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보는 나라일 경우 되도록 첫 숙소로는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곳에 묵으려고 한다. 이유는, 외국에서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하고, 새로운 곳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외국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을 통해 외국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물론 많은 것을 묻고 싶지만 그건 초면에 할 일이 아니어서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이런저런 상황을 가늠해볼 뿐이다. 짧은 시간의 만남에 불과하지만 그 여운은 남겨진 한 장의 사진보다 훨씬 오래간다.
그저그런 표준형의 숙소라면 기억에 남지 않지만 생활의 모습이 드러나는 살림집인 경우에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여행은 추억을 남겨야하는 법, 오래 유지되는 추억을 위해 나는 기꺼이 한인 민박을 선택한다.
쿠알라룸푸르 역시 별 고민없이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한인 민박으로 정했다. 요금은 좀 비싼 편이었지만 (외국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이 그리웠다. 외곽지역이라 찾아가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낯선 곳에서 길 찾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지만 날은 점점 어두워오고 택시 기사는 엉뚱한 곳에 내려주는 등 생각지도 않게 숙소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방심한 탓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수영장이 있었다. 단지내에 수영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딸아이는 환호성을 지른다. 비록 수영장에 발 한 번 담가보지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민박 주인인 청년에게 물었다. "이곳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대개 이런 수준으로 살고 있나요? 마치 뉴질랜드처럼 깨끗하네요."
다음날, 말라카로 가기 위해 Selatan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이건 버스터미널이 아니라 차라리 공항터미널이라고 해야 어울린다. 버스 승하차 시각을 알리는 모니터는 공항의 비행기 이착륙을 알리는 모니터와 똑같고 터미널 건물 구조나 시스템도 공항 터미널과 너무나 흡사하다. 다시 한 번 속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말레이시아의 생활 수준이 이렇게 높은가?"
고속도로의 차량들은 대부분 해외 수입차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도로도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도로변으로는 온통 팜트리와 야자나무숲으로 가도가도 팜트리와 야자나무뿐이었다. 좀 특이한 게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럼 위협적인 대형 화물차량들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곳의 주력 산업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라카에서의 첫날은 고민끝에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Hotel Puri로 정했다. 정원이 아름다운 깔끔한 호텔답게 우리가 보통 애용하는 게스트하우스 수준보다는 높았다. 인도에서의 5,000원짜리 숙소도 별 불평없는 딸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괜찮아?" 딱 하루만 이런 곳에서 자보기로 했다. 이런 그럴듯한 숙소에서도 분명 잠을 잤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울궈먹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이 호텔의 반 값에 해당하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로 옮겼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방이다. 화장실인 줄 알았는데 샤워만 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인 bathroom은 그저그랬으나 에어컨 하나는 시원하게 작동되고 있었다. 덕분에 남편이 냉방병에 걸리고 말았다. 창문 하나 없는 감방 같은 방은 폐쇄공포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튿날은 문단속은 커녕 문을 빠끔히 열어놓고 자야했다. 감옥체험이 이럴까 싶었다.
말라카에서 3일 보내고 다시 돌아온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일단 도심 지역의 번화한 곳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이름하여 부킷 빈탕. Replica Inn이라는 깔끔한 곳이었다. 가까운 곳에 쇼핑몰이 몰려 있었다. 택시 잡기도 편하고 환전소도 많고 밥 먹을 곳도 다양하게 널려 있었다. 시내 투어하기에 특히 쇼핑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곳이었다.
이틀을 그곳에서 보내고 이번엔 차이나타운으로 숙소를 옮겼다.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눈에 익은 듯한 거리가 우리를 반겼다. 아, 어디더라. 방콕의 카오산거리(여행자거리) 같기도 하고 델리의 찬드니초크(재래시장) 같기도 했다. 건물은 대개 우중충하고 도로변이나 보도블록은 몹시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그러나 숙소(4인실)는 저렴했다. 하루에 100RM(링깃, 1링깃은 약 390원 정도)
이제야 쿠알라룸푸르가 조금씩 파악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같네요'라는 내 말에 민박주인이 왜 웃었는지 이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