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이 책을 읽겠다고 빌렸으나 두어 장 정도 읽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고단하다보니 고요하게 읽어야 할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일들이 매듭 지어지자 다시 이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지난 번에 읽다가만 처음 두어 장을 다시 펴보고 싶지 않았다. 소제목을 보고 우선 흥미가 당기는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몽골 이야기부터 읽어나갔는데 꼭지마다 잔잔한 감동과 아련한 아픔 혹은 기쁨같은 게 밀려들었다. 점점 몰입되어 한 꼭지씩 읽게되는데 한 권을 다 읽어나가는 기쁨보다 얼마 남지 않은 슬픔이 깊어질 무렵 드디어 완독하게 된다. 진한 아쉬움과 함께.
이 책에서 언급된 책들을 일단 정리해본다.
오늘은 시간이 널널하니 책 속에 인용한 시도 적어본다.
무중력을 향하여
황 동 규
'이제 나는 내가 아니야!' 병원 침대에 누웠다가
세상 뒤로 아주 몸을 감추기 전 친구의 말,
가면처럼 뜬 누런 얼굴,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창틀에 놓인 화병의 빨간 가을 열매들이 눈 반짝이며
'그럼 누구시죠?'
입원실을 나와 마른 분수대를 돌며 생각에 잠긴다.
조만간 나도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겠지.
그 순간, 내가 뭐지? 묻는 조바심 같은 것 홀연 사라지고
막혔던 속 뚫린 바보처럼 마냥 싱긋대지 않을까.
뇌 속에 번뜩이는 저 빛,
생각의 접점마다 전광 혀로 침칠하던 빛 문득 사라지고,
생각들이 놓여나 무중력으로 둥둥 떠다니지 않을까.
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
매에 가로채인 토끼가 소리 없이 세상과 결별하는 풀밭처럼
아니면 모르는 새 말라버린 춘란 비워낸 화분처럼
마냥 허허로울까?
아니면 한동안 같이 살던 짐승 막 뜬 자리처럼
얼마 동안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무중력 냄새로 떠돌게 될까?
부모의 죽음 앞에서 얄밉게 떠오르는 생각, 내가 다음이구나. '내가 죽고 없는 세계'가 결코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에 부모의 죽음이 더욱 서러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불교적 사고가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불교를 공부하면서 추상적 사고를 훈련했어요. 가장 추상적 학문이 입자 물리학인데 물리의 세계, 극미의 세계, 양자역학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유식사상도 브레인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재가 불자 자연과학자 박문호'를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다.
화공스님의 책. 이 책을 과연 읽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화공스님만큼은 기억하고 싶다. 화공 스님에 대한 간략하고도 인상적인 글을 읽다보면 강석경이라는 소설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장석주의 시에도 오십의 적막함과 기도가 수정 같은 필치로 그려져 있다.'는 시집이다. 인용된 시를 읽다보면 이 시집도 조만간 읽고 싶어진다.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는 경허선사의 세 상좌 이야기 <할>을 마지막으로 펴내고 68세에 이승을 떠났다.
최인호의 이 소설도 조만간 읽고싶다.
여러 권의 책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스님들에 대한 책이다. 꼭지마다 소개하고 있는 여러 스님들 얘기를 읽다보면 강석경이라는 작가도 어느 정도 스님의 대열에 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72쪽의 책을 185쪽부터 읽어서 내가 마지막으로 읽게 된 쪽은 182쪽이 되는데(중간에 간지가 있음) 바로 이 부분에 작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내게는 이 책의 결론이자 작가의 속 깊은 발원으로 읽힌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깨죽을 먹는 날이다. 깨죽을 먹고 싶다. 시중에서 먹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대방의 삼엄한 고요 속에서 경건하게 의식을 치르고 지상의 양식을 금처럼 발우에 받아 들고 싶다.
한 학인 스님은 경책을 내리는 스님도, 받는 스님도 다 합장한다는 말을 들려주면서 "그만한 복을 짓지 않으면 누릴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법공양이야. 앞으로 남은 날이라도 부지런히 복을 지어 다음 생에는 가사 장삼 수垂하고 해인사 대방에서 깨죽 받기를 발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