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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 이해인 산문집
이해인 지음, 황규백 그림 / 샘터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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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뒤져보니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이 네 권, 산문집이 한 권 있었다. 2000년에 출간된 영문 번역판 <여행길에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80년대 중반에 내 손으로 들어왔는데, 신기하게도 이 네 권 모두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물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행히 이 책들을 보낸 친구들의 이름이 안쪽에 쓰여져 있어서 대강을 짐작할 뿐이다. 음, 그때는 나도 꽤나 인간적인 교류가 깊었던 것 같다.  

그 중 <민들레의 영토>는 "26번째 생일에"  친한 친구가 보내주었다. 지금 내 나이의 딱 반절에 해당하는 나이인데. 지나간 세월을 헤아려보고는 혼자 기겁을 했다. 하여튼 80년대 중반에는 내 주변 친구들이 온통 이해인 수녀님의 팬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랬었다. 

교과서에서 접하던 시는 늘 부담스러웠는데 드디어 교과서를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통해 만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맑고 영롱한 시어들에서 많은 위로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 하나 하나가 이해하기 쉬웠고 그만큼 흡인력도 강해서 몇 권을 읽어도 전혀 물릴 줄을 몰랐다. 그 때가 내 나이 20대였다.

그러고는 한동안, 정말 한동안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접하지 않았다. 한때, 수도자의 길에 마음 한 쪽을 걸어두었던 이후로, 카톨릭이라는 세계에서 두 발을 완전히 철수시킨 이후로, 나는 철저하게 그쪽 세계와 불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읽는 이해인 수녀님의 글은 솔직히 그전 만큼 마음에 달라붙지는 않는다. 낯설지는 않은데 뭔가 버석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그런데 수녀님은 지금도 한결같다. 윤동주의 <서시>를 예전처럼 지금도 사랑하는 수녀님의 변함없음에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다.  

P.57 ..( 윤동주의) <서시>를 자주 외우며 살았고, 어쩌면 그 시의 영향으로 수도자의 삶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견뎌왔는지도 모른다....요즘처럼 내가 암으로 힘든 투병을 하면서도 짬짬이 시를 쓸 수 있는 저력 역시 ....소녀 시절부터 애송했던 이 아름다운 시집 덕분이었음을 믿는다. 

한결같은 그 심성, 그 믿음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이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보아도 수녀님의 그 변함없는 진실성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틈틈이 이 책을 읽는 일은 무척 버겁고 힘겨운 일이었다. 도저히 마음 편히 대할 수 없는 거친 아이들 틈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이란 요원하고도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p.143 ...작은 꽃, 작은 길의 영성을 큰마음으로 살고자 나도 다시 분발해야 한다. 나이 들면서 영적 열망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게 수도자의 삶이다. 나도 한때는 잠시나마 꿈꾸었던 길. 이해인 수녀님, 당신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제6장 추모일기에서 친분이 두터웠던 화가 김점선, 영문학자 장영희 등을 기억하며 쓴 글은 미처 읽지 않아도 가슴이 뭉클해져온다. 얼마전 김점선의 책을 두 권 읽고 참 허전했었다. 친분 관계는 커녕 생전에 직접 만나뵌 적도 없는 분인데도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그리웠는 지 모른다. 짝사랑 같은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나 같은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친분이 두터웠을 이해인 수녀님이야 오죽하랴. 

부디 건강하십시오. 이 혼란스럽고 어수선하고 오리무중인 숲 속에서 언젠가는 수녀님처럼 영성으로 가득찬 삶을 그리워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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