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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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범신은 늙지도 않는다. 이제는 지겨워질법도 하련만 그는 아직도 사랑을 말하고 있다. 말한다기 보다는 사랑을 이리저리 손에서 자유자재로 놀리고 있다. 마치 공기돌처럼. 사랑타령도 이만하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다. 경외감마저 든다.

 

<너 없이 걸었다>, <마션>을 손에 잡았다가 박범신의 <당신>을 읽는 순간, 그 두 권을 손에서 놓아벼렸다. 전혀 서운하지 않고 그리 미련도 남지 않는다.

 

매화 나무 밑에 평생을 함께 살았던 주호백의 시신을 묻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매우 매혹적이면서 고혹적이다. 문장은 노회하면서도 물기가 촉촉하게 배어 있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나오곤 한다. 얼마만인가, 이런 느낌. 연애소설과는 다른 데 딱히 연애소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함. 그저 인상 깊은 구절을 옮길 뿐이다.

 

누구는 물처럼 가슴으로 스며드는 경우도 있다 하겠지만, 단 한 번의 채찍질로 이쪽 편의 심지를 쪼개며 들이치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확신이었다.   ...나의 중심을 꿰뚫고 다가왔던 김가인.....그리고 나는 그 이후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평생을 함께헤온 그(주호백)에게조차 그러했다. (89쪽)

 

달빛에 젖은 흰 꽃이 뚝,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나뭇가지를 투과한 달빛의 포말이 그이의 얼굴에 어른어른 닿는다. 그이의 입술은 볼륨이 얇아 마른 꽃잎처럼 구겨진다. 슬프게 생긴 입술이다. 나는 그이 입술을 섬세히 적시고, 어느새 덥혀진 그의 혀가 나의 혀를 가볍게 달빛 속으로 끌어낸다. 부드럽지만 날카롭고 숨어 있지만 최상의 보배이며 형태가 있지만 정형이 없는 혀는, 나의 사랑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당신을 적시는 달빛이 될게요, 라고 나는 소리쳐 말하고 싶다. (169)

 

90년대 어느 시기를 뜨겁게 달구던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잠시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왜 그 책이 마녀사냥감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새파란 젊은 작가가 아닌 노련한 노작가의 이런 달짝지근한 문장을 읽는 맛은 생각보다 각별하다. 섬세하지만 간지러운, 작가의 장난기가 재밌다.

 

인혜와 내가 공통으로 가진 회한이 있다면 사랑이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그 점일 터였다. (193)

 

이 소설의 주제쯤 되는 구절이다. 다음 구절 역시.

 

"네 아빠가 치매에 걸려 나를 힘들게 한 건 소소해....병이 깊어지면서 아빠가 오히려 나를 행복하게 한 순간이 더 많았다는 걸 네가 이해하면 좋겠어.....아빠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행복이었단다. 네 아빠의 병은 내게 참된 각성을 불러 일으켰어. 사랑은 단지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게 아니라 생명 자체를 함께하는 거라는 사실을 배운 거지. 나는 그의 숨결이 되었고 아빠 역시 나의 숨결이었어." (216)

 

그래도 역시 이 소설의 키워드는 '당신'이다.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게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267)

치매를 인지한 후 그는 나를 당신, 이라고 자주 불렀다.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나는 눈물겨웠다. 그와 나의 관계에서 우리가 절실하게 가닿고 싶었던 수평적 관계가 완성되는 느낌이 그 호칭에 깃들어 있었다.....내가 그와의 관계를 수평적이라고 느낀 건 당신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였다. 눈물겹고 따뜻하고 또 공평한 낱말이었다. (348)

 

치매 얘기를 바닥에 깔아서인지 돌아가신 부모님이 언뜻언뜻 생각났다. 우리 부모님은 인생의 끝까지 수평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한 분들이다.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사셨다면 달라졌을까?

 

인생의 종점에서, 설사 치매에 걸려 그 삶이 어긋나고 초라해질지라도 이 소설속의 등장인물처럼 '당신'이라는 수평적 관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이란 여간해서는 달라지기 힘든 종족이므로.

 

최백호의 '길 위에서'라는 노래를 함께 들어볼 일이다. 소설에도 계절이 있다면 이 소설은 단연 겨울에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아니면 매화꽃 흩날이는 계절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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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5 16: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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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0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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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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