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앞으로 제비꽃을 보면 이 화가가 떠오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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